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싱글벙글 웃던 표정이 감정이 전혀 없는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러곤 그는 거짓말이 들통 난 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었다.
“딱히 속셈이랄 건 없습니다. 위에서 시킨 일이거든요.”
“위에라면?”
서리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청랑호법의 패까지 쥐여 줄 수 있을 정도로 위라고 해 두죠. 서리스 님이라면 아실 거 같은데.”
서리스의 머릿속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펜타니엄 내에서 최근 두각을 드러내는 서리스를 견제할 자들은 잔뜩 있다.
펜타니엄에서 강함이란 곧 가주 후보라는 소리니까.
‘움직이기 시작했나.’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걸 빌미로 서리스의 최근 이미지를 깎아낼 속셈이었겠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죠.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디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보아하니 뒷배가 누군지 쉽게 말해 줄 리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녀석.’
서리스도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서리스는 아직 스스로가 한참 모자라다는 것을 안다.
펜타니엄 가문의 틀에 있는 미래가 창창한 햇병아리일 뿐.
진짜 강자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가뜩이나 강해지고 싶어서 안달 났는데.’
여기서 한 번 더 불을 붙여 줄 줄이야.
하나, 당장 내일이 청랑단 입단 시험인 마당이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강자와 싸워 피로가 쌓이면 당연히 시험을 망칠 것이다.
그런 멍청한 짓은 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네놈이 따르는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서리스의 눈동자가 조용하게 번뜩였다.
“네 잘난 뒷배에게 전해라. 수작질 부렸다가 큰코다칠 거라고.”
그의 경고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서리스의 눈은 진심이었다.
언제든지 그 목을 물어뜯어 버릴 수 있다는 듯.
서리스의 발아래 그림자가 일렁일 정도로 날 선 경고에 로디오는 곧 가볍게 웃었다.
“네, 그렇게 전해드리도록 하죠.”
그렇게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여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레일로에서의 첫날밤이 저물어 갔다.
* * *
가짜 로디오를 만나고 다음 날.
서리스는 늦지 않게 시험장에 도착하였다.
어제와 같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몰린 시험장은 왁자지껄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이곳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 없던 서리스는 구석 벽에 기대어 섰고.
그런 그에게 딱 한 명만이 다가왔다.
“형, 좋은 아침이야.”
여전히 흰 피부인 아카펠이었다.
어제부터 자꾸 형형 거리는 아카펠을 보고.
서리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아카펠은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안 했지. 나는 칸빌레 아카펠이야.”
칸빌레.
자기소개를 한 아카펠을 보고 서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칸빌레 쪽 사람이었을 줄이야.
‘칸빌레는 원래 소드란이 있던 곳.’
이지스 때는 소가문 회의라 이런저런 걸 물어볼 틈이 없었지만.
아카펠은 같은 청랑단 시험을 치르는 시험생이다.
칸빌레에 관해서 아는 게 없는 만큼 관심이야 당연히 생긴다.
“형이랑은 앞으로 계속 만날 거 같으니 미리 통성명 해 두는 거야.”
“……그것보다 아까부터 형이라고 하는데.”
이 녀석 소가문이라는 녀석이 직계 얼굴도 모르고 있는 건가.
“나는.”
“모두 주목.”
서리스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갑자기 남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카펠이 저쪽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기에 말할 타이밍을 놓친 서리스는 하는 수 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장신의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청랑단주와 같이 청랑단 문양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그는 힘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이름을 호명하겠다. 두 번은 안 말해 줄 테니 자기 이름이 있는지 잘 확인해라.”
갑자기 이름을 호명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호벨, 서드린, 임백강…….”
그러나 시험관이 하나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대략 80명 정도의 사람을 불렀을 때.
“이상, 호명된 이 사람들은.”
그는 말을 뚝 끊고는.
“전원 탈락이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무, 무슨!”
“시험도 보지 않고 그게 뭔 개소리야!”
이름이 호명된 사람 중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소리가 광장 안에 울려 퍼졌다.
시험관은 한심한 듯 그들을 보곤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시험관 옆에 청랑단 제복을 입은 이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그들에게서 위압감이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아까까지 소리를 내지르던 자들이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에 있던 서리스도 조금 놀랐다.
“여기 있는 녀석들 얼굴은 다들 알고 있겠지.”
그 말대로 거기 있는 자들은 모두가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어제 청랑단원 시험을 통과시켜 주겠다고 접근한 이들이었으니까.
‘저놈.’
로디오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뒷배가 있다는 말도 페이크였나.
서리스의 상황을 추측하고 시험관임을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속인 모양이었다.
‘이런 거에 속다니, 나도 감이 많이 죽었나.’
서리스는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듯 작게 실소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깜빡 속았다.
“1차 시험은 바로 등신 머저리들을 골라내는 시험이었다.”
시험관이 마치 한 마리의 늑대처럼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의 입발림에 넘어가 청랑단 시험을 우습게 본 놈들을 미리 쳐 내는 거니까.”
찔끔한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한심하네.”
아카펠 또한 그들을 멍청하다는 듯 평가하자 시험관은 쿠웅 하고 발을 굴렀다.
“지금 당장 나가라.”
마지막 경고.
이쪽 손에 맞고 나가기 싫으면 나가라고 그가 흉흉한 살기를 보였다.
살기를 견디지 못한 지원자들은 결국 제 발로 하나둘 나갔다.
“웃기지 마! 네놈들이 속인 거 잖아악!”
그 순간 한 녀석이 단상 쪽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덩치가 큰 남성은 곧 허리춤에 있던 도끼를 뽑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자신의 탈락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양.
그의 눈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청랑단이 될 사람이란 걸 실력으로 증명해 주마!”
“후.”
자신에게 닥쳐드는 도끼를 보고 시험관은 조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쩌억!
뒤이어 그가 다리를 휘둘러 남성의 얼굴을 가격했다.
대부분의 이가 눈으로 좇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고.
얼굴을 얻어맞은 남자는 어느샌가 벽에 처박혀 있었다.
몸을 가늘게 떠는 모습이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깔끔한 동작과 무시무시한 위력의 발차기.
“렉소니가 한 방에.”
“저 녀석 저래도 용병으로 이름 꽤 날린 놈인데.”
아무래도 꽤 유명한 놈이었는 듯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저놈을 바깥으로 옮겨라.”
마치 벌레를 밟았다는 듯 그는 더럽다는 양 구두 굽을 강당 바닥에 비볐다.
“예, 선배님.”
그러자 서리스와 대화한 로디오가 경례 자세를 취하곤 그 즉시 쓰러진 렉소니에게 걸어갔다.
“제 뒷배에게 전해 드릴까요? 미래 후배 씨.”
그러던 와중에 그는 서리스 앞을 지나치며 눈웃음 지었다.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미래 선배님.”
청랑단은 기수제.
그가 청랑단인 이상 어떻게 되든 선배가 될 것이다.
서리스의 당당한 말에 그는 만족한다는 듯 웃으며 렉소니라는 자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너희들도 이제 움직여라.”
“예.”
탈락자들이 다 빠져나가자 시험관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청랑단원들은 마치 사라지듯 흩어졌다.
지원자들 중 대다수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지도 못했기에 경악했다.
청랑단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2차 시험에 관해 설명해 주겠다.”
시험관의 호령에 모두가 긴장한 표정을 지은 순간.
시험관은 자신의 뒤를 턱짓했다.
“방금 전에 본 녀석들은 전원 청랑단원이다. 너희보다 한 기수 선배지.”
어떤 이에게는 원한도 샀을 그들을 가리키며 시험관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은 오늘 레일로 내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시험의 최종 목표는 청랑단원을 찾아내어 쓰러트리는 것.”
하지만 시험관은 그 말을 하면서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통과자는 한 녀석도 나오지 않겠지.”
대놓고 무시하는 시험관의 태도는 지원자들을 욱하게 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이 청랑단원을 이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대신 그 녀석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시험은 통과다.”
일종의 실력 테스트라는 소리였다.
“어려울 거 하나 없네.”
옆에 있던 아카펠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차 시험 기간은 하루, 움직여라. 햇병아리들.”
시험관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 순간 지원자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형, 형도 가볍게 통과하고 오겠죠?”
그러는 사이 아카펠이 친한 척하며 말을 걸어왔다.
서리스의 통과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는 시험관이 나타나 말을 다 못했지만, 이 이상 형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
“아카펠, 너 올해 16살이지.”
“응? 그런데.”
“나도 16살이야.”
결국 서리스가 사실을 밝히자 아카펠의 표정이 서서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떻게 그 얼굴로 16살이라는 양.
“……진짜로?”
“그래, 계속 말하려 했는데 타이밍이 늦었다. 미안.”
서리스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게 전혀 안 믿긴다는 듯.
아카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젠장, 쪽팔리는 짓을 했네.”
그러곤 살짝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가 내렸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사과는 내가 해야지. 내가 오해한 거니까.”
생긴 것 치곤 꽤나 호쾌한 성격이다.
“동갑이니 오히려 더 좋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널 이번 시험에서 가장 큰 라이벌이라 생각하니까.”
딱히 보여 준 것도 없지만, 아카펠은 눈썰미가 꽤 좋은 모양이다.
“누가 먼저 1차 시험을 통과하는지 내기하자고.”
“내기, 나쁘지 않지.”
서리스는 그 말을 하곤 갑자기 몸을 빙글 돌렸다.
아카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서리스의 발이 강당 단상 쪽으로 뚜벅뚜벅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 통성명이 아직이었지.”
아카펠을 향해 짧게 울린 서리스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발은 한 남성의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시험관님.”
“뭐지?”
시험관의 앞에 서리스가 우뚝 선 순간 시험관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질문이라도 있냐는 양.
“시험관님께서도 청랑단원이지 않습니까?”
서리스의 짧은 질문의 시험관은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채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펜타니엄 서리스.”
그러자 서리스가 자신의 이름을 내뱉고.
“상대를 부탁드립니다.”
주변 모두가 경악할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