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고요한 새벽녘.
오직 달빛 속 밤만이 자리한 곳에 서리스의 발아래 그림자가 일렁이었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
그림자를 다루는 펜타니엄의 비기는 밤이 도래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세상 모든 것이 그림자로 뒤덮이는 밤은 수라를 태어나게 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사아아―
기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일렁인 그림자가 새까만 밤조차도 뒤덮고 지나갔을 때.
서리스의 손아귀에는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청운귀명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검.
이를 선보였던 소가문 회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 형상은 무척이나 바뀌어 있었다.
마치 별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안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검은색의 도신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세 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었다.
서리스는 서서히 그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고요한 밤과 마치 일체가 된 듯 조용히 내뱉은 서리의 숨결이 밤을 어지럽혔다.
“하핫.”
드웨이진의 입가에 호탕한 미소가 그려졌다.
“전력으로 와라. 서리스!”
그 순간 드웨이진의 몸 위로 무형의 기운이 일렁이었다.
하체펠 가문의 강기수식이 극한으로 단련된 그의 몸을 최강의 육체로 끌어 올린 것이다.
서리스는 눈앞에 마치 거대한 성벽이 세워진 듯한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철벽(鐵壁).
하늘 위 거인이 발아래 사람을 손으로 짓누르듯.
드웨이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용에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그러나 서리스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공격.
그것을 위해 서리스의 별이 거세게 빛났다.
‘당신이 철벽이라면.’
나는 그 벽을 무너트릴 뿐이다.
밤의 수라가 조용히 그 몸을 일으켰다.
그런 수라조차도 집어삼킬 그림자가 서리스의 전신을 뒤덮었을 때.
그림자는 그어졌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오식(五式)
청운귀참(淸雲晷斬)
서리스가 검으로 내리그은 부분을 기점으로 밤하늘이 반 토막 나듯 일그러졌다.
파삭! 콰과강!
드웨이진의 등 뒤 바닥이 갈라졌다.
균열은 계속해서 이어져 훈련장의 입구와 벽들조차 무너트렸다.
“꺄악!”
“무슨 일이야!”
새벽녘,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이 놀라 여기저기서 불이 켜졌다.
그로 인해 얼마 남지 않은 밤의 흔적이 놀라 빛에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하아, 하.”
그사이 서리스의 거친 호흡만이 울려 퍼졌다.
그의 시선이 위로 향했을 때 드웨이진은 서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팔 위에 아주 미세한 검로가 나 있었다.
그 검로를 타고 한 줄기 핏방울이 뚝 떨어졌을 때.
드웨이진의 입가에는 지금껏 지어 본 적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서리스의 전력에도 철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 하하, 전력을 다했는데도 저 정도인가.’
고작 그 정도 상처만 남겼음을 깨달은 서리스가 힘없이 웃었지만.
드웨이진에게는 이 검격의 의미가 달랐다.
철벽이 상처를 입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하핫, 이거, 물건인 수준이 아니잖아.’
강기수식을 두른 자신을 상처 냈다.
그간 끝없는 초롱에서조차 상처 입은 적이 거의 없는 자신이 말이다.
육체의 강도만이라면 대륙 최고를 자처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자신에게 검을 휘두를 때 강렬히 빛나던 그 별빛.
‘하체펠의 가주?’
아니, 아니다.
서리스는 하체펠 수준에서 머무를 수준이 아니었다.
‘펜타니엄을 넘어서서.’
그보다 더 위.
천상사성조차도 뛰어넘는 그런 별이 될 것이다.
그에게 이토록 격한 감정은 오랜만이었다.
“서리스!”
이 감정을 전하기 위해 드웨이진이 서리스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서리스가 바닥에 쓰러진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내가 내 감정만 너무 우선시했구만.”
거의 10시간 넘게 명경지수에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깨어나자마자 전력을 다한 일격을 토해 냈으니.
당연히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으리라.
“일어나서 보자구나.”
외할아버지의 미소를 머금은 채 드웨이진은 서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아주 먼 옛날 소드란 시절의 아버지를 추억하며 서리스는 평온하게 잠들었다.
* * *
짹짹.
창문 밖에서 참새가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르륵 눈을 뜬 서리스는 어느 때보다도 몸이 개운함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 서리스 님, 일어나셨습니까?”
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천랑후였다.
서리스를 보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그린 그는 고개 숙여 말했다.
“4성에 오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4성.”
천랑후의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아까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성장세라도 서리스 본인은 너무도 답답했다.
그 탓일까.
서리스는 전에 없는 기쁨이 몸 전신에 감도는 것을 느꼈다.
성장을 했다는 이 감각이 황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 일어났구만.”
그런 순간 덜컹하고 열린 문과 함께 드웨이진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 외할아버지, 감사했습니다.”
이번 건은 사실상 전부 드웨이진 덕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감사를 하자 드웨이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난 한 것도 없다. 네가 다 한 게지. 그것보다 몸 상태는 어떠냐?”
“새것 같습니다.”
“하핫,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나중에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겪으면 까무러치겠구나. 아니, 너라면 금방 오를지도 모르지.”
화경의 경지에 올랐을 때 겪는다는 환골탈태를 언급하자 서리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날이 온다면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이 감각의 몇 배일까.
‘강해지는 건 그냥 막연한 목표였었지만.’
서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해지고 싶다.
평생을 무시당해 왔던 서리스는 그동안 품 안에 꽁꽁 숨겨 놨던 감정들이.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을 느꼈다.
“서리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15살입니다.”
말하고 나니 참 어린 나이다.
15살에 4성의 경지라 해도 바로 밑에 있는 동생인 샬롯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펜타니엄에서도 유례없는 성장 속도였다.
“그렇담 내년에는 16살이겠군.”
드웨이진은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천랑후, 청랑단 입단 시험은 분명 16살부터 가능했지?”
“예, 맞습니다.”
“서리스, 그렇담 청랑단 시험을 보거라.”
“예? 청랑단이라면.”
청랑단(靑狼團).
펜타니엄이 자랑하는 정예들만을 모아 놓은 부대이자 세계 침식 스페셜 리스트 집단이다.
그런데 대뜸 그곳에 들어 갈 수 있는 입단 시험을 치르라는 말에 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드웨이진은 말을 이었다.
“청랑단은 기수와 실력 우상 주의 부대다. 직계라 한들 청랑단의 속하게 되면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는 순간 말단 취급을 받게 되지. 그리고 그 경험은.”
드웨이진은 서리스를 향해 검지를 탁하고 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거다.”
워너힐 아카데미라는 말이 나온 순간 서리스의 몸이 멈칫하였다.
성위와 관련되어 있고는 만큼 서리스도 관심 있긴 했지만.
“워너힐 아카데미는 입학시험이 워낙 어렵지 않습니까?”
“하하핫, 15살에 4성의 경지에 오른 녀석이 그런 걸 걱정하느냐.”
당연히 과거에 서리스는 워너힐 아카데미 문턱조차 밟아 본 적 없다.
그나마 아는 소문으로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것과.
재능 넘치는 괴물들이 잔뜩 모였다는 것뿐이니.
‘하지만 확실히 지금 내 수준이면 입학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막연했기에 뚜렷하게 워너힐 아카데미를 목표로 잡지 못했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어떨까.
‘기껏해야 부족한 건 실전 경험이야.’
서리스도 세계 침식에 관련된 건 전문가 수준이라곤 하나, 그에 비해 전투 경험은 턱없이 모자랐다.
대부분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후위에서 돕는 것 정도밖에 못했던 서리스기 때문이다.
‘천랑후와의 대련만으로 경험을 채우는 건 한계가 있어.’
세계 침식 스페셜 리스트인 청랑단은 당연히 세계 침식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건 바로 실전 경험 쌓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는 뜻!
게다가 검은별의 보다 정확한 사용처는 물론.
지금은 칸빌레가 있을 소드란의 옛 영지도 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청랑단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목표는.”
“1등입니다.”
서리스가 당찬 미소를 짓자 따라 호탕한 웃음을 그렸다.
“흠흠, 그래도 각지에서 모이는 실력자들 사이에서 1등을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순간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드웨이진은 헛기침을 한 차례 내뱉었다.
“그래서 말이다. 우리 가문의 강기수식을 네게 가르쳐 주마.”
아, 이 양반 이게 본 목적이었구만.
“청운귀명도와 강기수식이 합쳐지면 1등은 그야말로 따 놓은 당상이지! 어떠냐!”
‘나를 어떻게든 하체펠로 데려가고 싶은가.’
사실 드웨이진은 서리스를 하체펠로 데려오는 것은 그만두었다.
어제 일로 드웨이진의 목표는 천상사성급으로 성장할 서리스에게 가문비기를 전수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세계 최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서리스를 통해 하체펠의 강기수식의 위력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서리스 입장으로서는.
드웨이진이 자신을 하체펠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외할아버지 핏줄이라곤 하나, 하체펠의 비기를 배웠다간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까요.”
“그거야 내가 책임지면.”
“괜찮습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또다시 바로 거절했다.
애초에 지금 당장 금강잔월이 급한 마당에 강기수식까지 배울 필요는 없었다.
‘훗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야.’
무엇보다 서리스는 아직 소드란의 가주라는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흐음, 네 뜻이 그렇다면 알았다.”
드웨이진은 계속해서 아쉬운 듯 서리스를 힐끔힐끔 보았지만, 서리스는 묵묵부답이었다.
서리스는 그저 어서 빨리 4성의 힘을 시험하고 싶었다.
‘청랑단 입단 시험에서 1등.’
서리스의 첫 목표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