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명분세우기. >
타냐의 집은 피오네르스카야 거리 23번지의 오피스텔이다.
새벽 3시. 사람들이 가장 푹 잠들었을 시간 때이다.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타냐가 사는 15층 오피스텔 옆에 나타났다.
타냐의 오피스텔은 7층이다.
두 남자가 메고 온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크로스보우이다.
팡, 츄리릭~
두 복면인 중 한 명이 7층 베란다를 겨누고 크로스보우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얇고 긴 줄을 뒤에 단 화살촉이 날아올랐다.
퍽.
타냐의 집, 7층 베란다 난간에 닿자 화살이 세모꼴의 갈고리로 변하여 난간을 꽉 잡았다. 두 복면인은 다람쥐마냥 재빨리 줄을 타고 올라갔다.
오랜 수련의 결과다.
그들은 잠깐 사이에 베란다를 지나 방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들어섰다. 이들이 바로 어둠의 살인자들인 블랙 스피어(흑창)이다. 희미한 달빛이 비쳐 드는 방안의 침대에 타냐는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흐흐흐. 이번에는 내가 먼저 먹는 순서지?”
“그래, 알았다.”
이들은 여자를 살해할 때 매번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두고 의견이 많았다. 그러다가 합의를 본 것이 한 번씩 번갈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몸이 뚱뚱한 자가 첫 번째 순서이다.
‘으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구나!’
블랙 스피어가 머리까지 푹 눌러 쓴 타냐의 이불을 벗겼다.
순간.
“헉. 속았. 컥!”
침대 밑에서 솟구쳐 오른 주먹이 블랙스피어의 사타구니를 가격했다.
아주 정확하게 바로 알통을!
퍽.
블랙 스피어가 입을 딱 벌린채 콰당당하고 넘어갔다.
“네년이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알았구나!”
“흥. 쥐새끼들이 그렇게 큰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모를까?”
타냐는 속옷 차림이었다. 얇고 흰 잠옷 원피스 사이로 그녀의 속살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블랙 스피어는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역시 몸매가 죽이는군! 흥분되는 걸! 클클클.”
자기 동료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도 놈은 온갖 그 짓에만 신경이 쏠렸다.
놈이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집어넣었다.
사로잡아 마음껏 능욕하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앞에서 격투 자세를 취한 타냐를 보며 빈정거렸다.
“얌전히 잡히는 게 좋을 거다. 반항해봐야 어차피 너만 힘들 뿐이다.”
“흥, 길고 짧은 건 붙어봐야 알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휘익~
말이 끝나는 순간, 블랙스피어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그것도 타냐의 불룩한 가슴을 향하여!
순간, 잔뜩 웅크린 고양이처럼 있던 타냐가 핑그르르 몸을 돌렸다.
그에 주먹이 타냐의 옆으로 흘러가고 팽이처럼 회전한 타냐의 몸은 어느새 블랙스피어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타냐의 왼손이 블랙스피어의 사타구니를 향해 뻗었다.
“흥. 그럴 줄 알았다!”
날쌔게 사타구니를 두 손으로 보호한 블랙 스피어!
한데 이건 뭔가?
“꺽!”
갑자기 목에 강력한 타격이 가해졌다. 사타구니 공격은 기만이고 실제는 바로 지금의 이 타격, 타냐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블랙 스피어의 목을 발뒤꿈치로 강타한 것이다.
꽈당당~
“내가 까제트 출신이라는 것을 모른 것이 네놈들의 실패 원인이다!”
까제트! 7살 때부터 19살까지 오직 군사에 대해서만 스파르타식으로 교육받은 요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타냐는 7살부터 19살까지 유년 군사학교에서 각종 무술과 사람 죽이는 기술을 배운 살인 병기였다.
그걸 몰랐으니 블랙 스피어의 패배는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두 사람의 팔과 다리를 얇은 나이론 끈으로 묶은 타냐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이준이 물었다.
“그럼 놈들의 디데이가 모레 아침인가?”
“예. 아침 10시. 각 도시 정부 청사를 포위하고 노조는 시위하고 마피아들은 노조를 엄호하여 진압에 출동한 보안대를 공격하게 합의가 되었습니다.”
“이게 푸틴의 작전이란 말이지?”
“예. 보안대가 진압 과정에 마피아들은 일부러 자기 사람들 몇 명을 쏘아 죽인답니다. 그다음 날부터 노조는 그 시신을 메고 무고한 노동자들을 총으로 죽인 시베리아 특구 정부의 타도와 의장 각하의 구속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푸틴의 명을 받은 마피아와 시베리아 노조의 이번 내란의 진짜 목적입니다.”
“그렇군! 그것을 명분으로 시베리아 경제특구를 해체하며 나를 체포하면 정당한 명분이 되니까!”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보고를 한 DG그룹(단군 그룹) “미래전략사업부” 부장 김 알렉세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푸틴의 지시를 가지고 온 비밀특사를 잡아. 그자를 잡아야 우리에게 명분이 선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이르쿠츠크 쥬코프호텔 스위트룸에 있습니다. 이미 우리 요원들(단군 그룹 미래전략사업부)이 호텔의 곳곳에 손님으로 위장하고 놈을 감시 중입니다.”
“그럼 더 시간을 끌지 말고 잡아.”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DG그룹(단군그룹) 미래 전략사업부는 시베리아와 러시아는 물론 해외까지 아우르는 이준만의 개인적인 정보기관이다.
이준은 공식적인 시베리아 특구 정부의 정보기관인 CFSB의 정보와 또 다른 자기의 개인 정보국인 미래전략사업부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따라서 미래전략사업부 요원들에게 이준은 특구 의장이라기보다 단군 그룹의 회장이다.
***
쥬코프호텔의 지하 1층에는 나이트클럽이 있다. 어둑어둑한 공간에 붉고 푸른 빛이 언뜻언뜻 비치고 수백 명의 남녀가 온몸을 미친 듯이 흔들어 대고 있었다.
춤을 추는 무리는 마치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가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군상이 흔들어대는 춤의 물결을 보며 혼자 식탁에 앉아 조용히 보드카를 마시는 자가 있었다.
알렉세이 폴루얀!
그는 바로 러시아 총리 푸틴의 수석비서이다.
그는 30명의 심복 부하를 시베리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마피아들에게는 중앙 정부와의 밀월관계를 약속해 주었고 노조들에는 회사의 인사의 인사 허락권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물론 시베리아 특구를 해산하고 아르진 리를 무기 징역형에 처넣은 다음, 모든 노조 간부들은 암살될 것이다.
기업의 인사권을 노조의 허락을 받아햐 한다면 모든 기업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그럼 진짜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이틀 후에는 노조들이 파업과 함께 시위를 진행할 것이고 마피아들은 보안대가 진압을 시작하면 노동자 몇 명씩을 사살할 것이다.
그다음 러시아의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이다. 그럼 푸틴은 여론을 등에 업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특구 의장 이준을 체포하고 특구 해산령을 내릴 것이다.
그리 되면 시베리아는 다시 러시아의 품에 안긴다. 이후 푸틴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 대통령을 종신 해 먹게 될 것이다.
‘클클, 그건 말이 대통령이지 실제는 차르가 되는 거지! 후후후.’
그 세상이 오면 알렉세이 폴루얀은 러시아 정부의 장관으로 한자리 해 먹을 것이다. 그는 기분 좋게 술잔이 가득 담긴 보드카를 목구멍에 부어 넣었다.
몸이 후끈 해지고 술기운이 오르면서 묘하게 춤추는 여인들의 탱탱한 엉덩이와 허연 허벅지가 자꾸 눈 안에 안겨 왔다.
그때였다. 그가 앉아 있는 식탁 옆으로 향기로운 향수 냄새가 확 풍기며 세 명의 아가씨가 지나갔다. 그들은 몇 자리 건너의 식탁에 앉았다.
무심히 바라보던 폴루얀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저 계집, 대, 대단하다!’
깔깔거리며 웃는 세 명의 여대생들, 그중 한 명의 여대생은 눈 위에 핀 백합처럼 아름다웠다. 폴루얀이 보기에 어둑어둑한 나이트클럽인데도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꿀꺽!”
폴루얀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이봐.”
“예. 손님!”
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웨이터가 머리를 돌렸다. 폴류안은 슬쩍 웨이터의 주머니에 50달러짜리 지폐를 넣어 주며 말했다.
“저기 저 세 아가씨를 부킹해 줄 수 있나? 그럼 그 돈은 자네 걸세!”
“해보죠. 손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웨이터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세 명의 여대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뭐라고 한참 얘기했다. 그러자 세 명의 아가씨가 폴류안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셋은 곧 일어서서 풀리안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다가왔다. 셋 다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자태를 뽑냈다.
“안녕하세요. 부킹 해주셔서 감사해요. 전 세나이고 이쪽은 옥싸나. 쟤는 갈랴에요.”
“아. 어서 앉으세요. 혼자 술을 마시다가 아가씨들을 봤습니다.
너무 예뻐서 초대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오늘 먹고 마시는 값은 내가 전부 쏘겠습니다.”
“와, 아저씨 화끈하다. 이름이 뭐예요?”
“아, 난 폴류안입니다.”
“아, 그럼 우리가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 저야 좋지요. 하하.”
“그럼 됐다. 웨이터. 여기 프랑스 포도주 세 병을 가져와요!”
폴류안은 그렇게 세 여대생과 휩쓸렸다. 그가 찜한 아가씨의 이름은 갈랴. 나이는 22세. 이르쿠츠크 경제대학에 다닌다고 한다.
처음에는 포도주, 다음에는 포도주. 등등을 마시기 시작하자 세 아가씨는 여러 번 춤을 추러 나갔다. 폴류안은 오직 갈랴와 두 번을 춤추었다.
세 번째로 나가 춤을 출 때였다.
이젠 술기운이 올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올 지경이 되었을 때다.
“갈랴. 우리 별실에 갈까?”
“별실에요?”
“응, 우리 둘이서만···.”
그러자 갈랴가 부끄럽다는 듯 폴류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폴류안의 코로 그녀의 머리 냄새가 흘려들었다.
그것이 더욱 폴류안의 음심을 들끓게 했다.
“자, 갈랴. 우리 가자.”
“네!”
그녀는 동료들이 있는 테이블 쪽을 슬쩍 보고는 폴류안을 따라 별 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별 실. 이곳에서 일을 치르기에는 딱 좋다.
“자. 우리 여기서.”
소파에 앉으며 머리를 돌린 폴류안의 눈동자가 딱 굳어졌다. 자그마한 소형 권총을 움켜쥔 갈랴가 눈앞에서 그를 겨누고 있었다.
“아, 아니 넌,”
“알렉세이 폴류얀, 닥쳐라. 당장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헙!”
폴류안은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텔에는 호위병이 12명이나 된다.
한데 그들을 떼 놓고 몰래 온 것은 오늘 밤의 성욕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놈의 성욕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내, 내가 이런 실수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늦었다. 별 실의 문이 열리더니 두 아가씨가 들어섰다. 그런데 그녀들도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술에 취해서 해롱 거리던 아가씨들이었는데, 그게 모두 연기였다.
“나, 나를 어쩔 셈이냐?”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고 만족치 않으면 폴류안, 넌 여기서 죽는다. 마약 과다복용으로!”
“마, 마약 과다복용?”
그런 실례는 많다. 진짜 마약 중독자들도 죽지만 그보다 더 많이 죽는 것은 바로 이런 암살 방법으로 죽는 자들이다.
“말하겠소. 모든 것을 다 말할 테니 살려주시오!”
세 아가씨의 눈이 서로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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