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사랑을 위해. >
자욱하게 내리는 흰 눈때문에 1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어려웠다. 이런 날은 집에서 밖에 나가지 않아야 안전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함박눈 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바로 저 두 사람처럼!
“아직 멀었나?”
뒤에서 따라 오는 사람이 앞에 선 사람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두 사람이 쏟아붓는 눈 발 속으로 걸어간다.
정말 너무 눈이 많이 와서 이제는 30cm 앞이나 겨우 분간할 수 있다. 대신 그들의 발자국은 쏟아지는 눈이 순식간에 묻어 없애 버렸다.
“정지!”
그때 자욱한 눈 발 속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두 사람의 귀를 두드렸다.
“오우버쓰로우(타도)”
두 번째 울리는 외침이다. 그러자 두 사람 중 부하로 보이는 사람이 맞받아쳤다.
“푸틴.”
그렇다. 방금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은 암호다.
푸틴 타도! 그것이 오늘의 암호였다.
“통과하십시오. 두 분이 마지막 분입니다. 모두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네!”
두 사람이 조금 걸어가자 짙은 눈 발 속에 작지만 아담한 중세 시대에 지은 성 같은 집이 보였다. 두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서자 문 뒤에서 경비를 서던 보초들이 부동 자세를 취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들어서 망토를 벗고 인사한 사람은 러시아 100대 재벌 중 2위에 속하는 중화학 그룹 회장 니콜라이 바스코프였다. 올해 39세의 니콜라이 바스코프는 100대 올리가르히들 중 가장 젊은 재벌 회장이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네. 우리도 방금 왔으니까!”
서로 수 인사를 하고 앉자 베레조프스키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는 러시아의 경제를 쥐고 있는 100그룹 회장들이 모였습니다.
당신들은 러시아가 자본주의로의 변환할 때 모든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러시아 그룹들을 지켜낸 공신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없었다면 그렇게 빨리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100대 그룹이 되자 러시아국민들은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우리를 악덕 기업주들로 묘사했고 우리는 국민들의 재산을 꿀꺽한 악독한 재벌그룹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반기업 정서가 팽배한데 이번에 총리가 된 푸틴은 국민과 기업의 관계 악화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관계를 악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총리 푸틴이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 때문입니다.
확인한 정보에 의하면 그의 이번 대통령 선거의 구호는 100개의 악덕 재벌 그룹을 몰수하여 국민의 손에 맡긴다, 입니다.”
베레조프스키가 말을 끊고 물을 마시는 동안 재벌들이 술렁거렸다.
“이건 푸틴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전쟁에서는 오직 승자와 패자만이 남습니다. 전쟁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는 두 총알에 맞아 죽습니다.
이제 우리도 결정해야 합니다. 두 손을 들고 푸틴에게 기업을 맡기든지, 아니면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결정하십시오.
10분 동안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푸틴과의 전쟁에 찬성하시는 손을 들어 표시하시고 반대하는 분은 손을 들지 않으면 됩니다.
자, 10분간 생각합시다!”
그러나 생각해볼 것도 없다. 만약 자기 그룹들을 모두 바치면 푸틴이 살려줄까?
아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일단 100대 그룹을 부정 축재의 악으로 몰아세워야 한다.
그리고 국민이 못사는 것은 100대 재벌그룹이 악랄하게 착취하기 때문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재벌 총수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재판정에 세워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할 것이다.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이 환성을 지를 테니까!
악을 쳐 없앤 사이다 같은 대통령감이라고!
그리되면 푸틴은 압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건 전쟁이며 싸우다 죽어도 싸워야 한다.
“자. 10분이 되었습니다. 결정하신 분들은 손을 들어 표시해주십시오.”
척척척척!
모두 손을 들었다. 놀랍게도 반대 하나 없는 100%였다.
“100% 찬성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합심하여 푸틴의 정부와 싸워야 합니다.”
이날 이들은 푸틴을 반대하여 싸우는 자기들의 조직을 “반푸틴연대”로 명명했다. 그리고 푸틴의 대선을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
이르쿠츠크시에도 함박눈은 쏟아붓듯이 내리고 있었다. 클라쉬지강 공원도 흰 눈이 모든 것을 덮어가고 있었다.
클라쉬지강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거대한 곰 동상이 서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서 있던 동상은 레닌의 동상이었다.
개혁개방과 함께 소련이 무너지고 공산당이 해산되자 이르쿠츠크시민들이 달려들어 레닌의 동상 목에 밧줄을 걸어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불곰이었다. 그 거대한 불곰 동상에도 눈이 가득 쌓이고 있다.
그 앞에 겨울 코트를 입고 러시아 겨울 털 모자를 쓴 이름다운 여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로 사라 푸틴이다.
10분 전 8시.
저 앞에서 차가 멎는 것 같더니 눈에 익은 형체가 눈발 속으로 다가왔다. 시베리아 특구 의장 이준이다. 이준도 코트에 모자를 썼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3분쯤 기다렸어!”
사라가 스스럼없이 이준의 팔목을 끼며 대답했다.
“음, 그럼 어딜 갈까?”
“일단 저녁을 먹자. 바이칼 매운탕 집에 들려서.”
“알았어.”
둘은 팔짱을 낀 채 걷기 시작했다. 바이칼 매운탕 집은 거리가 300미터도 안 된다.
이르쿠츠크에 사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바이칼 매운탕 집은 이름난 맛집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매운탕은 눈물깨나 흘리며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그 매운탕 맛은 그들을 끌어당겼다. 마치 마약처럼!
그리하여 이르쿠츠크의 30개 맛집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바이칼 매운탕 집이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깔끔한 바이칼 매운탕 집 제복을 입은 고려 처녀가 둘을 맞이했다.
“네.”
“그럼 강가가 보이는 저 창문 쪽 자리가 어떠세요?”
“좋아요.”
둘은 클라쉬지강이 보이는 창가에 놓여 있는 식탁에 앉았다.
“신선로 매운탕을 주세요.”
“예. 곧 준비해 내오겠습니다.”
신선로는 냄비에 매운탕 재료를 넣고 불을 지펴 끊여 먹는 쇠로 된 화로 통이다.
“아르진. 미안해요.”
매운탕이 부글부글 끓고 술이 서너 순배 돌았을 때 사라 푸틴이 갑자기 한 말이다. 그러자 이준이 바이칼 메기를 뜯어 먹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알잖아. 우리 아빠!”
“아빠는 아빠고 사라는 사라야!”
“그래도 너무 미안해. 아르진. 너무 미안해!”
“너, 벌써 취했니? 총리가 네 아빠라고 해서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넌 이미 내 여자니까? 장인이 밉다고 아내를 버리는 남자가 어디 있냐?”
이준의 말에 사라가 방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내가 믿고 사랑할만한 사람이야, 아르진. 난 평생 너 하나만을 사랑할 거야!”
“됐고, 어서 먹어라.”
“먹어야지. 맛있게···.”
두 사람이 바이칼 메기 매운탕에 알딸딸하게 술을 마시고 식당을 나왔을 때는 저녁 11시였다.
“아르진. 저기로 가자.”
“어딜. 이젠 집에 가서 자야지?”
“자는 건 자는데, 우리 저기 가서 자자.”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쉬르지강 호텔”이었다. 쉬르쥐강호텔은 5성 호텔로 상당히 비싼 요금을 받는 호텔이다.
“저긴 호텔이야. 사라야. 집에 데려다 줄게.”
“아니, 오늘은 나, 사라가 아르진, 너를 데리고 가서 자는 날이야!”
“!!!”
이준은 알 수 있었다. 사라가 오늘 왜 이러는지를!
그녀는 푸틴이 어떻게 하든 이준이 푸틴과 전쟁을 하든 말든 자기의 마음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 사라는 이준에게 도장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다.
“좋아. 가자. 사라야!”
이준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늘 사라의 마음을 거부한다면 그건 사라가 바치는 순수한 사랑을 차버리는 것이니까! 이준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푸틴 따위가 뭐라고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버린단 말인가?
그따위 생각은 애초부터 이준에게는 없었다.
불그레한 빛이 비치는 침대 위에 누운 사라는 늘씬한 자태를 뽐냈다. 이준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사라는 시트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의 몸을 공유하는 자리지만 너무 부끄러운 것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준이 시트 속으로 들어오자 사라는 와락 매달렸다. 그녀는 이미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두 사람의 팔과 팔이 엉키며 힘껏 그러 안았고 가슴과 가슴이 닿아 부드러움과 쩌릿한 느낌이 머릿속에 전해져왔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 뜨거운 마음을 담은 두 사람의 혀가 수없이 많은 말을 서로에게 전달했다.
얼마나 키스했을까? 이제 진정한 한 몸이 될 시간이 왔다.
둘은 그냥 본능이 시키는 대로 서로의 몸에 파고들었다.
“흐윽!”
사라가 갑자기 꽃잎 같은 입술을 떡 벌렸다. 그리고 신음과 함께 숨을 딱 멈추었다. 아, 대체 지금의 이 순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는 순간은 너무 황홀해서 숨이 멎는 것 같다. 사라는 이준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바싹 끌어당기며 맹세했다.
‘아르진, 오늘부터 난 너와 한 몸. 늙어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 세상의 풍파를 헤쳐갈 거야!’
뜨겁고 열렬한 이준과 사라의 밤은 그렇게 밤새도록 불타올랐다.
***
CFSB 본부 국장실.
시베리아보안국장 사라 푸틴의 앞에 정보 차장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사라는 그가 가져온 서류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리고 서류를 내려놓은 사라가 입을 열었다.
“이게 모두 사실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국장님.”
“그럼 아빠가 아르진의 뒤를 캐라고 지시했다는 것인가요? 그것도 FSB 반부패 차장에게?”
“예. 사실입니다.”
사라는 길게 숨을 조절했다. 아빠가 FSB(전 러시아 보안국) 반부패 범죄수사부에 이준을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비밀리에! 이건 이준의 끄트머리를 잡아서 무너뜨리겠다는 전쟁 선언이었다.
‘아빠가 내 남자를 죽이려 한다면 아빠. 미안해요. 아빠가 키워준 고마움은 지옥에 가서 갚을게요. 허나. 이승에서 난 철두철미 내 남자의 편입니다.’
“알았어요. 차장님.”
“예. 국장님.”
“이 내용은 철저하게 극비 사항으로 다루세요.”
이 내용을 절대 노출하지 말라는 지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세요.”
“충, 성!”
정보 차장이 나가자 사라는 버튼을 하나 눌렀다. 그리고 5분 정도 되자 CFSB의 7처장이 들어섰다. 7처는 암살, 테러, 요인납치, 대테러 방지 등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다.
“불렀습니까? 국장님.”
“차장님. 이 명단에 있는 자들을 모두 처리하세요.”
사라가 USB를 주었다.
“알겠습니다. 충, 성!”
7처장이 USB를 가지고 갔다.
저 USB에는 시베리아경제특구에 숨어 있는 러시아 보안국의 첩자들 명단이 들어있다. 첩보계란 부서가 달라도 적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사라는 그동안 시베리아보안국 방첩과가 비밀리에 알아낸 러시아 보안국의 첩자들을 모두 제거할 결심을 내린 것이다.
아빠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시베리아에 있는 모든 첩자가 이준이 하루에 몇 번 소변을 보며 몇 번 대변을 보는 것까지 조사할 것이다.
그것을 막으려면 간단하다. 첩자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내 남자를 건드릴 수는 없다!’
창가에 서서 이르쿠츠크의 전경을 내다보며 사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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