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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8화 (8/275)

8화

“몰락한 게으른 삼남을 보낼 거면 차라리 보내지를 말지.”

“정말 괜히 짐 하나 늘었잖아. 가뜩이나 세계 침식은 힘든데.”

“직계라더니 왜 하필.”

서리스의 귓가에 아슬하게 들릴 정도의 비난 섞인 웅성거림이 지나갔다.

서리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걸어가자 제로만이 의기양양해졌다.

‘그래, 저 녀석은 몰락하고 게으른 녀석이라고.’

다시금 제로가 서리스의 위치를 재확인했을 때, 그는 갑자기 머리 위가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제로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앞에는 서리스가 있었다.

“비켜. 거기 내 자리니까.”

“허?”

제로의 기가 막힌다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스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제로는 지금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누가 보아도 상석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앉아야지.”

“지금 내가 자격에 안 맞는 자리에 앉았단 거냐?”

제로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진 순간 서리스는 제로의 어깨를 잡아 자세를 낮췄다.

“내 위치를 재확인했다며 희희덕거렸냐. 정신 차려라, 제로. 몇 달 전의 내가 아니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제로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서리스의 눈동자에서 패도적인 기세가 풀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기선 제압이다.

여기에 밀리는 순간.

제로는 앞으로 상대할 세계 침식의 주요 권한 또한 전부 서리스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 자리가 뭔 상관이야. 망할 놈이 귀찮게.”

제로는 마치 아량을 베푼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우연히 이겼다고 해서 기고만장해지지 마. 그때는 그냥 방심해서 진 거니까.”

제로는 표독스러운 말을 남기고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는 꽈악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서리스가 구태여 제로의 자리를 뺏은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이것 하나만으로 서리스를 보던 청림단원들의 표정이 변했기 때문이다.

‘뭐야. 아무리 동생이라도 펜타니엄 직계 간의 서열은 결국 강함 아니었나?’

‘저렇게 순순히 자리를 비켜 준다고?’

‘몰락한 게으른 삼남이라며.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데?’

세계 침식은 위험하다.

비록 끝없는 초롱에 비하면 3성 세계 침식은 새 발의 피다.

그러나 세계 침식은 세계 침식.

아래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해서야 위험도가 증가할 뿐이다.

‘실제로 내가 그랬으니까. 거기다가 마침 제로 녀석 기도 좀 죽여 놔야겠다 싶었고.’

일석이조다.

“몬드로, 그럼 세계 침식에 관해 이야기를 좀 해 주겠습니까.”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서리스가 진중하게 물었다.

“예, 우선 이번 세계 침식의 경우 에툰 산 중심부에 발생했습니다. 내부사정은 아직 제대로 확인을 못 했습니다만.”

“내부사정을 아직도 제대로 확인 못 했다, 라.”

세계 침식 연락이 온 지 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확인 못 했다, 라.

서리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까까지 서리스를 무시하던 청림단원들이 눈을 못 마주치는 게 보였다.

‘다들 괜히 피 볼까 봐 섣불리 못 들어갔군. 직계가 올 때까지 이렇게 빈둥거리며 쭉 기다린 건가.’

나 원.

“그나마 확인된 건 세계 침식 발생 전 살던 사슴 무리의 머리가 사람의 얼굴과 같이 변하는 침식 현상까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사람 얼굴.”

서리스는 턱을 매만지며 몬드로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렇담 아마 정신 장악의 육체 계열 강화 류일 겁니다. 정도를 보니, 일반 사람도 당하겠군요.”

그러면서 서리스는 청링단원들을 보았다.

“세계 침식 내부에 들어갈 때는 별을 다루는 자만 들어가도록 하죠. 여기서 별문신을 새긴 자는 몇 명이나 있죠?”

몬드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몰락하고 게으른 삼남이라더니?’

이 자가 어딜 봐서 그런 멸칭이 붙을 자란 말인가?

누가 보아도 세계 침식에서 몇십 년을 굴렀을 법한 노련함이지 않는가.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겠죠. 출발 준비는.”

“전부 마쳤습니다.”

회의를 끝낸 서리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거면 왜 자리를 빼앗았냐며 비난하는 제로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서리스는 무시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주도권을 쥔 서리스의 지시에 청림단원들이 무장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청림단과 함께 서리스는 곧장 에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겨울인 만큼 눈이 내린 땅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산에 익숙한 청림단원들도 중간중간 미끄러질 뻔할 정도로.

특히 산이 익숙하지 않은 제로는 남들보다 체력을 더 소모하고 있었다.

“허억, 뭔 놈의 산이.”

옷을 두껍게 입은 게 화근이었나.

열기가 제대로 배출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제로가 땀을 훔쳤을 때.

그의 옆을 성큼성큼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제로와 같이 산행이 처음일 텐데도.

서리스는 청림단원 장인 몬드로에게도 밀리지 않고 산을 손쉽게 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숨조차 차지 않는 그의 모습의 제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자식은 대체 왜.

“젠장, 레니!”

“예, 제로 님.”

제로는 곧바로 옆에 있던 집사에게 자신의 옷 일부를 벗어 건넸다.

달아오른 몸 위로 추위가 흘러들어왔지만, 이대로는 못 참는다.

서리스에게 이 이상 밀리는 꼴을 보일 생각은 없었던 제로는 곧바로 그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세계 침식 구역입니다.”

“허억, 흐윽, 헉.”

그랬기 때문인지 산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제로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서리스가 워낙 쉬지 않고 산을 잘 올라 가버리는 통에.

중간, 중간 청림단원들이 쉬는 동안에도 제로는 악착같이 서리스를 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리스, 몬드로와 함께 제일 먼저 산 중턱에 도달했지만.

체력이 동나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지형도 변하기 시작했나.’

그런 제로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서리스는 세계 침식을 살피고 있었다.

방금까지 눈 내리던 땅이 한 발자국 차이로 기분 나쁜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나 풀 위로 하나씩 사람의 얼굴이 달려 바람에 휘날렸다.

그 광경은 꿈에 나올까 두렵기 그지없었다.

일반 사람은 들어가는 즉시 세계 침식에 당해 저 꼴이 되겠지.

‘보고 받은 대로 이번 세계 침식은 얼굴을 달아 정신 주도권을 빼앗는 종류인가.’

세계 침식이란.

다른 세계를 자신들의 세계와 같이 변화시키는 일종의 침략이다.

왜 발생하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게 한 가지 흠이어도.

‘되돌리는 방법은 알고 있지.’

최흉과 같이 기묘한 것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세계 침식은 주인을 처치하면 해결된다.

“내부로 들어가서 수색하지.”

서리스는 곧바로 별의 힘을 몸 위로 두르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은 동물과 마수는 물론 인간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청림단원들도 잇따라 그들의 몸 위로 별을 두르기 시작했다.

펜타니엄 소속인 그들은 인위적으로 별문신을 새겼기에 가문별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빌릴 수 있었던 덕이다.

“제로 님.”

“알아. 제니 귀찮게 하지 마.”

숨을 다 고른 제로도 별을 두르자 선두와 함께 진입을 시작했다.

후욱.

한 발자국을 기점으로 세상이 변해 가는 게 느껴졌다.

이 기묘한 감각만큼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찌르르르르―

한겨울인 바깥과 다르게 매미가 우는 소리가 귓가를 강렬히 때렸다.

사람들은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레 두꺼운 옷들을 벗어 가방에 넣어 두었다.

그런 사람들의 앞에 벌레 한 마리가 불쑥 튀어 올랐다.

본래는 메뚜기일 테지만 보고대로 사람의 머리가 달린.

인면황충(人面蝗蟲)이었다.

“징그럽군.”

솔직한 감상을 내놓은 서리스에게 다들 동감했다.

메뚜기는 눈동자를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빙글 굴렸다가 사라졌다.

“세계 침식 범위는 어느 정도지.”

“약 3km 정도입니다.”

다행히 초반에 진입해서인지 그렇게 넓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나무 사이를 해치고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는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온다.”

서리스가 중얼거린 순간 청림단원 모두 다 기색이 변했다.

“전원 준비.”

다들 바짝 긴장한 채 검을 쥐곤 진형을 만들었다.

그 순간 숲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열 마리의 인면랑(人面狼)이었다.

사람의 얼굴로 침을 뚝뚝 흘리는 그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청림단원들의 얼굴 위로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본래 늑대인 거 같은데. 사실상 마수가 되어 버렸군.’

세계 침식에 잡아먹힌 인면랑들은 한 늑대의 울음소리와 함께 전원이 달려들었다.

본래 늑대보다도 훨씬 더 근육이 부푼 그들은.

성인 남성보다도 거대하고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형액진!”

몬드로가 외친 순간 청림단원들이 기억된 진형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저울대 모양과 같이 진형을 이룬 청림단원들이었지만.

그들의 몸은 막상 들어오니 겁먹어 위축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진형 붕괴는 물론이고 사상자가 나온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일식(一式)

청운귀명(淸雲鬼銘)

그 순간 발아래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검이 서리스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서리스가 그림자 검을 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방금까지 거칠게 달려들던 인면랑들이 한순간 몸이 굳어 달리던 자세로 무너졌다.

서리스의 청운귀명에서 풍겨 나오는 기색이 마수에게 마저 위압감을 준 것이다.

서걱!

그리고 인면랑의 움직임이 굳었다.

그 순간 서리스의 그림자 검격이 인면랑을 갈라 버렸다.

반응도 채 못하고 갈린 인면랑이 비명횡사 당하자.

기세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기울었다.

“우아악! 죽어라!”

“막아! 진형 무너지려 한다. 힘 좀 더 써!”

덕분에 인면랑들의 돌진 속도가 줄어들어 청림단원들이 인면랑들과 맞설 수 있었다.

그사이 뒤늦게 청운귀명에서 검을 꺼낸 제로가 인면랑 한 마리와 맞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악했다.

서리스와의 일이 있은 후 필사적으로 단련한 제로였지만.

서리스가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해졌음을 방금 걸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마리도 힘든데 대체 어떻게!?’

인면랑들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서리스를 보고 제로는 더더욱 자신이 몰아세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열등한 서리스만을 위안으로 삼았던 자존감이 자꾸 짓밟혀 무너지려 한다.

입술이 달달 떨렸다.

만약 여기서마저 서리스에게 모든 활약을 빼앗긴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쓰레기를 보듯 하대하던 샬롯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 속에서 이제는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 또한 함께.

‘안 돼, 안 돼, 안 돼!’

속으로 소리를 내지른 제로가 눈앞에 인면랑에게 악을 쓰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날아든 그림자 검격이 인면랑을 갈랐다.

흩뿌려지는 진홍빛 핏물 사이로 보이는 서리스의 모습에 제로의 감정이 요동쳤다.

‘아아, 아아악! 서리스으으으으!’

제로의 내면이 분노와 열등감으로 가득 얼룩졌다.

“서리스 님,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청림단원들도 기세를 되찾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갈무리하고 다시 출발하죠.”

몬드로의 감사에 서리스가 미소 지어 대답했다.

그런 서리스를 보는 청림단원들의 눈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드문드문 존경의 눈빛까지 보내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하하, 미치겠구만.’

서리스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슬쩍 가렸다.

솔직하게 말해 서리스는 지금 많이 들떠 있었다.

늘 청림단원들에게 맡겨야 했던 마수를 방금 제 손으로 쓰러트렸다.

평생토록 남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말이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어.’

그 탓에 제로의 몫까지 빼앗아 버렸지만, 서리스는 그 사실을 금방 망각해 버렸다.

마수와 맞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기뻤다.

뒤에서 보는 것만이 아닌 청림단원들과 함께 마수를 물리친 것은.

오래전 잊어버렸던 영웅심을 다시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이동하겠습니다.”

청림단원들의 상태를 다 확인한 몬드로가 다시 출발을 외치자 서리스의 들뜬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시각.

에툰 산, 세계 침식 앞에 검은별 하나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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