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번쩍.
“으윽.”
아카펠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저릿한 가슴 통증의 신음을 내뱉었다.
정신이 아직도 혼미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약물을 바른 듯 몸을 감싼 붕대에서 향내가 풍겼고.
드문드문 드러난 틈새로 멍이 보였다.
‘마지막에.’
서리스는 일격을 끝까지 다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마음먹고 내려쳤다면 몸이 양단되었으리라.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아카펠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전투에서 서리스가 1년간 얼마나 노력했는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은 진짜다.
이제는 더 이상 옛날에 몰락한 삼남이 아니었다.
‘나 한심하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보지 못하다니.
물론 그가 자신을 기억 못 해 준 건 아직도 욱하긴 하지만, 자신도 처음에 못 알아보지 않았던가.
‘나도 좀 변했던 걸지도 모르고.’
그제야 납득한 아카펠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짧은 섬광과 함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
그 섬광에 눈을 잠깐 감았던 아카펠이 눈을 떴을 때.
거기에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었다.
서리스와 서발광이 비등하게 싸우고 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카펠이 당황했을 때 그는 알아차렸다.
자신이 기절한 동안 마지막 시합이 시작되었음을.
* * *
맹인검사 서발광.
서리스가 되기 전, 영웅이라 칭송받던 남자.
그의 검술은 극한까지 벼려진 날과도 같다.
어린 시절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눈을 제외한 모든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가장 집중된 것은 바로 자신의 육체 그 자체였다.
심장의 박동, 호흡, 발재간, 손동작, 하물며 핏줄까지.
그는 검 하나를 휘두르기 위해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검술에 담을 수 있었다.
비섬류(怌閃類)
그것이 그가 검과 하나가 되어 만들어 낸 검술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술에도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타고나기를 왜소하게 태어난 서발광.
그는 제 스스로가 검이 될 수 있지만, 명검이 될 수는 없었다.
약하고 왜소한 육체는 아무리 단련을 반복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빛바랜 원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서발광은 자신이 비섬류를 전부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강했다.
빛바랜 원석일지라도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내고자 단련했고.
실제로 또래 중 그의 검술을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 증거로.
털썩.
그의 4강 경기 상대인 제나디아 도로시는 그의 검 앞에 무너졌다.
“이 나쁜 놈…….”
그녀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기절했다.
서발광이 검을 뽑지도 않고 검집째로 상대했기에 그녀는 자존심을 구기며 전력을 다했지만.
하지만 끝끝내 서발광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깔끔하게 검집에 턱을 맞아 기절한 그녀는 청랑단원 한 명이 나타나 구석으로 데려가 주었다.
“두 놈 남았군. 너희 둘 중 하나가 이번 기수 대표가 될 거다.”
서리스와 서발광.
두 사람을 보며 윌리엄은 턱을 매만졌다.
왜냐하면 둘 다 완전히 다른 상성이었기 때문이다.
‘한 놈은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와 타고난 별. 그리고 다른 한 놈은 극한으로 단련된 기술.’
이거 마지막에 와서 꽤나 재미난 경기가 될 듯싶었다.
“서발광, 쉴 시간이 필요하냐?”
“아, 아뇨.”
서발광은 도로시를 손쉽게 이겼다.
오히려 몸이 달아오른 지금이 전투하기에는 더 적합했다.
“지체 안 해서 좋구만. 둘 다 서라.”
윌리엄의 지시와 함께 두 명이 마주 보았다.
서리스는 서발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기억 속보다도 왜소한 그이지만 방금 전 도로시와의 전투에서 그는 확신했다.
‘작을지언정.’
검은 절대로 얕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시작.”
윌리엄이 전투 시작을 알린 순간 먼저 뛴 것은 서발광이었다.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는 그의 입장으로서 전투는 빨리 끝내는 게 상책.
‘게다가 이 사람은.’
맹인인 서발광에게도 느껴지는 강렬한 별의 세기.
서발광도 임시로 새겨 놓은 집단별은 있다.
바로 검사들의 우상인 검호의 별이다.
그러나 가문별에 비해 집단별의 출력은 한없이 밀리는 게 현실.
별의 힘으로 싸우기보다는 기술 차이로 끝내야만 했다.
서발광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순간 서리스의 검이 그를 향해 휘둘러졌다.
채엥!
곧 검끼리 부딪치는 울려 퍼졌다.
힘은 서리스가 우세하지만, 단련된 기술의 차이일까.
서발광은 서리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자세를 되잡고 그의 안면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휘익.
쇄도한 검이 서리스의 턱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엄청난 탄력으로 허리를 꺾어 피한 탓이었다.
뒤이어 서리스는 양발에 힘을 주었다.
몸이 반 이상 뒤로 젖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리가 서발광을 향해 휘둘러졌다.
“읏.”
눈도 보이지 않음에도 서발광은 기습적인 일격에 당황하지 않고 몸을 뒤로 빼었다.
평범한 발차기라면 맞아도 괜찮겠지만, 서리스의 다리에는 그림자가 묻어 있었다.
어제 엑포드의 청운무투를 보고 그대로 실전에 응용해 버린 것이다.
‘쯧, 실전 응용이 어설퍼.’
그러나 서리스는 청운무투를 사용한 것을 후회했다.
상대는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별의 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오히려 평범한 발차기였다면 직격했을 것을 괜히 청운무투를 써서 맞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쪽 다리를 휘두르는 자세에서 팔로 바닥을 짚은 서리스는 팔 근육을 부풀렸다.
뒤이어 오직 팔 힘으로 펄쩍 공중으로 도약했다.
서리스는 인간의 육체를 아득히 뛰어넘은 기행과 함께 검을 휘둘러 왔다.
마치 짐승과도 같은 그의 공격에 서발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람이랑 싸우는 기분이 아니야.’
서리스는 정말로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그의 육체는 인간보다는 엄청난 근육과 탄력으로 육체를 이루어진 호랑이 같았다.
어느 자세가 되더라도 금방 돌아올 수 있는 탄력성, 그걸 보완하는 체력까지.
서리스의 육체는 괴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였기 때문일까.
소심하던 서발광의 표정이 서서히 들뜨기 시작했다.
서리스는 서발광이 지금껏 만나 온 상대 중 가장 육체의 정점에 이른 자였다.
왜소한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 육체.
그것을 서리스는 가지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갈고 닦은 비섬류.’
그렇기에 서리스를 꺾어 낸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는 게 아닐까.
서발광의 검날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속사로 이루어진 그의 검술을 코앞에서 상대하던 서리스도 상대의 기색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점점.
점점 더 빨라진다.
육체의 움직임 속 단 하나도 비효율적인 움직임 없이.
서발광의 검은빛과 같이 쏟아졌다.
서리스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서발광의 검술이 점점 더 깊숙히 자신에게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검술을 단련한 것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가 지금까지 싸워 온 방식은 기술보다는 육체와 감각에 기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기술에서 서발광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버리고 육체에 모든 것을 기댄다.
서리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천랑후에게 배우던 검술을 내려놓고 육체의 감각을 더욱 곤두세웠다.
금강잔월의 별의 힘을 오로지 육체에만 집중시켰다.
검이 휘둘러지는 바람 소리, 육체의 움직임, 발재간, 호흡 같은 여러 소리가 겹치며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더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둘의 정신은 전투 속에서 한계까지 고조되었다.
한 명은 기술의 극의로.
다른 한 명은 육체의 극의로.
둘은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밀린다.’
그러나 먼저 밀리기 시작한 것은 기술 쪽이었다.
육체의 본질적인 문제.
체력의 한계가 도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몸을 조금만 더 단련할 수 있었다면.’
눈을 뜨지 못하는 서발광의 입술이 깨물어졌다.
달달달, 떨리는 팔과 다리가 미웠다.
가빠진 호흡이 싫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이 괴로웠다.
부럽다.
저 지치지 않는 단련된 육체가.
눈앞에 있는 서리스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기술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장점과 강점 모든 것을 쏟는다.
그 순간 서발광의 검을 타고 새하얀 별빛이 흘렀다.
비섬류(怌閃類)
짧은 섬광
번쩍!
강렬한 섬광이 주변을 메웠다.
살상 능력은 전혀 없는 기술.
그러나 고조된 전투 속에서 이어지는 섬광은 상대의 눈을 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윽!”
그것은 서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맹인 검사이기에 서발광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강수.
한순간 눈이 먼 서리스는 서발광의 모습이 잔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서발광은 망설임 없이 전력으로 별을 끌어 담은 검을 내질렀다.
검의 소리, 별의 기운.
잠시 동안 먼 눈 사이로 서리스는 자신을 덮쳐 오는 위험을 느꼈다.
‘당한다.’
모든 것을 담은 일격 앞에 서리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곧 서발광과 똑같이 시야를 잃어버렸던 서리스의 육체 속 별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땀방울이 튀고 그림자가 솟구쳤다.
시야를 잃었기에 인간의 모든 반사적인 행동을 배제했다.
그리고 검에서 오는 이 감각 하나에만.
서리스는 모든 것을 담았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오식(五式)
청운귀참(淸雲晷斬)
전력을 담아 그은 그림자가 주변을 집어삼켰다.
세상을 반으로 갈라 버릴 일격 앞에 서발광의 마지막 일격조차 집어 삼켜졌다.
그리고 그림자가 걷혔을 때.
서발광은 검을 놓친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뼈마디 전부가 욱신거렸다.
체력은 전부 소진되었기에,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왜인지 서발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그 순간.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서발광은 서리스를 두 눈으로 본 것만 같았다.
‘나와 같이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서리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졌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상황을 만들어 냈음에도 서발광은 패배한 것이다.
육체의 극의에 올라 내지르는 그 마지막 일격을 떠올리며 서발광은 의식을 잃었다.
“승리, 서리스.”
그리고 그런 대련장에 나지막이 서리스의 승리를 고하는 윌리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