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서리스와 제로를 발견한 주인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서리스는 다시금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즉시 제로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뛰어오르자.
곧이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강렬한 소음이 귀를 때렸다.
콰앙!
“끄그그극!”
제로가 비명을 삼키며 억지로 몸에 별의 기운을 일으키는 동안 서리스는 다시금 절벽에 붙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가 마치 포탄이라도 맞은 양 무너져 있었다.
‘음파 공격까지 쓰나.’
금강잔월로 육체를 강화하지 않았더라면 고막이 찢겨 졌을 거다.
서리스는 거치적거리는 제로를 절벽에다가 던져 두었다.
그러는 사이 주인이 절벽 안에서 머리를 쭈우욱 내밀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집채만 한 주인은 절벽을 무너트리며 밖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
그렇게 드러난 그 몸은 수만 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네 몸통이었다.
인면공(人面蚣).
그것도 오랜 기간 자연의 영기를 잔뜩 머금은 영수가 세계 침식에 의해 마수가 된 최악의 케이스다.
‘주인은 저 얼굴인가.’
지네 몸통은 어디까지나 숙주일 뿐이다.
진짜는 얼굴임을 눈치챈 서리스는 청운귀명으로 재빨리 그림자 검을 만들어 쥐었다.
서리스의 목덜미에서 강렬한 별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의 마수들은 별빛에 유달리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인면공의 시선이 서리스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서리스가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그 순간.
‘온다.’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바로 그때 인면공이 지네 몸뚱이를 하늘에서 내밀며 서리스를 덮쳐 왔다.
콰앙!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거리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반대편 절벽을 넘어온 인면공은 그대로 서리스가 있던 자리를 무너트렸다.
‘저 몸뚱이로 잘도 저렇게 빨리 움직이네.’
아슬하게 인명공을 피한 서리스는 재빨리 뛰어올라 인면공의 몸통 위에 착지했다.
그러자 서리스를 알아차린 인면공의 발들이 위로 솟아올랐다.
두둑 소리와 함께 마디가 꺾인 다리들은 기괴한 모습으로 서리스를 공격해 왔다.
“이게!”
그러는 사이 서리스를 따라 올라온 제로가 인면공의 외피를 그림자 검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서리스에게 많이 당한 제로지만 그도 펜타니엄 직계.
그의 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외피 일부분이 잘려 나가자 인면공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제로, 위로 유인한다.”
“알아.”
아무리 서리스라도 이 정도 크기의 괴수를 쓰러트리려면 한세월이 걸린다.
차라리 처음 계획대로 위에서 모두와 함께 싸우는 것이 낫다.
그리 판단한 서리스는 그림자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이런 건 청운귀명도보다.’
소드란의 별이 강렬히 빛나기 시작했다.
한 호흡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듯.
서리스의 근육이 별빛에 휘감겨 극한까지 부풀어 올랐다.
그가 마치 수라와 같은 형상에 도달했을 때.
그 순간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켬과 함께 서리스는 전력으로 검을 내려쳤다.
‘힘으로 때려 박아야지!’
금강잔월(金强虥狘)
박살(撲殺)
콰직, 우두두두두둑!
별빛의 섬광과 굉음이 울려 퍼졌다.
“기에에에에에에엑!”
대지까지 분쇄할 강렬한 힘에 직격당한 인면공의 허리가 아래로 후욱 꺾였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인면공의 뱃가죽이 절벽 아래 강물로 풍덩 빠졌다.
서리스는 그사이에 재빨리 도약하여 절벽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제로, 뛰어.”
“미친놈, 신호는 줘야 할 거 아니야!?”
뒤에서 제로가 욕하며 따라 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준비해라!”
서리스가 외침을 토한 순간 등 뒤에서 인면공이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사태를 파악한 청림단원들이 경악하며 무기를 들어 올리는 사이.
서리스는 검을 어깨에 올리곤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그의 그림자 검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몰려들었다.
서리스의 발아래에서 솟아오른 그림자가 서서히 검의 크기를 늘려 가던 그 순간.
분노한 인면공이 완전히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서리스가 어깨 위 검을 전력으로 내리그었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사식(四式)
청운반월섬(淸雲半月殲)
반달 형태로 휘어진 그림자 검격이 인면공을 덮쳤다.
“기이익!?”
아까전에는 외피 쪽을 당했던 인명공은 이번에는 배 부분을 검격에 두들겨 맞아 비명을 질렀다.
인면공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왈칵 토사물을 뱉었다.
토사물이 닿은 부분이 녹아 들어가며 매캐한 냄새가 퍼져왔다.
“와, 저게 가능해?”
“역시 직계는 다르구나.”
옆에서 청림단원의 감탄 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계속 감탄만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열이 잔뜩 오른 인면공은 서리스만을 집요하게 쫓았기 때문이다.
시선이 끌린 덕에 청림단원들과 제로는 손쉽게 인면공에게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모두 공격해!”
“그쪽이야!”
“거기, 조심해라!”
“기이이이이이이이익!”
인면공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으며 육중한 몸과 외피의 단단함으로 끈질기게 싸웠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영수의 몸이라 한들 한계점은 있다.
서리스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그 말도 안 되는 힘으로 검을 때려 박는 바람에.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이다.
파직!
또 하나 외피를 박살 낸 서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인면공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둔해지며 거의 멈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선을 옮기자 인면공의 다리가 벌벌 떨리다가 추욱 늘어졌다.
몸이 완전히 한계점에 들어선 것이다.
“인면공이 쓰러졌다! 우리가 쓰러트렸다고!”
“기뻐하기 전에 멀쩡한 놈은 부상자부터 옮겨라!”
청림단원들 목소리 사이로 몬드로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보니 다행히 죽은 녀석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천랑후가 안 나선 시점에서 그렇게 위험한 녀석은 아니었다는 소리겠지. 나도 여유 있었고.’
인면공의 등 위에서 껑충 뛰어내린 서리스는 얼굴에 튄 핏물을 슥슥 닦았다.
그러곤 인면공의 얼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네 몸통은 어디까지나 영수의 몸이다.
‘진짜는 얼굴.’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사람 얼굴이 지네 영수에게서 뜯어져 나오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 뒤편에 마치 벌레의 더듬이처럼 생긴 실 같은 것으로 이어진 게 보였다.
“징그럽기는. 한 번 숙주로 정했으면 명을 같이 해야지.”
그리 말한 서리스가 검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서늘한 감각이 서리스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니다.
등이 아니다.
‘목.’
그의 뒷목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왔다.
“검, 은 별?”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오직 서리스의 눈동자에만 보이는 검은별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파직!
꺼림칙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바닥에서 치솟은 검은색 번개 줄기 하나가 인면공의 머리 부분을 관통했다.
서리스가 눈을 부릅떴을 때 어느샌가 천랑후가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서리스 님!”
긴장된 기색이 역력한 천랑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보며 서리스는 목덜미에서 오는 강렬한 통증에 목을 감쌌다.
검은색 번개 줄기.
서리스는 저걸 알고 있다.
‘세계 침식자.’
세상을 돌아다니는 재앙 중 하나.
흑마녀(黑魔女)
오직 멸망만을 외치는 그 미친 여자가 세계 침식 근처에 나타났을 때 생기는.
‘세계 침식 각성’ 증상이다.
하필 왜 이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서리스는 떠올렸다.
10년 전 흑마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에툰산, 그래, 분명히 그 여자가 다녀간 곳 중에 에툰산도 있었어!’
지금은 아직 세간이 흑마녀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시기다.
한참 오래된 일이라 기억 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서리스?”
몬드로와 제로가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천랑후는 감으로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여기 중 어느 누구도 흑마녀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서리스는 천랑후의 옷깃을 잡았다.
“천랑후, 안 돼! 이건 우리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당장 도망쳐야 해! 모두 오지 마!”
서리스의 다급한 외침에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인면공을 쓰러트리고.
승리의 기쁨에 취했던 이들이 갑자기 도망치라는 말에 당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움직임이 굼뜨기 그지없었다.
답답한 서리스가 다시금 외치려 했을 때.
퍼걱!
무언가 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어, 으아아!”
몬드로의 옆에 있던 청림단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방금까지 사태를 파악하려던 몬드로의 머리가.
검은색 벌레 다리 같은 것에 의해 터져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썩을, 반응도 못했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서리스는 검은별 문신이 더더욱 통증을 호소하는 걸 느꼈다.
쩌적.
그 순간 인면공의 얼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대의 공기가 역류하듯 흘렀다.
손으로 목 뒤를 감싼 서리스가 서서히 고개를 올렸을 때 주위 모든 사람이 정지했다.
그들의 얼굴 위에 인면공과 같이 새하얗고 머리 한 톨 없는 얼굴이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랑후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침식의 힘이 가문별의 힘조차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서리스만이 세계 침식에 당하지 않았다.
어째서라는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궁금증 따위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
서리스의 눈은 인면공의 얼굴 속에서 나온 존재에게 꼿꼿이 고정되어 있었다.
벌레 다리 같은 팔다리를 길게 바닥에 늘어트린 주인의 각성체.
조그맣게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을 조일 것 같은 세계 침식 앞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었다.
‘나라도 해야 한다.’
그림자 검이 서서히 별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타앗!
억지로 가라앉힌 감정을 뒤로하고 서리스가 바닥을 박찼다.
두 개의 가문별이 동시에 거센 빛을 토해 내었다.
그 순간 서리스의 등 뒤로 별빛보다도 더한 어둠을 토해 내는 것이 있었다.
검은별.
다른 두 개의 별빛조차 잡아먹을 듯 새까만 어둠이 후광처럼 떠올랐다.
퍼걱!
그 순간 새까만 벌레 다리가 몬드로를 죽였을 때처럼 서리스의 머리를 터트렸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서리스의 몸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딱 한 번 보았던 그 일격을 피하고자 목 근육에 전력으로 별을 때려 박은 결과.
서리스가 악착같이 고개를 틀어 간신히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살짝 스쳤음에도 불구하고 너덜너덜해진 볼에서 핏물이 왈칵 흘렀다.
‘휘둘러!’
별빛이 그림자 검 위로 가득 채워졌다.
전력을 담아 휘두른 검이 대기를 찢으며 존재의 뱃가죽을 강타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모든 걸 쏟아 휘둘러진 검은 존재의 뱃가죽을 아주 살짝 찢었을 뿐이었다.
너무도 허망할 정도로 아주 조금.
왈칵.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서리스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두근두근.
그의 뻥 뚫린 가슴팍이 박동하는 심장을 드러내었다.
어느샌가 휘둘러진 다리가 그의 가슴팍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개, 같은.”
이따위로 다시금 죽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왔단 말인가.
흐릿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서리스가 죽음을 직감했을 때 그의 이가 까득 깨물어졌다.
아니다.
죽더라도, 개같이 죽더라도.
청운귀명도가 그의 검에 깃들고 금강잔월이 그의 육체에 깃들었다.
‘곧 죽어도!’
서리스의 두 눈이 어느 때 보다 청명하게 빛났다.
일대의 모든 별빛이 오직 그의 검에 후욱 빨려 들어갔다.
‘나는 이놈을 죽인다!’
검이 곧 세계를 가르니.
금강귀명도(金强晷銘刀)
일도양단(一刀兩斷)
서걱!
세계가 서리스의 검을 중심으로 갈라진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스의 검이 존재의 몸을 양단하면서 빠져나왔다.
온몸을 적신 땀 사이로 서리스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객기를 부렸다.
그러나 그 객기가 통했다.
희미해져 가는 시야와 함께 늘어진 서리스의 몸이 그대로 바닥을 마주했다.
숨소리가 멀어져 간다.
또 한 번 아득해져 가는 정신 사이로 서리스의 머리 위에 눈 한 송이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