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나이트클럽에서
“당신은 그대로 플랫넘 엠파이어”그룹 회장으로 살면 된다. 대신 내 지시는 받아야겠지, 할 수 있나?“
"가족만 살려준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오늘 밤 죽은 저자들은 여기 온 적 없다. 내 말 뜻 알겠나?"
"예."
"그리고 내일, 비자금을 회수하려 CFSB 국장이 올 것이다. 네가 진심으로 투항했다면 잘 협조하기 바란다.
참고로 말해주자면 CFSB 국장은 성격이 사납다. 그녀 앞에서 머뭇거리다가는 혼쭐이 날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협조하는 것이 좋을 거야!"
‘대체 이자는 누구지?’
시베리아정보국인 CFSB 국장을 수하로 부리는 자,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한 가지 물어도 됩니까?"
"내 정체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난 시베리아경제특구 의장 아르진이다.”
이준이 헬멧을 벗자 모하메드 바크리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시베리아의 마피아들은 경제특구 의장은 별로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머리 좋은 애송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 때문에 의장 같은 것은 위험인자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의장은 무서운 자다!'
500명의 적이 있는 이곳에 겨우 20명의 대원과 함께 공격해온 의장이다.
그런 자가 무엇을 못 해낼까?
이제 겨우 20살 정도로 보이는 해맑은 얼굴의 이준을 보며 모하메드 바크리는 생각했다.
'어쩌면 로스차일드 가문에 진정한 맞수가 나타났는지도···.'
세계를 쥐고 흔드는 로스차일드 가에 대적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했을 때 콧방귀를 뀐 바크리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의장은 결코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좋은 머리에 산악같은 배짱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닌 자다.
’잘하면 로스차일드가가 멸망하는 것을 볼 수 있을 지도···.‘
일개 가문이 전 세계를 좌우지하는 것을 보며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하메드 바쿠리다. 하지만 그들의 힘에 전 세계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움츠러들었다.
살아남으려면 그들의 손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흥미진진하다. 진정한 적수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
그날은 날씨가 한없이 포근한 날이었다. 이준은 저 앞에 각종 네온등이 번쩍이는 나이트클럽 <우란노브>가 보이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는 급히 따라오는 경호장 아나톨리에게 말했다.
“오늘은 자유롭고 싶네, 알겠나? 아나톨리.”
그런데 이준의 목소리는 같지만,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번에 금강석 연구소에서 다섯쌍둥이는 인간의 얼굴 가죽과 똑같은 면구(面具)를 만들었다.
언젠가 이준이 의장이란 직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연구하여 만든 면구였다.
역시 다섯 쌍둥이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꾸면서도 온갖 표정 변화가 그대로 나타나게 했다.
게다가 20대 초반의 얼굴이고 또 다른 것은 흠잡을 데 없는 미남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그것을 선물로 받은 이준은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술도 마시고 놀기도 하고 싶었다.
“예. 각하. 경호원들이 경호한다는 인상을 절대 주지 않겠습니다.”
“그래 주면 좋겠네!”
이준은 머리를 끄덕이고 눈 위를 걸어갔다. 하얀 눈이 가득 쌓여 걸을 때마다 빠드득, 빠드득하는 소리가 참 기분 좋게 들린다.
이준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우란노브에 온다.
하지만 다른 얼굴로 오기는 처음이다.
우란노브는 바이칼 호수 쪽으로 휘어져 나간 거대한 바위를 깎고 그 위에 지운 바와 나이트클럽을 합친 형태이다.
그 때문인지 2층은 식당이고 1층은 반원형의 거대한 바이고 가운데의 홀은 춤추는 곳이다. 이곳은 청춘의 열정과 낭만이 하룻밤의 짧은 시간 동안 폭발하는 곳이다.
이준도 청춘이다.
그라고 왜 스트레스를 풀고 하루쯤 긴장을 풀고 일반 청년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그래서 이준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고급스러운 우란노브에 오군 했다.
이곳에서 어떤 날은 각테일을 마시며 남들이 춤추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름다운 여인과 춤을 추기도 했다.
하지만 시베리아경제특구 의장이라는 얼굴 때문에 마음껏 놀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맘껏 놀고 맘껏 부어라 마셔라 해도 그냥 20대 초반의 일반 청년일 뿐이다.
이 우란노브는 이르쿠츠크시의 최고급 엘리트들이 출입하는 곳이란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고급스럽고 묵직한 기운이 풍기는 곳이다.
이준이 혼자서 우란노브에 들어섰다.
그러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덩치들이 재빨리 이준의 옷을 살폈다.
프랑스산 재킷과 이탈리아 명품의 청바지. 코트는 한 벌당 1천만 원이나 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다. 시계와 구두까지 본 그들은 놀랐다.
이준이 입은 옷들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범하다. 하지만 그 가격으로 말하면 최고급 승용차 한 대값보다도 더 많은 돈이 든 옷들이다.
'호구다!'
처음 나타난 호구! 아마도 어느 졸부의 아들일 것이다. 덩치의 허리가 구십도로 굽혀졌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하지만 이준은 아무 말도 없이 각종 네온등 불빛이 레이저처럼 비추는 홀에서 넘실거리는 청춘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격스러웠다.
회귀한 이후 이렇게 편하게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다.
'우리 꼬마들에게 특별 보너스를 두둑이 줘야겠어! 기특한 녀석들!'
일단 이준의 발걸음은 바로 향했다.
그곳에 앉자 바텐더가 재빨리 다가와 인사를 하며 물었다.
“무엇을 드릴까요? 사장님.”
“헨리 4세 도듀농 있나?”
“컥!”
바텐더는 그만 숨을 들이켜다가 걸려서 꺽꺽거렸다.
헨리 4세 도듀농은 한 병에 한화 22억 6,900원을 하는 술이다.
그걸 불렀으니 바텐더의 숨구멍이 막힐 만도 했다.
잠시 후에야 겨우 숨을 돌린 바텐더가 이준에게 물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그 술은 우리 바에 없습니다.”
“그래? 그럼 아르망드 브리냑은 있나?”
'오, 마이 갓, 이 어린 새끼의 신분이 뭐길래?'
바텐더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르망드 브리냑도 병당 한화 3억 1,198만 원짜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르망드 브리냑은 있다는 것이다.
“예, 사장님,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잠시 후, 아르망드 브리냑을 든 바텐더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행복한 밤이 되십시오, 사장님.”
“고맙다.”
이준이 주머니에서 대충 지폐 꺼내 한 장을 바텐더 앞에 내놓았다. 팁이다. 그런데 암만 봐도 백 달러짜리다. 눈이 커진 바텐더가 허리를 구십도로 꺾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밤이 새도록 사장님의 바텐더가 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고. 이봐. 자네 이름이 뭐지?”
“예, 제 본명은 카라한입니다. 사장님!”
“몽골인인가?”
“아닙니다. 만주족입니다.”
“카라한, 저기 앉아 있는 여자, 잘 아나?”
이준이 바의 끝 쪽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는 미모의 동양여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상당히 아름다운 글래머였다.
“아, 저 여자는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오는 여자입니다. 사람들과 상대하지 않아서 이름은 모르겠고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과 토요일만 와서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갑니다. 사장님.”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과 토요일만이라···.”
그날은 이준이 오는 날이다. 하지만 이준도 꼭 그날 무조건 오는 것이 아니라 안 올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저 여자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저 여자도 나처럼 구경만 하다가 가는 여자인가?'
그때 바텐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과 합석 시켜 드릴까요?”
“그거 쉬울 것 같지 않은데 가능하겠나?”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한번 해보죠. 뭐!”
상당히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바텐더다. 이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해보게.”
“예, 사장님.”
그때였다. 이준은 서너 명이 앉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 그녀를 주시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촤르르~
이준의 눈이 자동으로 그들을 줌인시켰다. 그러자 다섯 명의 얼굴이 확장되어 보였다.
술기운에 불깃불깃해진 얼굴, 두 눈에서 드러나는 넘치는 욕망! 저건 분명 저 여자를 품고 싶은 색욕이다.
그때 바텐더 카라한이 술잔을 들고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아르망드 브리냑을 섞어 만든 칵테일이다.
“아가씨. 저기 앉아 있는 분이 아르망드 브리냑 각테일을 보내셨습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춤 판을 바라보던 여인이 각테일을 보고는 이준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그녀가 간단하게 머리를 숙여 목례를 보냈다. 고맙다는 표현이지만 합석은 원치 않는다는 명백한 표현이다. 이준은 저로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괜찮은 여자군.’
이준이 그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입에 가져갈 때였다. 계속 그녀를 힐끔 거리던 다섯 명이 앉아 있는 탁자에서 한 명이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성큼 걸어갔다.
“아가씨. 우리 보스께서 아가씨를 보자 하십니다.”
“보스?”
“예. 저기 앉아 있는 분이 우리 보스이십니다.”
다섯 명이 앉아 있는 좌석에는 모두 한 명씩 창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보스라는 자만이 여자가 없이 자기를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역겨워!”
“예? 뭐라 하셨습니까?”
그녀를 데리러 왔던 똘마니가 잘못 들었나 해서 물었다. 하지만 여인의 눈빛은 이미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역겹다고!”
“뭐, 여, 역겨워?”
똘마니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인의 반응에 멍해졌다.
그의 보스는 울란우데의 마피아인 <누 클리어 피스트(핵 주먹)>의 보스이다.
원래 이르쿠츠크 쪽에는 잘 오지 않는 울란우데 마피아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르쿠츠크 마피아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이름 높은 이곳 우란노브에서 하룻밤 즐기고 가려고 왔다.
그러다가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누클리어 피스트로서는 기분이 붕 떴다.
지금까지 그는 맘에 드는 여자는 품지 못한 여자가 없다. 그 여인이 처녀든, 유부녀든, 대학생이든 소녀든 상관이 없었다.
그 누가 울란우데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누클리어 피스트에게 대적한단 말인가?
그런데 방금 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핵폭탄급 발언을 했다.
역겹다고! 똘마니의 얼굴이 삶은 돼지 간처럼 불깃해졌다.
“네, 네년이 감이 우리 보스를 역겹다고 했나?”
“응, 역겨워. 그러니 더 냄새 풍기지 말고 꺼져라.”
여인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다.
“이, 이···.”
너무 기가 막혀서 손가락질만 하던 똘마니의 손이 획 날아들었다.
그녀의 목을 잡으려는 행동이다.
한데 여인은 침착하게 날아드는 손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잡힌 손의 팔꿈치를 슬며시 잡고 순간적으로 반대로 굽혔다.
꽈드득.
“끄악!”
팔이 반대로 꺾였다. 팔목이 탈구되었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네, 네년이 감히. 으으윽!”
“꺼지라고 했잖아.”
아름다운 여인은 여전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와르르 일어선 누클리어 피스트 마피아들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것을 본 여인이 피식 웃었다.
“이젠 떼로 덤비냐? 니들, 다신 남자라고 하지 마라.”
여인의 일갈에 누클리어 피스트 마피아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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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인연. >
“노란 원숭이 년이 제법이군, 그년을 잡아서 내 앞에 꿇려라.”
누클리어 피스트의 보스 아갈로 라로프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내린 명령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앞에서 계집들이, 그것도 동양 계집이 저리도 당당하게 맞서는 것을 처음 보았다. 흥미보다도 분노가 더 먼저 일어났다.
그는 슬라브족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민족 제일주의자다. 그건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그러했는데 아버지도 그랬고 그 영향은 아갈로 라로프까지 잠식했다.
그로서는 동양 원숭이 같은 계집이 맞서는 것을 두고 볼 만큼 마음이 넓지 못했다.
‘쌍년, 예뻐 봐야 동양 원숭이다. 그냥 하룻밤 노리개로 쓰고 부하들에게 던져 준다!’
이것이 아갈로 라로프의 속셈이다. 그도 지금 맞선 여자가 매우 아름다운 동양 여자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더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그의 이념대로라면 인간계에서 가장 용맹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머리가 좋은 것은 백인이어야 한다.
한데 저년은 동양의 노란 원숭이인데도 미모가 백인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기품도 있었고 깡패들에게도 굽힘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 반드시 잡아 먹어야 했다. 지금 이 나이트클럽 안의 모든 백인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뭐해? 당장 그년을 꿇리지 않고.”
그가 부하들을 다그쳤을 때였다. 바 쪽에서 한 명의 남자가 말했다.
“어이, 언제부터 누클리어 피스트 마피아가 여인 한 명에게 떼로 덤벼들었지? 내가 누클리어 마피아를 잘못 알고 있었나?”
“누구냐?”
갑작스러운 상황에 라로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사실 오늘 밤 있은 일이 세상에 새어나가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동양인에게, 그것도 동양 여자에게 누클리어 피스트 마피아가 집단으로 덤볐다는 말은 절대 새어나가면 안 된다.
라로프의 사나운 눈빛이 바에서 말하는 자 쪽으로 돌아갔다. 웬 남자다.
아래위 검은 정장을 입은 그자는 그냥 바 앞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내 정체를 밝히는 거야 쉬운 일이지.”
그리고 사내가 돌아앉았다. 순간, 네온등 불빛에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내는 잘생긴 동양인 남자였다.
그것도 겨우 18~19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 청년이다.
“네놈은 어디 소속이냐?”
“나?”
이준이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난 저 아가씨의 보디가드다.”
“뭐, 뭣이?”
보디가드는 분명 아니다. 만약 보디가드라면 애초에 나섰을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 혈기에 이른바 정의를 실현하려고 나선 것이 분명하다. 넌 그 혈기 때문에 오늘 뒈진다.
“좋아. 네가 저 계집의 보디가드라면 어디 막아봐라.”
철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갈로 라로프가 권총을 뽑아 요란하게 장전했다.
그러자 나이트클럽 전체가 조용해졌다. 총은 아이가 쏴도 맞으면 죽는 법이다.
그러니 조용해질 수밖에, 하지만 이준은 아니었다.
“너 진짜 쪽팔린다! 보스라는 놈이 맨손인 사람에게 총을 뽑냐? 아유, 빙신.”
순간, 아갈로 라로프는 분통이 터졌다. 그도 자기가 권총을 뽑았다는 것이 실수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상대는 이제 20살이 되었을까 말까한 애송이, 그것도 동양 애송이었다.
“죽어, 이새꺄!”
타앙~
핏핏핏핏~
총소리가 울렸다. 순간, 사람들은 보았다.
총성과 함께 동양 남자가 서 있던 곳부터 아갈로 라로프에게까지 수십 명의 동양 남자가 생겨나는 것을!
그건 정말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때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악.”
꽈당~
그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동양 남자가 무슨 비눗방울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미 동양 남자는 울란우데 마피아 보스를 덮쳤고 그의 몸을 잡아 바닥에 태질한 상태였다.
그때야 사람들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잔영. 그건 잔영이었어!’
물체가 너무 빨리 움직이면 인간의 눈은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
그 때문에 시야에 잔상을 보게 된다.
방금 수십 명으로 나타났던 동양인 남자는 너무 빨라 시각이 착시현상을 일으킨 사람의 잔영이었다.
‘맙소사!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이다. 그들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이었다.
“그따위 허접스러운 총질로 나를 죽이겠다고? 네놈은 좀 맞아야겠다!”
어리디어린 동양 청년은 육중한 몸의 아갈로 라로프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었다.
“아, 안돼!”
아갈로가 청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준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육중한 몸의 아갈로가 이준의 머리 위까지 쳐들렸다가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콰앙~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아갈로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을 본 마피아들이 품속의 권총을 잡았다.
그때 이준의 섬뜩한 말이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부터 총을 뽑는 자는 무조건 쥑인다.”
쥑인다! 쥑인다! 쥑인다!
큰 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다. 낮은 목소리로 그냥 힘을 주어서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소리에 다섯 명 경호원들의 행동이 일시에 멎었다.
그만큼 그들은 이미 공포로 이준에게 심령이 제압된 상태였다.
거기에 협박이 가해지자 정신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본능이 눈을 뜬 것이다.
덤비지 말라고, 지금 덤비면 죽는다고, 몸의 주인에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것은 살모사 앞에서 개구리가 온몸이 굳어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보스가 저렇게 되었으니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순간이다.
핏핏핏~
젊은 동양 청년이 순식간에 여인의 앞에 나타났다. 여인은 깜짝 놀랐다. 이준이 다짜고짜로 그녀의 손을 잡더니 냅다 달렸기 때문이었다.
“뭐, 뭐에요?”
“뭐긴 뭐예요? 도망치는 거지!”
이준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마피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서라. 안 서면 쏜다.”
“병신, 니들 같으면 서겠냐?”
탕탕탕탕~
총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이준과 여인은 캄캄한 어둠 속을 달려가 차에 탔다. SUV다.
부르릉~
차 시동이 걸리고 순식간에 현장을 벗어났다.
곧 아우성치는 소리, 총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시창 밖으로는 진한 어둠이 깔려 있고 흰 눈이 얼핏얼핏 지나간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오늘 큰일을 당할 뻔했는데···.”
여인이 아직도 가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 통성명해요, 보디가드가 지키는 사람의 이름도 모르면 안 되죠. 난 이준이에요. 특구 의장님의 경호원이고요!”
이준이 자기 이름을 알려주었다. 사실 이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의 러시아 이름은 아르진 리이기 때문이다.
사라 푸틴도, 디나 쿠르바코바도 아르진 리라는 이름만 알지 이준이라는 이름 존재 자체를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여인은 자기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 첫 여자다.
“난 강소라예요.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의장님의 경호원이라고 했나요?”
“예. 맞아요!”
“그래서 싸움 솜씨가 뛰어나군요!”
“뭐, 제가 좀 싸울 줄 알긴 하죠. 하하!”
이준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자 강소라가 말했다.
“난 교육국장 비서실의 비서예요!”
강소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녀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이준은 알 수 있었다. 강소라가 비서실에서 일하는데 뭔가 있단 것을!
사실 강소라는 이화여대 비서학과를 졸업했기에 국정원에서도 그녀가 의장 이준의 비서실에 채용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뜻밖에도 교육국의 비서실로 채용되었으니 맥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사표를 내고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특구 의장에게 접근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국정원에서는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란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면서···.
‘가만, 이 사람은 의장의 경호원이잖아? 이게 혹시 하늘이 주는 기회가 아닐까?’
강소라는 슬쩍 이준을 보았다. 기껏해야 20살 정도! 자기보다 5살은 아래인 것 같다. 하지만 잘 생겼다.
또 싸움도 진짜 잘한다. 아니, 싸움에서는 그 누구도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쌈꾼이다.
허니 특구 의장의 신임을 받고 있지 않을까?
“이준씨는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해요? 혹시 의장 경호원들은 모두 그렇게 싸움 수준이 높아요?”
“아뇨. 제가 좀 특별하죠. 뭐, 그래서 의장님의 비밀 경호원이 되기도 했고요!”
“비밀 경호원이요?”
“음, 이건 비밀이긴 한데, 전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경호해요. 경호원들도 제 정체를 모르게요. 오직 의장님만 내가 주위 어딘가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을 알죠.”
“아, 대단하네요!”
‘그래. 이 사람이다!’
강소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특구 의장에게 접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의장의 신임을 받는 비밀 경호원과 친해서 그를 징검다리 삼아 의장에게서 점프해야 한다고 강소라는 생각한 것이다.
“소라 누님은 집이 어디예요?”
“워스토츠카 8번지 316호에요.”
“그럼 속도를 냅니다. 꽉 잡으세요.”
부응~
SUV가 맹렬한 속도로 시내를 질주해갔다.
이준과 강소라!
운명의 구슬은 꿰기도 힘들지만, 운명이라면 오히려 쉽게 꿰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준과 강소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
모스크바 FSB 장관 집무실.
조용한 집무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시베리아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따라서 시베리아경제특구 의장 아르진 리는 더욱더 시베리아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시베리아 경제특구와 러시아 간의 생활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시베리아 근로자의 평균 월급은 한 사람당 150달러, 즉 750루블입니다.
그런데 러시아 본토의 근로자는 평균 월급이 50달러, 250루블이며 높은 월급을 받는 근로자가 100달러, 500루블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러시아 본토의 근로자들은 어떡하든 시베리아의 기업들에 취직하려고 하고 있으며 본토의 월급 수준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만약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시베리아경제특구는 러시아 본토보다 생활 수준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특구 의장 아르진 리는 300만 개의 중소기업을 만들고 그 뒤를 밀어주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많아지니 모든 부품이 대기업들로 이전되고 10개의 대기업은 예전 소련 시대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제품들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 대만과 홍콩,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들이 시베리아와 합자회사를 세우려고 합니다.
이 상태로 시베리아경제특구가 계속 발전하면 결국 우리 러시아 본토와 다른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음. 다른나라라···.”
푸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푸틴은 원래 소비에트 시대의 강력한 러시아를 추종하는 사람이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소비에트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자본주의 러시아가 되었다. 거기까지는 상관없다.
자본주의든 소비에트든 러시아가 강하면 되니까! 하지만 러시아는 너무 약해졌다. 세계를 두고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은 이미 없어졌다.
그런데 시베리아까지 떨어져 나가면 러시아의 미래는 없다.
“아무래도 아르진 리를 제거해야겠군!”
푸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