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오늘은 굉장히 운이 없는 날이었다.
“소드란 가문은 정말 별거 없지 않냐?”
“그건 그렇지. 방어 비술을 남한테 걸어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잖아.”
“완전히 펜타니엄한테 기생하는 가문이라니까.”
“큭큭. 소드란 가주가 들으면 엉엉 울겠네.”
“하긴, 방어 비술 걸어 주는 것 말고는 하는 것도 없는 주제에 귀족 행세하는 게 눈꼴 시리긴 해.”
복도를 거닐던 와중 창문 밖 청림단(淸林團) 병사들이 흉보는 것을 듣거나.
“소드란에 배정된 지원이 앞으로 줄 거 같습니다. 대가문 펜타니엄 수뇌부의 결정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뇌부인 청로단의 사자가 와서 예산을 삭감해 버린다든가 하는.
그런 평소보다 기분 나쁜 일들이 번번이 일어났다.
소드란 울드렌.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검술 명가 펜타니엄 대가문에 속하는.
소가문의 가주였다.
한때는 가문 위상이 대단했던 소드란.
최강의 육체를 만드는 비기.
‘금강잔월(金强虥狘)’로 소가문인 하체펠과 함께.
펜타니엄의 두 개의 철벽이라 불리던 가문이었지만.
‘그것도 다 예전 이야기다.’
선조 소드란은 세계 침식을 막기 위해 싸우던 도중 가문의 별이 저주받고 말았다.
그때부터 소드란 가문 사람들은 더 이상 가문의 비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 그때는 희생당했으니 다른 이들이 도와줄 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동정심은 당시에만 있었을 뿐.
세월이 흐를수록, 가문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주위의 시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소드란은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금강잔월 대신.
금강호기(金强護氣)라는 비기를 만들어 내었다.
금강잔월이 최강의 육체로 만들어 주는 비술인 반면.
금강호기는 타인에게 육체 강화의 열화판을 걸어 주는 비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에 와서는 다른 악순환이 되었다.
명색이 소가문이라고 불리고 있으면서 세계 침식을 직접 막아 내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은.
대가문의 기생한 바퀴벌레라는 멸시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현실이 이 꼴이지.’
가주조차 펜타니엄 소속 일반 병사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에 예산까지 삭감당했다.
세계 침식에서 우리의 땅을 지켜낸 결과가 이런 거다.
선조들은 멍청했다.
차라리 나서지를 말지.
“하아, 염병.”
오늘도 세계 침식을 막고자 성벽 앞에 선 울드렌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주가 된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 세월을 돌이켜 보아도 이렇게 무기력했던 날은 없었을 것이다.
울드렌이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 빛나고 있는 소드란의 가문별.
죽은 뒤 승천한 선조들이 후손을 위하여 힘을 담아둔 가문별이지만.
‘나에게는 그냥 별 이상도 아니지.’
승천한 선조가 많을수록 가문별의 힘이 더 강해진다.
그렇기에 가문들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나.
‘내가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울드렌은 애달프게 별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눌렀다.
“출발합시다.”
앞쪽에서 출발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론 오늘은 유달리 ‘끝없는 초롱’의 세계 침식이 심하다 한다.
펜타니엄 직계 쪽에서도 직접 지원이 올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오늘은 꽤나 거친 일이 되겠지.
‘그래 봤자 내가 할 거라곤 병사들에게 금강호기를 걸어 주는 것밖에 없겠지만.’
오늘도 현실을 되새기며 울드렌은 그렇게 병사들과 함께 세계 침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말했듯이.
오늘은 굉장히 운이 없는 날이었다.
* * *
세계 침식이란 무엇인가.
설명할 것도 없다.
그냥 못 막으면 인류는 살 땅을 세계 침식에게 빼앗긴다.
막지 못하면 인류는 살 땅을 잃고 멸망.
그것 하나로 세계 침식을 막을 이유는 충분했다.
“하하, 개 같네.”
울드렌은 오늘은 웬일로 대놓고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었다.
운이 없던 날인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평소에도 움직임이 이상하던 세계 침식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폭주하고 있었다.
끝없는 초롱
펜타니엄이 세계를 위해 막고 있는 5대 최흉 중 하나인 세계 침식의 이름이다.
초록색의 초롱들과 같이 빛나는 숲 아래 본 적 없는 생물들이 쏟아지는 세계.
그런 끝없는 초롱의 세계 침식을 막는 것이 펜타니엄과 소가문들의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소가문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태악룡(太惡龍)이라 불리는 가장 위험한 녀석이 성벽에 들이닥친 것이다.
같이 온 병사는 전멸했다.
새벽의 마탑주가 걸어 주었던 성벽의 마법마저 놈에 의해 부서져 나가고 있다.
울드렌은 그것을 부러진 나무 아래에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일부가 머리를 때렸다.
이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세계 침식은 곧바로 자신의 가문을 덮치게 된다.
‘펜타니엄 쪽에서 분명 지원이 온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때까지만이라도 지켜야만 했다.
부러진 다리를 이끌며 울드렌은 미친 듯이 흔들리는 성벽 계단을 타고 올랐다.
태악룡이 한 차례 몸을 뺀 듯 진동이 멈추자, 그는 그사이 성벽 위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곧 그 광경을 목격했다.
거기에는 새하얀 태양이 있었다.
성벽만큼이나 거대한 태악룡의 입.
그 입보다도 훨씬 더 거대하고 새하얀 태양.
세계조차 지워 버릴 것만 태양은 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빛이 닿는 피부가 뜨겁다.
확신했다.
저게 성벽에 부딪치는 순간 성벽과 함께 세상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엿 같네.”
찢어진 상의가 태악룡의 태양을 향해 몰려드는 바람이 휘날렸다.
휘날린 옷 위로는 소드란의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소드란 울드렌.’
평생을 무시당하고 멸시받은 소드란의 가주이지만.
세계 침식으로부터 세계를 지켜 온 어엿한 영웅이기도 했다.
쿠과과과과과과과과광!
폭음이 터져 나오며 태양이 성벽과 세계를 집어삼키고자 날아들었다.
단, 1초라도 좋다.
그동안 승천한 소드란 가문의 선조들.
‘비록 평생을 도움 주신 적 없으시지만, 오늘만큼은 다르기를 바랍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닿은 것일까.
그의 목 뒤에 장식과도 같았던 별 문신이 그날만은 거세게 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소드란 가문별 또한 그의 부름에 어느 때보다 강렬히 빛났다.
어쩌면 태악룡의 태양보다도 더 밝은 그 빛은.
생에 마지막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불사 질렀다.
오른쪽 손은 하늘을 밀어내고.
왼쪽 손은 지상을 누르면.
만물의 모든 것은 부정 될지어니.
눈앞에 들이닥친 태양을 앞에 두고 울드렌은 모든 만물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금강잔월(金强虥狘)
오행상극(五行相剋)
성벽이 태악룡의 태양에 집어삼켜진 순간.
발동한 가문 비기가 태양을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사락.
한 줌의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에 분노한 태악룡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익숙지 않은 비기이기 때문인지.
그의 육체는 태양에 삼켜져 대부분이 불타 잿가루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 태악룡이 아니었더라도 금강잔월의 최대 비기를 쓴 시점에서 난 죽은 목숨이었어.’
저주받은 가문의 별.
저주에 의해 울드렌은 별을 담을 수 없는 육체로 태어났으니까.
쨍그랑!
담지 못하는 별을 담은 그릇은 깨질 뿐이다.
흩날리는 재 사이로 육체가 차츰 부서져 간다.
하지만 그 덕분에 금강잔월의 최대 오의를 망설임 없이 쓸 수 있었다.
‘하하, 내가 원래 이렇게 희생적이고 착한 놈은 아니었다지만.’
울드렌이 옅게 웃었다.
‘마지막에 한 번쯤은 정면으로 세상과 맞서 봐도 되잖아?’
그렇기에 죽음도 썩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울드렌은 굽히지 않고 등을 올곧게 폈으니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나는 당당히 간다.’
사라져 가는 시야에서 울드렌은 성벽 저 너머에 막 도착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제복의 등 뒤로 화려하게 그려진 펜타니엄의 문양, 손에 쥐어진 그림자 검.
펜타니엄의 직계가 왔다.
태악룡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겨누고 달리는 직계를 보며 그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버텼구나.’
버텨 낸 거다.
‘하, 하하, 썩 운 나쁜 날은 아니었네.’
한 가지 후회가 지나쳤다.
오늘 제 가문을 모욕했던 병사들에게.
그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기 전에, 이 모습을 보여 주며 욕설 한 번 시원하게 날려줬어야 했다고.
울드렌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후회를 끝으로 세상과 끝을 고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사람의 뜻대로 풀리지 않기에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