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엑포드를 쓰러트린 직계가 온다.
이 소문은 진작부터 청랑단원 사이에 퍼져 있었다.
펜타니엄 직계.
그건 펜타니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진 이들을 말한다.
사람이란 권력을 가진 이의 등장을 꺼린다.
그것도 하위 집단에 들어온다면 더더욱.
그랬기 때문일까.
서리스는 들어오자마자 쏠려 있는 시선 속에서 자세를 바로 하였다.
세계 침식 속에서 원활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친해져야 한다.
앞으로는 등을 맡겨야 할 동료들이고.
미래에도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예전에 나는.’
이들과 조금도 어울릴 수 없었다.
울드렌은 그저 몰락한 소가문의 가주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서리스는 이제 정말로 그들과 등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임을 얻고 싶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들. 53기수 대표 펜타니엄 서리스입니다.”
고개 숙인 서리스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고개까지 숙이는 깍듯한 그의 태도를 보고 아카펠이 놀라 경악했지만.
서리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미래에 서리스는 직계로서 그들보다 위에 위치하게 될 거다.
그러나 지금은 53기수 후배일 뿐.
한편, 직계인 서리스가 너무도 쉽게 고개를 숙여서일까.
청랑단원들도 멈칫한 채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양.
‘직계라며?’
‘직계가 보통 저렇게 쉽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해?’
‘이게 뭐다냐.’
엑포드가 직계한테 당했다고 들었을 때.
청랑단원들은 내심 분노했다.
엑포드는 그들과 한솥밥을 먹고 지내는 사람이다.
그런 이가 생판 모르는 이에게 당했다고 하니 열이 받을 수밖에.
그렇기에 직계고 뭐고 신입 대접을 톡톡히 해 줄 예정이었는데.
서리스는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깍듯했다.
“어, 거, 옆에 놈은 안 하냐.”
그랬기 때문인지 괜한 불똥이 아카펠에게 튀었다.
서리스는 당장 지적할 것이 없으니, 아카펠에게 시선이 돌아간 것이다.
“아카펠, 선배님들이야. 인사해야지.”
청랑단원의 이목이 그에게 몰리자, 서리스는 바로 아카펠을 슥 보았다.
그러자 아카펠은 윽 하며 잠깐 망설였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53기수 칸빌레 아카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카펠이 자기소개를 하는 사이 밖에서는 또 한 번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단 너희 침대는 저 방에 있으니 가서 짐 펴.”
펜타니엄 내에서 최고의 지원을 받는 청랑단이기 때문인지 각방을 쓰는 듯했고, 내부에는 총 3개의 방이 있었다.
그중 한 방을 가리킨 청랑단원의 말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2층 침대 두 개와 가구가 보였다.
방은 깔끔한 것이 청소가 잘 되어 있었다.
2층 침대가 두 개인 거로 보아 나머지는 서발광과 한 명 더 뽑힐 사람의 것이리라.
“여, 반갑다. 53기수들.”
서리스와 아카펠이 침대로 가서 앉자 방문 사이로 청랑단원 한 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서리스와 아직 떨떠름해 보이는 아카펠을 보곤 씩 하니 웃었다.
“나는 너희보다 한 기수 선배인 프레만이야. 이 방에서는 원래 막내였지.”
그는 드디어 막내 탈출이라는 듯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앞으로 너희 둘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게 될 거야. 잘 부탁한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서리스 쪽이 먼저 선뜻 대답하자 프레만이 되레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기수제라 한들 직계는 직계였으니 말이다.
그런 프레만을 보고 서리스는 미소 지었다.
“프레만 선배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53기수 청랑단원이며, 후배일 뿐입니다.”
“으흠, 뭐, 그, 그렇지? 그래, 알았어. 우선 오늘은 쉬어. 보고된 인원도 아직 덜 왔고 내일 한 번에 같이 알려 줄게.”
프레만은 친절한 미소를 지은 뒤 방문을 닫고 나갔다.
유쾌하고 배려가 좋은 사람이었다.
“……서리스, 너 잘도 그러는구나.”
그런 순간 아카펠이 신기하다는 듯 서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적응해야 할 일이야.”
“하, 난 잘 모르겠다. 이런 건 처음이라.”
서리스는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과거 소드란가의 가주였던 그에겐 매일 깎여 나가는 예산을 지키기 위해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쉬웠으니까.
“서, 서발광이라고 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순간 밖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서발광이었다.
서발광은 서리스와 아카펠이 이전에 했듯이 이 방의 문을 열었다.
“아, 안녕.”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 속.
“저, 저기.”
서리스가 대표로서 먼저 말문을 열려던 찰나 서발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맹인이긴 하나 서발광의 시선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서리스에게 꽂혀 있었고, 이에 서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 그게.”
망설이던 서발광은 무언가 결심한 듯 양손을 꽉 쥐었다.
“나에게 육체를 단련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육체 단련.
그 말에 서리스는 잠시 동안 눈을 깜빡였다.
“넌 충분히 강한데.”
“아니, 모자라. 나는 더 강해지고 싶어.”
눈꺼풀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눈동자가 별과 같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서리스는 서발광이 자신이 지닌 육체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서발광은 어떻게 보면 과거의 서리스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약한 육체가 지닐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
그 한계가 얼마나 싫었던가.
“알았어.”
서리스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동질감 때문은 아니지만, 앞으로 함께할 사이.
게다가 미래에 대성하는 서발광과 연을 쌓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고, 고마워!”
그런 서리스의 반응의 서발광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소심한 그지만, 감정 표현은 풍부해서 보기 좋았다.
“칸빌레 아카펠이라고 한다. 나도 반갑다.”
“잘, 잘 부탁해!”
그렇게 소개를 끝마친 세 사람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하는 사이인 만큼 이것저것 이야기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와장창!
그런 와중 도로시 쪽은 아직도 무언가를 깨트리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그저 귀를 막을 뿐이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아침 기상 시간은 7시.
프레만은 어제 53기수 후배들에게 몇 가지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기상 시간보다 10분 일찍 일어나 잠자리 정돈해 두기, 커튼 열어 놓기, 등.
거의 잔일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모든 게 필요한 일이었다.
‘막내가 할 게 산더미 같긴 하지만.’
그들도 적응하며 차차 제대로 할…….
“어?”
프레만은 나오자마자 보이는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와 코를 간질이는 맛있는 냄새에 눈을 깜빡였다.
거실 쪽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
환기를 위해 미리 창문을 열고.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겨울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닫아 놓은 듯 상쾌한 거실의 공기.
식탁 위에는 오늘 아침으로 식당에서 나왔을 음식이 인원 수 대로 차려져 있었다.
“신입들! 아침부터 똑, 바로…….”
그러는 순간 신입 괴롭히는 것이 취미인 50기 청랑단원 한 명이 뛰쳐나오다 프레만 옆에 멈춰 섰다.
어딜 보아도 무언가 까 내릴 게 없는 아침이었다.
“선배님들 일어나셨습니까.”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에서 세안을 미리 마치고 온 듯 말끔한 모습인 그는 얼어붙은 둘을 보곤 미소 지었다.
“선배님들 씻으시는 데 방해될까 봐. 먼저 세안했습니다.”
“어, 어어, 그래, 잘했어.”
프레만이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서리스는 눈을 슥 돌렸다.
그쪽 벽에는 청랑단원 일정표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야간 근무를 하신 지선협 선배님과 레이논 선배님은 근무 취침이시기에 아침 식사는 준비 해두지 않았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맞, 맞아. 그렇게 해 주면 돼. 어차피 근무 취침일 때는 점심까지도 거의 안 먹거든.”
“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이게 내가 가르친 게 맞나?
멍하니 있던 프레만이었다.
이후 프레만은 혹시나 해서 서리스 방도 확인해 봤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신입에 걸맞은 깔끔함.
나머지 2명도 기상하여 배정받은 의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던 만큼 완벽한 아침이었다.
“이야, 프레만 어제 하루 만에 신입 교육 잘해 놨구만.”
그러는 사이 아침 준비를 끝마친 선배들이 프레만을 칭찬해 왔다.
가르친 게 전혀 없던 프레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칭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침만 이래선 안 되지.”
그러나 아직 신입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마구간 일, 기숙사 청소, 훈련장 청소, 선배 기수들 무기 관리, 빨래, 등등.
자질구레한 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 그렇죠!”
그랬기 때문인지 프레만은 아직 가르칠 게 남았다는 양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입들에게 일을 열심히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채로.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하루 만에 무참하게 깨지고 만다.
“다음은 어떤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어, 어떤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일과 시작되고 나서, 사이사이 기다렸다는 듯 서리스와 서발광은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프레만에게 계속해서 일거리를 받아 갔다.
거기다가 확인도 꼬박꼬박 받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프레만은 지적할 부분이 전혀 없었다.
“자, 잘했다.”
프레만이 할 거라곤 칭찬하는 것뿐.
아카펠도 서리스 쪽을 따라 순순히 일하고 있었으니.
이들에게 자신이 가르치거나, 혼낼 만한 게 전혀 없었다.
“오, 프레만 신입 기수 잘 가르쳤더라. 안 그래도 이번 신입 기수들 빡센 녀석들이던데.”
“제복 다림질 기똥차게 하네. 프레만, 보기보다 잘 가르쳤잖아.”
그래서 선배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할 때마다 프레만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뇨. 잡고 싶은데, 잡을 게 없어요.”
그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메아리쳤지만, 그걸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신입들 덕분에 프레만의 평판은 사실 상승 중이었다.
프레만은 예전부터 선배들에게 어벙한 녀석으로 찍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그는 신입이라면 펜타니엄 직계마저 잡는 녀석이 된 것이다.
한 건 없는데 졸지에 평판이 계속 오르고 있는 그였다.
하나, 서리스가 포함된 53기도 꼭 쉽게 풀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의 정수라던 청랑단에 들어왔는데. 이런 일은 왜 하는 거야?”
도로시가 마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순수한 의문을 던졌다.
어제 선배들과 하루 종일 싸운 결과 얼굴이 이곳저곳 멍투성이인 그녀였다.
자기 할 말 다하는 한량인 그녀의 성격은 집단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겠지.
“우리 아침부터 시작해 청소, 청소, 또 청소밖에 안 하는데. 이거 괜찮아?”
청랑단이란 세계 침식과 맞서는 자들.
즉, 펜타니엄 정예 부대들이다.
당연히 그걸 꿈꾸고 왔을 도로시 입장에서는 이런 잡일은 살짝 이해가 안 갔다.
자신은 청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계 침식과 맞서기 위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아카펠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청소하는 내내 불편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마대 돌리지 마. 물 튄다.”
“그건 미안.”
그런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는지, 마대를 잡고 바닥을 쓸던 서리스가 도로시를 핀잔했다.
“하지만 직계님도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가 청소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없다, 라.”
서리스는 작게 웃었다.
“좋아. 우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가르쳐 주마.”
어린 애들에게 어른들의 사정을 깨닫게 해 줄 시간이다.
“하지만 그전에.”
서리스의 시선이 도로시에게 닿았다.
“도로시, 넌 내가 딱히 이 기수의 대표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지?”
“티 났어?”
도로시가 배시시 웃었다.
“붙어 보지도 않은 상대한테 고개 숙이지는 못 하겠어서.”
“잘됐네.”
서리스가 마대를 쥔 채 손을 까닥거렸다.
“덤벼 봐.”
도로시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서열 정리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