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면담.
이 당시 세계 땅덩어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련연방 공산당 총서기와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다.
원래는 소련연방 공산당 총서기가 러시아공화국과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소련연방 공화국들의 최고 수장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연방 총서기에 집권하자 냉철한 눈으로 소련의 현실을 돌아봤다. 반세기 이상의 냉전 동안 미국을 위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무섭게 발전했다.
미국, 영국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2차 대전에서 패전하여 폐허가 되었던 일본도, 8.15 광복과 함께 남북으로 갈라졌고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도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며 아시아의 용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같은 한반도에 있고 같은 민족이면서도 북한은 1945년 광복 후, 일제가 물려준 경제 상황에 정지되어 있었다.
설마 같은 한민족인데 북한은 쓰레기들만 모이고 남한은 수재들만 모였을까?
고르바초프는 그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국은 정치는 공산당 체제는 그냥 두고 경제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각 국가에 이른바 “죽의 장벽”을 허물고 개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1930년대 경제 상태로 머물러 있던 중국이 불과 10년 동안에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그것을 보면서 고르바초프는 확신했다.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획경제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그는 그 유명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개방)정책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소련은 철의 장벽을 열고 개방을 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중국은 개방했을 때 생산과 물가의 가장 기초인 농업을 먼저 변화시켰다.
즉 농민들에게 토지 사용권을 물려준 것이다. 물론 땅은 국가의 땅으로 여전하지만, 농민이 무슨 농사를 짓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 땅에서 생산된 작물에서 세금만 내면 나머지는 농민들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농지개혁 1년 만에 중국 인구의 80%에 달하는 농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쌀이 없어 굶어 죽어가던 도시의 시장마다 쌀이 넘쳐났다.
중국은 그렇게 농민들부터 개방의, 자본주의 시장의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노동자가 80%였고 농민은 불과 20%였다. 농민들에게 땅을 주어도 그들이 지은 농사만으로는 러시아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또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자 농민들은 농사를 팽개치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소련 체제 거의 100여 년 동안 농민들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
농민의 자식은 오직 농촌에서만 일하고 결혼하고 살 수밖에 없는 체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방하면서 민주화가 부분적으로나마 실행되어 농민들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실현되었다.
그러자 자식들까지 대대로 농사만 짓는 일에 피눈물을 흘리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도시로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공산당 정치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어지니 전 소련 국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고 도시의 흘레브(러시아인의 주식인 식빵)가 바닥이 났다.
이렇게 되자 제일 먼저 연방공화국들이 탈퇴를 선언하고 독립했다. 자기들만의 나라라면 소련처럼 굶어 죽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러시아공화국의 수상으로 옐친이 올라섰다.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경제 민주화와 함께 정치 민주화였다.
그 바람에 소련연방 공산당 총서기 고르바초프와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이 충돌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중국식 개혁 개방, 즉 공산당이 계속 소련을 통치하면서 경제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면서 소련 전체가 혼돈에 빠지자 옐친은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자유시장화를 주장했다.
그리고 소련연방 공산당 총서기 고르바초프의 공산당 결정을 무시하고 러시아공화국의 기업들을 모두 민영화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러시아는 하루아침에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변했다. 그 과정에 무수한 비리들이 생겨났고 부정부패가 전 러시아를 뒤덮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옐친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들은 공산당 정치의 철권 통치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오랫동안 공산당의 무자비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직접 겪은 세대이기 때문이었다.
옐친은 1,709만km2(한반도의 78배, 미국의 1.8배), 세계 최대 영토와 1억 4,674만 명의 러시아공화국인들을 믿고 시장경제 체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니 공산당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경제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만들려던 고르바초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1억 4,674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공산당을 때려잡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1917년 10월의 공산주의 혁명이 이번에는 자본주의 혁명으로 불붙을 수 있었다. 하여 고르바초프는 옐친의 경제 민영화 정책이 실패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옐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집무실.
“그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은행들이 모두 이 아르진 리라는 자에게 넘어갔군! 맞나?”
“예. 대통령 각하!”
옐친의 물음에 총리가 대답했다.
지금 집무실에는 총리와 러시아정보국장, 러시아 산업부장관, 러시아농업부장관, 모스크바시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시장, 러시아 경찰청장, 러시아군 의장, 러시아재정부장관이 모여 앉아 있었다.
“정보국장. 아르진 리라는 인물의 자료가 있나?”
“예. 각하.”
러시아정보국장 데니스 시베도프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서류를 펼쳤다.
“아르진 리. 26세. 시베리아 울란우데 출신, 부, 고려인 세르게이 리. 모, 갈랴 지모예브나. 슬라브족.
모스크바 종합대학 경영학과 졸업, 개방 초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중국국경무역을 하여 종잣돈을 벌었으며 후에 아르진 리가 그 돈으로 금광을 개발하였다고 함.
현재 그의 자금은 약 300억 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각하.”
“흠, 300억 불이라! 금광의 금 생산이 그렇게도 많은가?”
옐친이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는 금광에서 나오는 금을 팔아 달러로 변환합니다. 그돈으로 중국과 우크라이나에서 밀과 쌀, 양파와 양배추, 감자와 고추, 등 모든 채소와 과일을 수천대의 화물열차로 들여와 시베리아와 모스크바, 상트베테르부르그를 비롯한 각 도시에 판매합니다.
그러니 엄청난 돈을 벌 수밖에 없습니다. 각하.”
“그렇군. 그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자가 무역으로 들여오는 식량과 고기, 채소와 생필품이 아니면 모스크바에 폭동이 일어나도 열 번은 일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지! 그때 비서실장이 보고했던가?”
“예. 사실이 그렇습니다. 각하.”
비서실장이 일어나 확인을 해주었다. 옐친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고려인에 어머니는 우리 러시아인이라! 원래 고려인이 온갖 고난에 강하지!”
“예. 그렇습니다. 또한 고려인은 러시아를 배신한 적도 없습니다. 각하!”
“맞아. 어디서나 정착하고 끈질기게 후예들을 생산하는 민족이야. 그들은···.”
옐친이 손가락으로 톡톡 탁자를 치다가 물었다.
“재정부장관. 지금 우리 정부에 돈이 얼마나 있나?”
“180만 5,732루블입니다. 각하.”
그의 대답에 옐친도 다른 모든 참석자들도 입을 딱 벌렸다.
1억 4,674만 명의 인구가 사는 러시아공화국의 재정부에 돈이 겨우 180만 5,732루블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이다.
“화폐를 더 찍어내면 어떤가? 재정부장관.”
“지금 상황에서 화폐를 더 찍어내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것입니다. 각하.”
“음!”
인플레이션이란 물가의 꾸준한 상승, 통화량의 확대, 화폐가치의 하락 현상을 의미한다. 인플레이션이 작용하면 노동자의 삶이 급전직하로 떨어진다. 왜냐하면 물가의 값은 오르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무역수지가 적자를 형성하게 되고 사람들이 은행에 저축하지 않기에 은행에 돈이 없어 파산하게 되는 악순환이 꼬리를 물게 된다. 결국 나라의 경제는 파탄이 나고 파산하게 된다.
옐친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옐친의 수석비서가 들어와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옐친이 놀라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지금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각하.”
수석비서가 나갔다. 그러자 옐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가 방금 말하던 아르진 리가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네. 해서 내가 들여보내라 했어!”
그러자 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사실이네! 그런데 왜 면담을 신청했을까?”
옐친의 고민 어린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아르진 리는 대통령까지 면담할 이유가 없다. 이미 300억 불의 재산가고 현재 운영하는 공장들도 재벌급이다.
그는 대통령을 만나지 않고도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르진 리(이준)가 비서와 함께 들어섰다.
“각하. 제가 면담을 신청한 아르진 리입니다.”
그러자 옐친이 눈짓으로 자기 앞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와서 앉게.”
“감사합니다.”
이준은 방안의 모든 사람이 뚫어지게 바라보는데도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런 이준을 흥미로운 눈으로 보던 옐친이 물었다.
“아르진 리, 그대는 러시아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부자이네. 그런데 대통령인 나를 만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러자 이준이 대답했다.
“예. 저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이 돈은 개방을 하고 개인 사업체를 만들게 대통령 명령을 내린 각하의 덕분입니다. 이전 소련 체제라면 제가 재산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부를 하나? 아르진 리!”
“아닙니다. 나는 각하께 제안을 하려고 왔습니다.”
“제안?”
“예. 각하. 제게 화폐를 찍을 권리와 동방 무역의 독점권을 주십시오.”
“독점권?”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전 러시아에 들어오는 무역품 중에 러시아인들이 싸게 사서 입을 수 있는 옷이 바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각종 옷이다.
비록 제품의 질은 낮지만 지금 당장은 러시아인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은 중국제뿐이다. 러시아의 의류산업은 파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점권을 준다면 이건 특혜다.
“내가 특혜를 주기 바라는가?”
“예. 대신 군대와 경찰, 검찰, 법무부, 그리고 국회의 상하 양원 의원들의 월급을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헉!’
옐친은 표정이 확 변했다.
사실 그가 제일 난감하던 것이 바로 군대와 경찰, 검찰, 법무부였다. 그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니 당연히 자기 손에 장악할 수가 없다.
현재 러시아공화국의 군대는 90만 명, 경찰은 40만 명, 검찰은 1만 명. 법무부는 2천 명이다.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월급만 내주어도 옐친의 권위는 비할 바 없이 높아질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면 그들은 옐친에게 충성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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