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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6화 (6/275)

6화

“망할, 내가, 그따위로.”

서리스가 시원스레 제로를 두드려 패고 난 뒤.

제로는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끄으으윽.”

얼굴을 제외한 모든 곳을 모조 검으로 두들겨 맞았던 제로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몸 전신이 멍투성이라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리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로는 차마 훈련장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보았던 수라와도 같은 서리스의 모습이 재차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로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내가 서리스에게.’

졌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건가.

분명 2년씩이나 검을 쥐지 않았던 그에게.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사실은 제로를 견딜 수 없는 모멸감에 빠트렸다.

‘내가, 내가.’

괜히 눈물까지 나올 것 같다.

유일하게 직계 중 무시할 수 있던 상대가 없어졌다는 것은 제로에게 있어서 너무 큰 두려움이었다.

“제로.”

흠칫.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가장 깊게 심어 준 목소리의 주인이 등장했다.

창문을 타고 내려온 햇빛 아래.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와 그 뒤에 펼쳐진 칠흑과도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고적한 밤과 같이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듯 자신을 전혀 보고 있지 않은 눈동자.

펜타니엄 샬롯.

현재 펜타니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검의 천재의 등장이었다.

몸속 깊이 각인된 공포가 제로를 옥죄었다.

샬롯 앞에서 제로는 고개를 들 수 없다.

평생을 그녀의 아래에서 눌린 것이 제로니까.

“재미있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뭐, 뭐가. 아무것도 아닌데.”

“서리스 오빠에게 졌다며.”

샬롯이 웃었을 때 제로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마치 거인 앞에 선 자그마한 소인처럼 제로는 자신이 급격하게 작아져 감을 느꼈다.

“내 쌍둥이인데 한심하네. 넌.”

눈동자로 한 차례 흘긴 샬롯이 제로를 스쳐 지나갈 때도 제로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러나 꽉 쥔 주먹 안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뚝뚝.

그의 주먹을 타고 핏물이 흘렀다.

그의 주먹은 어딘가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절대로 거역할 수 없이 각인된 공포가 아닌 다른 자에게로.

‘제로가 저렇게 보여도 그리 쉽게 질 애는 아닌데 말이지.’

그런 제로를 지나친 샬롯은 아주 잠시 동안 서리스에게 흥미를 가졌다.

펜타니엄의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겠다고 샬롯은 짧게 떠올렸으나 곧 잊어버렸다.

그녀는 아래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위를 보는 자였으므로.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의 주인은 펜타니엄 칼릭스.

펜타니엄 부가주.

검왕(檢王) 펜타니엄 렐리즈의 맏아들이었다.

직계가 아닌 방계이자 서리스의 사촌 형이 바로 그였다.

“들어와라.”

목소리가 울리자 칼릭스의 방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소가문 오를레의 둘째, 오를레 레투앙이었다.

“무슨 일이지.”

책을 훑고 있던 칼릭스의 눈이 레투앙에게로 향했다.

날이 선 칼릭스의 눈동자 속 이채를 마주할 때마다 레투앙은 전율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펜타니엄 가주가 될 칼릭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레투앙은 오를레의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재차 결심했다.

“서리스 님이 제로 님을 꺾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레투앙은 신속히 보고를 올렸다.

방계는 별채를 이용하기에 본가의 소식에는 그리 밝지 않은 칼릭스가 실소를 내뱉었다.

“그래.”

“내버려 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암살 건 말이냐?”

“예.”

레투앙의 대답에 칼릭스는 딱히 흥미를 두지 않는 표정이었다.

서리스에게 암살을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칼릭스.

꼬리 자르기를 철저히 해 놨기 때문에 암살자를 타고 올라와도 그에게 도달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칼릭스는 암살에 실패한 것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애초에 최근 몇 개월간 관심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로가 졌다, 라.’

그 부분은 꽤나 흥미롭다.

‘암살로 죽거나 혹은 겁을 주면 이제 다 포기하고 내려앉을 줄 알았더니.’

역시 사람 속은 모른다. 이건가.

오히려 그게 계기가 될 줄이야.

“암살을 한 번 더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되었다. 지금은 바쁘다.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은 없어. 워너힐 쪽이 더 급하니까.”

세계 침식이 자주 발생하는 대륙 중심에 세워진 교육 기관.

워너힐 아카데미.

세계 각지의 내로라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며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칼릭스는 방계이나 펜타니엄의 가주를 노리는 자.

최소한의 밑바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워너힐 아카데미에 입학해야만 했다.

“그럼.”

“그래, 당분간은 내버려 두고 보고만 올려라.”

“그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레투앙이 밖으로 걸어 나가자 칼릭스는 탁자 위에 굴러다니던 주사위를 쥐었다.

그러곤 손안에서 주사위를 굴려 가며 생각에 잠시 잠겼다.

‘서리스.’

몰락한 게으른 삼남으로 남아 있어라.

구태여 내 손에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 * *

제로의 교육 이후 며칠이 흘렀다.

교육의 효과가 있었던지 제로는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서리스는 오늘도 천랑후와 검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제로 때 사용했던 청운귀명은 천랑후가 없었다면 상대를 죽였을지도 모를 참사.

그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서리스는 청운귀명을 다루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만 했다.

콰앙! 콰앙!

천랑후가 아니라면 맞부딪치기도 버거울 법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서리스의 그림자 검과 천랑후의 그림자 검은 맞부딪칠 때마다 그 충격을 상쇄하고자 서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옆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 순간, 서리스의 검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하시죠.”

“그래.”

서리스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천랑후와 계속 싸워 본 결과 청운귀명은 집중력이 끊어지기 시작하면 그림자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천랑후는 청운귀명을 자고 있을 때도 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한참 멀었다.

그렇기에 이 시점을 두고 서리스와 천랑후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서리스 님의 노력이 아무래도 펜타니엄 가문별의 눈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이 정도 청운귀명은 펜타니엄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니까요.”

천랑후의 말에 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리스는 펜타니엄 가문별이 자신을 예쁘게 봐서가 아니라.

자신이 강제로 별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펜타니엄 서리스 님.”

그 순간 서리스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는 펜타니엄 문양이 새겨진 천으로 얼굴을 가린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바로 펜타니엄의 안주인의 심부름꾼이었다.

“릴리스 님이 부르십니다.”

“어머님이?”

어느새 서리스의 삶이 익숙해진 그가 반문하자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의 어머니인가.

“알았어. 가 볼게. 천랑후, 다녀온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리스는 곧장 심부름꾼을 따라갔다.

겨울에 들어서기 시작해서인지.

지나가는 서쪽 정원의 푸른빛이 거의 사라진 게 보였다.

그런 정원을 지나쳐 서문에 들어선 서리스는 한참을 복도를 걸었다.

그렇게 복도를 나온 후 그는 겨우 릴리스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끔찍하게 넓은 저택이다.

똑똑.

“어머니, 저 왔습니다.”

두 번의 노크와 함께 자신이 온 사실을 알리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거기에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지금이 마흔한 살쯤이었나. 이 사람은 참 늙지를 않네.’

그녀가 바로 펜타니엄의 안주인 릴리스였다.

“서리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를 아니?”

“제로 건이려나요.”

능글맞을 정도로 태평하게 대답한 서리스는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어머니는 딱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로가 버릇없게 굴어 형으로서 할 도리를 했을 뿐이니까요.”

“도리.”

서리스의 말을 따라 내뱉은 릴리스의 표정이 묘함을 띠기 시작했다.

몰락한 게으른 삼남.

릴리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러한 멸칭이 붙는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리스는 스스로가 검에 재능이 없는 것에 낙담하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게 내 아들이라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 부분은 스스로 이겨 내지 못한다면 설 수 없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해 봤자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뿐이니까.

방치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릴리스는 서리스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차라리 믿고 기다려 주는 게 부모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서리스는 불과 몇 개월 전과 달리 너무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서리스, 무슨 일이 있었니?”

자식은 평등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릴리스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제로와의 일을 각자에게서 정황을 듣고.

둘에게 알맞은 훈계를 하려던 릴리스였지만.

서리스의 변한 모습이 이 사실을 잠시 잊게 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서리스의 변화가 더 중요했다.

“일이요? 음, 딱히요?”

“이상하구나. 내 눈에는 네가 너무 많이 변한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예리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서리스는 소가문의 가주 적 시절의 경험이 있기에, 평소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해 왔다.

그것은 당연히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스가 무언가 의심하고 있었다.

‘어머니니까 보이는 게 있는 건가.’

자식의 변화에 가장 예민할 테니 뭔가 눈치챈 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긴, 애초에 릴리스는 눈치가 빨라.’

그녀가 안주인 된 것은 미모보다도 재빠른 눈치 덕이다.

이제 와서 빼 봤자 더 의심 살 뿐.

“이전에 제가 오히려 거짓 되게 살았던 거겠죠.”

서리스는 당당하게 나가기로 하였다.

마치 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양.

“무시만 받으며 사는 건 이제 지쳤거든요.”

그리고 이건 서리스이자 울드렌의 진심이었다.

더 이상 무시당하고 살지 않겠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말이다.

진심이 담긴 서리스의 말을 듣고 릴리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있긴 했네. 서리스, 이 아이에게 무언가가 생겼어.’

약 3개월 전부터 갑자기 변화한 서리스의 모습은 상당히 의심스럽기 그지없지만.

‘하지만 이건 이쯤 하는 게 좋겠지.’

결국 지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아들이 스스로 일어나겠다는데 굳이 초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덕이다.

“묻고 싶으신 건 다 끝나셨을까요?”

“말해 두지만 펜타니엄 가문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눈감아 주어도, 이번과 같이 검술을 쓰는 다툼은 금지한다는 걸 기억하렴.”

다음은 없다는 릴리스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나는 내 자식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너도 15살이나 되어 훈계받고 싶지 않지?”

“유념하겠습니다. 그래도.”

서리스는 눈웃음을 지었다.

“제로가 또 싸움을 건다면 저도 장담 못 하니 모쪼록 제로에게도 잘 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리스를 보자마자 릴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제로나 서리스나 한 번 더 부딪칠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왜 이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펜타니엄 집안의 자식들은 유달리 이런 면이 강했다.

“그만 나가 보렴.”

그 말에서 서리스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던 순간.

릴리스는 문뜩 한 가지 사실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리스.”

“네?”

문고리를 잡은 서리스가 돌아보자 릴리스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네가 검을 잡았다는 건 다시 가주를 목표로 하는 거니?”

“……음.”

그 질문을 듣고 잠시 동안 허공을 보던 서리스는 곧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주는 그렇게 관심 있는 건 아니지만 기왕 하는 거 해 볼까요.”

눈웃음 지은 서리스는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가 버렸다.

기왕 하는 거라니.

예전 서리스 모습은 정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만한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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