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협박. >
나진-선봉 지구, 서수라 항의 앞바다는 자주 안개가 낀다. 오늘도 짙은 안개가 껴서 배는 속도를 많이 줄였다.
3만 톤급 유조선 혁신호 선장 이재출은 선교(조타실)에서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렇게 안개가 자욱이 낀 날은 한 번의 조작실수로 귀중한 유조선과 선원들의 생사가 끝장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뚜 우우 우우~
긴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이재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서수라 항에 들어가는 안전한 해로에 들어선 것이다.
‘8개월 만이군! 애는 잘 자라고 있겠지!’
이재출은 늦장가를 가서 이제야 겨우 아들을 봤다. 애가 두 살이 되어 아빠, 엄마를 가까스로 발음할 때 집을 떠났다가 8개월 만에 돌아오는 것이다.
방바닥을 기어 아빠에게 다가 오며 아, 빠, 압빠 하던 아들의 귀여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이재출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항에 도착하면 빨리 집부터 가고 싶군!’
이재출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배가 휘청하더니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꽝꽈꽈꽝, 꽈꽈꽝~
“앗!”
이재출은 조타실의 한쪽으로 날려가 선체에 머리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
그런 생각을 끝으로 이재출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두 발, 정확히 명중했습니다. 함장님.”
혁신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북한의 로미오급 장수함, “영원호”가 거대한 고래처럼 떠 있었다.
함장 권형규중좌의 옆에서 부관이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사령부에 보고할 혁신호 침몰의 인증샷이다.
3만 톤급 유조선은 어뢰에 맞아 눈부신 섬광과 폭발을 일으키며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배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선원들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유조선의 폭발이다.
바다의 엄청난 면적이 기름으로 뒤덮여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과연 저속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권형규중좌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혁신호의 선원들은 그저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한 집의 남편이고 아들, 동생, 오빠인 평범한 선원들, 그들이 전쟁의 명분이 되어 모략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함장인 자기는 명령에 따르는 군인이다. 아니, 그보다 명을 따르지 않으면 총살되어야 하는 장교다.
그저 자기가 저런 꼴이 안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권형규중좌는 안도해야 했다.
비록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멍멍하지만···.
“급속 잠수하라.”
머릿속에 살아나는 모든 생각을 지워 버리듯 권형규중좌는 명을 내렸다.
“급속 잠수!”
“영원호”가 물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17분 후, 북한의 "청진급"초계함이 활활 불타며 침몰하고 있는 “혁신호”를 향해 다가왔다.
이젠 안개도 참상을 막지 못한다. 드넓은 면적의 바다가 불에 타고 있어서 사방이 환하다. 그중에는 수십구의 시신이 불에 타서 둥둥 떠 있다.
“저기, 살아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라보니 불타는 바다를 피해 간 세 명이 둥둥 떠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끈질긴 목숨들이다.
“사, 살려···. 주세요!”
“구해라.”
“옙.”
곧 단정이 내려지고 해군 구조원들이 달려가 그들을 단정에 끌어 올렸다. 이때가 새벽 3시 36분이었다.
오전 10시.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각하. 티, 티브이를 켜 보셔야겠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이준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 그게···.”
말을 더듬던 비서실장이 안타까운지 제 손으로 티브이를 켰다.
“저게 뭔가?”
그것은 북한의 중앙티브이 채널이었다. 늘 남한을 공격할 때 나오는 나이가 지긋한 여자 아나운서가 격동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오늘 새벽 3시, 우리나라의 유조선 혁신호가 동해의 서수라 항에 입항하다가 침몰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57명의 선원이 사망했고 겨우 세 명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혁신호의 침몰은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재입니다.
민간 선박을, 그것도 유조선을 잠수함이 어뢰로 격침했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이 티브이를 보는 전 세계 여러분,
국적과 민족, 인종을 떠나 이런 만행은 국제적으로 질타를 받아야 할 범죄 중의 범죄입니다.
우리는 구출된 세 명의 선원 중에서 한 명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민간 선박 혁신호를 침몰시킨 잠수함의 실체입니다.”
불타는 바다. 두 동강이 나서 활활 불타며 침몰하는 바다에서 떠 있는 잠수함이 보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로미오급 잠수함이 분명했다.
로미오급 잠수함은 원래 소련이 제작한 잠수함으로 공산권 국가들은 대개 이 로미오급을 사용한다.
중국도 있고 북한도 있고, 응? 그런데 저건 무엇인가?
티브이에서 화면이 확대되더니 잠수함의 해치가 보여졌다.
거기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그건 바로 <시태-로, 26호.>라는 한글이다.
시베리아합중국은 고려어(한국어)를 공용어로 하면서 군함들의 함명도 한국어로 새로이 바꿨다.
물론 주민들이 아직 공용어에 익숙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은 7년쯤 지나면 능숙하게 한국어를 할 것이다.
또 야간 학원에서는 하루에 두 시간씩 반드시 모든 국민들이 한국어를 익혀야 한다.
이 두 시간은 공짜가 아니라 자기의 월급에서 두 시간에 해당하는 시급을 고스란히 받기에 모든 국민이 적극 참가한다.
그리고 지금 저 티브이에 나온 잠수함의 <시태-로. 26호>라는 뜻은 시베리아합중국 해군 태평양함대 로미오급 잠수함 제26호라는 뜻이다.
시베리아의 해군은 원래 러시아 북해 함대와 태평양함대가 이름만 바꾼 것이다.
독립을 쟁취하면서 북해함대와 태평양함대는 시베리아합중국에 합류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군들은 가족들과 친척들까지 모두 시베리아로 데려왔다. 당당한 시베리아의 북해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되어 있다.
이준은 어이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씁쓸한 표정이 생겨났다.
“이것이었나? 김정일이 노리는 것이···.”
그동안 북한의 병력이 두만강의 하산 일대에 집결하는 것을 보며 의아해 하던 것이 풀렸다.
“자작극을 꾸몄단 말이지?”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기 위해 국경선 주위의 작은 독일 소도시의 방송국을 공격했었다.
바로 독일인이 폴란드 군복을 입고 독일 방송국을 공격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북한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불 보듯 명백했다.
하지만 북한이 시베리아합중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여우가 곰에게 덤비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수십 마리로 집단 공격하는 늑대도 곰을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겨우 여우 따위가 덤벼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우리 공화국은 우리의 평화적인 민간 선박을 공격하여 침몰 시키고 귀중한 선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시베리아합중국 지도부에 묻는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유조선을 공격했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우리 공화국은 시베리아합중국보다 무력이 약하다.
그러나 공화국 국적의 평화적인 선박을 공격한 이 귀축같은 만행에 대하여 절대로 참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시베리아합중국이 타당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면 천배, 만 배로 복수할 것이다.”
“풋!”
이준은 아줌마 아나운서의 협박을 들으면서 어이없는 미소를 그렸다.
‘재밌군! 김정일,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거냐?’
이준은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저 사진을 분석해보라고 하게, 분명 합성이겠지만···.”
“예. 각하.”
비서실장이 나가자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눈앞에 일망무제한 푸른 바이칼이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바이칼은 너무 커서 끝이 보이지 않고 수평선이 보인다.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담수호이며 육지 속의 바다인 바이칼!
저 깊은 수중에는 아직도 미지의 생물체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북한의 뒤에 어떤 자들이 있을까?”
이준은 북한의 뒤에 미지의 큰 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아직은 그것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밝혀진다면 그 뿌리를 들춰 내리라! 이준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
“흐흐흐. 이젠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겠군!”
티브이를 보던 김정일이 볼록 나온 배를 흔들며 웃었다. 아르진 리의 화가 난 얼굴을 생각하니 통쾌하기가 짝이 없다. 그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부관이 들어섰다.
“중국에 갈 준비를 해라.”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지도자동지!”
사건 발표 후 분노한 김정일의 중국주석 방문은 이미 작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도 FCI의 각본으로 그들은 이것을 위해 중국 정부에 엄청난 차관을 주기로 하였다.
따라서 김정일이 베이징에 가서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시베리아합중국을 협박하는 것이었다.
또한 심양군구의 군대들을 시베리아-중국 국경에 이동 시키면 정세는 더욱 긴장될 것이고 그때는 북한 하나가 아니라 북-중의 합작이라고 아르진 리는 생각할 것이다.
또한 북-중의 합동 공격은 시베리아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자, 그럼 금융가 선생들의 말대로 두 번째 바둑을 두러 가보자!”
1995년 5월 27일 오후 5시.
김정일은 순안 비행장을 떠나 중국의 북경 중남해에 도착하였다. 중남해는 주석궁을 비롯한 중국 정치의 모든 기관이 있는 구역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5월 28일, 중국주석과 김정일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조 군사협정에 따라 북조선의 군사적 대응을 예의 주시할 것이다.
또한 이 악랄한 만행의 진범을 찾아내는데 함께 수사할 것이다.
만약 이 사건에서 진범이 밝혀지면 중-조 군사협정에 따라 진범국을 적으로 규정, 북조선과 힘을 합쳐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조 두 나라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진범이 밝혀지기 전에 촉구한다.
이번 만행의 진범국은 스스로 자백하고 북조선에 사과하며 정신적 및 물질적 보상을 하라.
그리한다면 우리 중국도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촉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오리발을 내민다면 중국은 군사협정에 명시한 대로 북조선을 도와 그 어떤 형태의 분쟁에도 함께할 것이다.”
이 성명이 발표되자 전 세계는 긴장 속에 시베리아를 주시했다.
명확히 시베리아합중국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잠수함이 시베리아합중국의 것이라고 밝혀진 셈이다.
그런데 진범국에 대하여 북한과 함께 군사협력을 하겠다는 것은 결국 전쟁을 양국이 함께 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미국 랭글리, CIA.
CIA 국장 로버트 존슨은 동북아시아 담당 부장인 제임스에게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7개월 전, 국제 유대 금융의 가브리엘이 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갔습니다.”
“가브리엘? 로스차일드 가문의 죽음의 상인 말인가?”
“예. 맞습니다.”
“으음!”
가브리엘은 CIA에서도 주목하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 최고 수장의 심복 중 한 명으로 그가 움직이면 꼭 전쟁이 일어나거나 엄청난 테러가 일어난다.
수만, 수십만이 죽는 죽음의 움직임!
그 때문에 CIA에서는 그를 “죽음의 상인”이라고 한다.
“그자가 이번 일의 배후라면 북한에 결코 작은 대가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뭘까? 무엇을 주어야 북한이 감히 시베리아에 달려들 수 있을까?”
그의 말에 동북아 담당부장인 제임스가 대답했다.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요원들의 예측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식량난 해결, 둘째, 유대 금융의 자금지원, 셋째, 핵탄두의 제공입니다.”
“뭣, 핵탄두?”
“예. 그렇지 않다면 김정일은 목이 열두 개라도 시베리아합중국에 도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로버트 존슨은 약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FCI가 무슨 짓을 하든 다 눈을 감아주어도 북한에 핵탄두를 제공한다면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비록 앞으로 무궁하게 발전할 시베리아를 견제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 핵탄두를 제공한다는 것은 철 모르는 아이에게 수류탄을 쥐어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건 반드시 막아야 한다. 아니면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아픈 문제가 될 것이다.
“부장. 시베리아의 CFSB에 슬그머니 이 정보를 흘려라. 다른 것은 몰라도 북한이 핵을 가지게 놔둘 수는 없다!”
로버트 존슨의 차가운 회색 눈이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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