26화
다트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리스는 검을 거두었다.
세계 침식이 발동한 상황에서 모의전은 무의미했다.
곧 서리스 근처에 포탈이 나타났다.
“선배님들.”
“그래, 네 애들 챙겨라. 우리도 도와주마.”
엑포드가 대답하며 그는 빠르게 클로나부터 챙겼다.
쾅쾅.
그런 순간 누군가 땅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길 수 있, 었는데.”
스스로에게 분한 듯 도로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리스에게 몇 번이나 깨졌을 때도 이 정도로는 분해하지 않던 도로시였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도로시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었기에.
더욱 분했던 모양이다.
“도로시, 옮길 테니 얌전히 있어.”
“괜찮, 아. 직계님, 내가 직, 접 가.”
도로시는 부들거리는 팔로 몸을 악착같이 일으켰다.
공격하자고 제안한 것은 도로시다.
그랬는데 정작 본인이 당해 버렸으니 자존심이 크게 상한 모양이었다.
‘도로시는 무(武)에 관해서는 진심이었으니까.’
청랑단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 거겠지.
오늘따라 왜소해 보이는 도로시의 등을 보고 있던 서리스는 서발광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서, 서리스, 도로시는 괜찮아?”
이쪽은 남 걱정 중인가.
“아마도.”
“하지만 아마 도로시라면 이번 일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어차피 저 상태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괜히 자존심만 더 건드리게 될 거야. 일단은 내버려 두는 게 좋겠지.”
이를 듣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한 서발광은 쓰게 웃었다.
“서리스, 도로시나 아카펠, 나와 그리고 서리스 너까지. 우리는 아직 16살이야.”
그런 순간 서발광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는 얼추 몸을 추스른 듯 혼자 자리에서 서더니 말을 이었다.
“아직 모든 걸 쉽게 척척 해내기에는 우린 다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을까.”
16살.
서발광 말대로 한참이나 어린 나이다.
서리스에게 있어서 다시 경험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도로시나 다른 이들에게는 모든 게 처음이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쉽게 납득 할 수 없다.
서리스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른은 아이의 눈과 자신의 눈이 얼마나 다른지 알지 못하니까.
서리스가 짧게 침묵했다.
‘실수했군.’
도로시가 무작정 혼자서 이겨낼 거라 생각하고 내버려 두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도로시와 제대로 이야기해 볼게.”
서리스는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
어른이 되어 가는 아이들에게 어른이었던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굴었다.
“응.”
서발광은 웃어 주었다.
서리스는 서발광이 눈이 보이지 않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윽고 팀원을 다 챙긴 뒤, 서리스는 청랑단 본부로 이어지는 포탈을 탔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치료사들이 모의전으로 상처 입은 단원들을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서리스도 간단하게 치료를 받고 나니 움직이는 데 별문제 없었다.
“몸 상태가 괜찮아진 인원은 이쪽으로 와라.”
다트론의 부름에 서리스는 우선 모여 있는 청랑단원 쪽에 합류했다.
그러자 그는 방금 전 보고 받은 종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현재 세계 침식 발생 위치는 레일로, 시에스탄 마을 라무르 강 부들 지대다.”
비교적 청랑단 본부와 가까운 위치다.
그러니 이쪽에 이야기가 들어온 거겠지.
“세계 침식은 판별 상 4성급. 잘 알겠지만, 이 임무는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
4성급.
서리스의 눈동자 위로 흥미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검은별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야.’
서리스의 목 뒤 가장 아래 새겨진 검은별.
예전 3성급 세계 침식을 클리어한 뒤, 검은별의 힘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었다.
그때는 비록 기절하여 무슨 상황인지 몰랐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청랑단과 함께 가는 이상 이전과 같은 일이 발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번 세계 침식은 평균보다 규모가 크고, 속도 또한 빠르다. 그러니 여기 있는 인원 전원이 갈 거다.”
그래서 모의전까지 중단한 거였나.
서리스가 납득하고 있자 저쪽에서 몸을 회복한 53기가 오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미안하다. 우리가 져서.”
서리스의 물음에 답한 아카펠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모의전에서 진 게 그렇게 신경 쓰이는 건가.
“아카펠, 우리는 얼마 전에 짜인 팀이잖아. 오히려 선전한 거야.”
“하지만 넌 이겨줬잖아.”
“그게 신경 쓰인다면 다음에는 이겨.”
그리 말한 서리스가 씨익 하니 웃어 보이자 아카펠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다음에는 안 진다.”
그러곤 곧 아카펠이 따라서 웃음을 짓자, 서리스는 도로시를 돌아보았다.
“도로시, 너도 다음에는 이겨.”
다음.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소리.
그 말에 아카펠과 같이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도로시가 고개를 들었다.
도로시의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당연한 소리 안 해도 돼. 직계님. 나 앞으로는 무조건 이길 거니까.”
침울해 있던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조금은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시간이 없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
모의전 덕분에 다들 무기를 챙겨 온 상황.
제복이야 늘 입고 다니는 것이었으니, 다트론은 곧바로 모인 단원을 이끌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리스, 그거 알아?”
그렇게 레일로의 중심지에서 빠져나온 순간 라파즐리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서리스가 의아하게 그를 보자, 라파즐리는 가볍게 웃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청랑단이 세계 침식 발생 한 곳으로 이동할 때.”
그의 발아래에서 별이 몰리기 시작했다.
“행군에서 가장 쳐진 꼴찌가 속한 기수 전원이 벌칙을 받는다는 거.”
그게 무슨 헛소리…….
서리스가 되묻기도 전에 갑자기 청랑단원 전원이 달리기 시작했다.
반응이 늦은 것은 당연히 53기 네 명.
얼떨떨한 표정인 세 사람을 보고 서리스가 소리쳤다.
“53기! 꼴찌면 벌칙이다. 달려!”
네 명 전원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시에스탄 마을 라무르 강 부들 지대.
푸른색 강이 인상적인 그곳에 흙먼지 바람이 도착했다.
그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청랑호법 라만 다트론이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곤 뒤를 슥 돌아보자, 거기에는 필사적으로 따라온 청랑단원이 몇 명 보였다.
다들 매일같이 별을 일으켜서 달리는 훈련법을 한 놈들이다.
이 정도도 못 따라오면 오히려 혼내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절반 가까이가 도착하지 못한 채,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직계라더니.’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선두에 있는 서리스였다.
‘잘 따라오는군. 선배 기수들에게도 전혀 안 밀리는 건가.’
직계가 들어온 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꽤 관심이 간다.
들려오는 이야기론 적응도 꽤 잘하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30분 휴식 후 세계 침식으로 들어간다. 수색 담당들은 미리 주위를 확인해라.”
명령을 내린 다트론이 세계 침식을 탐색하는 동안 서리스는 숨을 고르며 땀방울을 닦았다.
모의전을 하고 곧장 세계 침식 발생 지역까지 뛰어 왔으니.
서리스도 살짝 체력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나야 한숨 돌리면 괜찮겠지만.’
서리스는 아카펠과 도로시 쪽을 보았다.
물로 목을 축이며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하려는 녀석들을 보니 꽤 안쓰러웠다.
지금보다 급박한 상황이라면, 이런 휴식도 없이 곧장 들어갔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보다 문제인 사람이 있었다.
체력을 너무 쏟아 물조차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상태가 된 서발광이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달달 떠는 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서발광, 괜찮냐?”
“얘 쓰러지겠는데.”
“네, 네.”
같은 방 선배 기수들이 그의 상태를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나한테 육체 단련법을 가르쳐 달라 하더니.’
과연 오늘 그 이유가 보다 명확히 드러났다.
서발광의 검술은 서리스와도 맞붙을 만큼 강하다.
그러나 청랑단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전투 능력만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출동할 수 있고,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대응 가능한 체력.
세계 침식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샤워 중에도 세계 침식이 발생 되었다면 중단하고 나와야 할 정도니까.
‘체력적으로 모자라면 못 쫓아온다.’
서발광은 타고난 한계의 부딪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리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서발광조차도 비교 못 할 만큼 저주받은 육체를 가졌었으니까.
차라리 별이라도 담을 수 있는 서발광이 훨씬 나은 상황이었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지.’
지금의 서리스는 육체적 한계가 없다.
그렇기에 더욱 서발광의 처지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비록 나중에 대성하지만, 육체적 한계라는 벽은 번번이 그를 막을 테니까.
‘됐다. 지금은 그런 걸 걱정 할 때가 아니야.’
서리스는 세계 침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들 지대로 이어진 강이 전부 세계 침식으로 물들어 있다.
바람에 흩날려야 하는 연약한 부들이 빽빽한 숲에 자라난 고목같이 사람 키보다도 더 크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뱀과 같이 똬리를 틀고 앉아 기분 나쁘게 잎사귀를 흔들거렸다.
그 사이 강물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스산한 분위기와 함께 지나갔다.
중간중간 보이는 기분 나쁜 색의 알껍데기에서 나온 놈들인 것 같았다.
역시 세계 침식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졌다.
‘이번에는 정신계 침략은 없는 거 같은데. 대신 극심한 지형 변화에다가 마수까지 태어났나.’
일반 동물이 마수화 하는 것과 달리 세계 침식에서 직접 태어나는 마수는 훨씬 위험하다.
세계 침식의 힘을 듬뿍 머금고 태어나는 놈들이니까.
‘침략계.’
마수가 태어나는 세계 침식을 일컫는다.
“청랑단 집합.”
서리스가 세계 침식을 확인하는 사이 다트론이 다시 모두를 불러들였다.
“지금부터 세계 침식 안으로 들어간다. 아직 주인을 발견하지 못한 만큼 각 팀으로 나눠서 움직인다.”
그러면서 그는 53기 쪽을 보았다.
“53기는 세계 침식이 처음인 만큼 다른 팀에 각각 둘씩 나눠서 붙이겠다.”
신입과 경력자를 함께 붙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알기에 서리스도 불만은 없었다.
“1팀은 50기, 51기, 그리고 53기의 서리스와 아카펠.”
이후 다트론은 곧장 팀을 나누기 시작했다.
“2팀은 49기, 52기, 53기의 도로시와 서발광이다.”
도로시와 서발광이 슬쩍 눈이 마주쳤다.
도로시가 서발광에게 깨진 이후 둘은 아직도 관계가 서먹했다.
정확히는 도로시 쪽이 서발광을 아직도 불편해했다.
“48기는 나와 간다.”
그렇게 팀을 나눈 그는 두 팀의 최고 기수 대표를 팀장으로 해 두었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다른 팀으로 가게 된 도로시와 서발광 쪽을 보았다.
도로시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 탓인지 선배 기수와 아직 친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쪽에 그녀를 유달리 재밌어하는 애니쉬아가 있긴 하지만.
‘모의전 때 풀린 것 같이 보여도. 내심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건데.’
사람은 답답해질 때 무심코 실수를 할 확률이 높았다.
“서발광.”
“응?”
그렇기에 서리스는 서발광을 혼자 조용히 불러들였다.
“도로시, 좀 챙겨줘.”
“알았어. 내가 잘 보고 있을게.”
서리스의 부탁에 서발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시는 서발광을 싫어할지라도, 서발광은 아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리스, 아카펠, 이리로 와.”
대화가 끝마치자 팀의 대표가 된 클로나가 둘을 불러들였다.
“신입한테 방금 깨진 2팀 대장 클로나야. 잘 부탁해.”
그녀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었다.
세계 침식 앞에서도 팀원의 긴장을 풀어 주는 그녀는 팀장 역할에 적합했다.
“구역은 크게 세 개로 나누었고, 각 조가 한 지역씩 맡아 수색하기로 했어. 우리가 갈 곳은 이쪽 방향.”
그러면서 클로나는 곤란하다는 듯 옆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에 공간 왜곡이 좀 있는 거 같아. 그러니 다들 조심해.”
“세계 침식에서 주의하는 건 당연한 거다.”
“어허, 팀장한테 반박하기 없기.”
엑포드의 말에 장난스럽게 이야기한 클로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웃었다.
“모두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가자고. 그럼 출발하자!”
그렇게 1팀이 세계 침식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