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스위스.
“모스크바 종합대학 회계학과에 다니는 디나 쿠르코바입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디나 쿠르코바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녀의 등에서 찰랑거리던 금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려버렸다.
그녀가 허리를 펴는 순간 반쯤 가려진 머리카락 사이로 발그스레 상기된 얼굴이 나타났다.
이준은 흠칫했다. 그리고 그녀의 빼여 난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준은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집이 어디요?”
“레보베레즈니거리 196번지에 있습니다.”
"그렇군!"
여기서 한참 멀다.
“저기, 절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기대에 찬 눈으로 이준을 올려다 보았다.
“갑시다.”
이준은 그녀를 바래다 주는 것이 싫지 않았다. 어쩐지 데려다 달라는 그녀의 말이 기분 좋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음 한쪽에 말 못 할 남자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준은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레보베레즈니거리는 모스크바 북부 행정구에 속한다. 이곳은 소련 시대 달에 가는 우주로켓을 연구한 곳이며 그 후 소련 시대 내내 인공위성에 장착할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각종 반도체 전자공업의 중심지였다.
중대형기업이 3,210개. 소형 사업체가 4만 개가 있는데 전자반도체 부문과 아에로플로트항공기 전자반도체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들도 이곳에 있다.
디나의 집이 있는 196번지는 공업지구를 40km나 벗어난 튜틴산 앞에 있는 번화가였다.
“저기 산기슭에 저의 집이 있어요!”
디나가 이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기까지 부탁한다는 무형의 표시였다.
“앞장서세요.”
한 30분 걸었을까? 번화가의 뒤로 2,000미터쯤의 튜틴산 기슭에 고택이 한 채 보였다. 이준이 자세히 보니 제정러시아시절의 설계로 건설한 장원이다.
이런 집을 소유한 자는 제정러시아시절 귀족들이었다.
1917년 “공산당”의 혁명이 일어나 이런 귀족들의 집들은 몰수되었고 공산당의 정부 기관이나 공산당 간부들의 저택이 되었었다.
물론 귀족 가족들은 남녀노소 모두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굶주림과 병마로 죽었다.
소련이 해체된 후 밝혀진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1,080만 명에 달한다.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 정부는 1917년 공산당을 반대해서 싸운 제정러시아제국의 장교들과 병사들에게 위로금과 훈장을 지급했다.
또 아직 살아 있는 귀족의 후예들이나 상인 등의 후예들에게는 저택들을 돌려주었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군!’
이준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 걸었다.
“아가씨. 차도 없이 걸어옵니까?”
대문 앞에 당도하자 검은 정장들이 달려 나와 호들갑을 떨면서 곁에 서있는 이준을 힐끗 거렸다.
“그렇게 됐어요.”
몸을 돌린 디나가 말했다.
“저기. 잠시 집에 들어갔다가 가시면 안 될까요?”
“미안, 선약이 있어서 난 이만 가겠소.”
이준이 몸을 돌리자 당황한 디나가 급히 이준의 앞을 막아섰다.
“그럼 이름하고 주소지라도 가르쳐 주세요.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을 바라보던 이준이 말했다.
“도움을 받고 싶어서 아가씨를 도와준 것이 아니오. 그럼 이만.”
“자, 잠시만요!”
디나는 급히 이준의 앞을 가로막고 따라온 검은 정장의 사내에게 말했다.
“경호 대장님. 빨리 내 방에 가서 핸드폰을 가져오세요, 빨리.”
“예, 아가씨!”
경호 대장은 이준을 못마땅하게 흘깃 보고는 달려갔다. 핸드폰은 1983년 모토로라 회사가 출시한 휴대용 전화(벽돌폰)가 휴대폰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벽돌폰은 크기도 컸고 무게도 무거웠다. 게다가 가격은 4,000달러로 우리 나랏돈으로 환산하면 450만 원이었다.
이건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따라서 이 첫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정점에 있거나 재벌들, 또는 잘사는 계층들이었다.
그런데 경호 대장이 가져온 핸드폰은 벽돌폰이 아니라 노키아가 만든 작은 휴대폰이었다.
노키아는 모토로라의 일반적인 휴대용 전화가 아니라 핸드폰으로서의 첫발을 뗀 휴대폰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가볍고 작고 디지털디스플레이가 들어 있는 핸드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키아는 1991년에 출시되는 것이 아닌가?’
분명 그랬다. 원 역사에서는! 그런데 지금은 1990년 1월이다. 그런데 벌써 노키아 휴대폰이 자기의 눈앞에 있다.
‘이상하군! 역사가 달라졌나?’
이준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디나가 핸드폰을 이준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1월 3일에 출시된 신형 핸드폰이에요. 이 핸드폰을 사용하세요. 그리고 제 번호도 그 안에 있어요. 제 생명의 은인인데 이렇게밖에는 보답할 수가 없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고맙소. 그리고 내 이름은 이준이요.”
“아, 이준!”
몸을 돌린 이준이 걸어갔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이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디나가 소리쳤다.
“이준 씨. 잊지 않을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튜틴산에 메아리치며 울려갔다.
***
취리히는 취리히 푸른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호수, 취리히! 이곳은 경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취리히에 있는 수많은 은행에는 전 세계의 엄청난 돈이 잠들어 있다.
국민 일인당 GDP는 8만 9천 달러로 엄청나게 높은 월봉을 받는 곳이 바로 취리히시민들이다. 그런데 이런 높은 GDP를 유지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행이 돈을 많이 벌어들이기 때문이다.
취리히의 시민들 중 거의 37%가 은행원이라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그 때문에 취리히시민들은 외국인이 취리히에 오는 것을 대단히 반긴다.
취리히 라이히무트 뱅크.
5층 높이의 중세식 건물인 라이히무트 뱅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부가 황제의 집무실처럼 화려하고 멋지다.
이준이 내부에 들어서자 바로 문 옆에 있던 서있던 60대 중반의 노인이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고객님들의 안내를 맡은 안내원(an usher), 요엘 바스만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돈을 찾으러 왔소.”
”그러시군요.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60대 중반의 노인이지만 노련함이 몸에 뱄다. 손님이 불편할세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한눈에 안겨 왔다.
‘역시 황금과 서비스의 나라 스위스가 맞군!’
이준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이곳 라이히무트 뱅크에는 3천억 달러가 저축되어 있다.
여기서 돈을 모두 찾는다면, 아니, 다른 계좌번호로 바꾸고 비밀번호도 바꾼다면 미래의 역사는 달라질 것이다. 즉, 박광수가 돈을 찾았다고 해도 흔적 없이 증발할 것이다. 그것이 타임 이동에 의한 미래 역사의 변화다.
“어서 오세요. 계좌 실무과장 이렌 자코브입니다.”
“계좌를 바꾸기 위해 왔습니다.”
“여기에 계좌번호를 적어 주시겠어요?”
이렌 자코브는 이지적으로 생긴 밝은 인상의 30대 중반 여자였다. 그녀가 용지를 꺼내 이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나이나 이름, 국적 따위는 일절 묻지 않는다.
“예. 과장 이렌 자코프입니다. 예. 고객님을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차장님.”
전화를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준에게 말했다.
”저분을 따라가시면 고객님의 통장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기분 좋은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맙소!”
무뚝뚝하게 대답한 이준이 60대 중반의 안내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차장 카를로스 헤알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러자 안내원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사를 한 노인이 돌아설 때 이준은 50달러 지폐를 꺼내 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인이 환한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먼저 비밀번호를 말씀해주십시오.“
“더 레드 이던 블라섬드.”
그 말에 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맞습니다. 현재 우리 은행에 저축되어 있는 고객님의 돈은 3천억 불입니다. 그 돈에서 나오는 이자는 보관료로 우리 은행이 가집니다. 아시고 계시죠?”
세계의 은행들은 돈을 저축하면 많든 적든 이자를 받는다. 하지만 스위스의 은행들은 이자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저축해주는 대신 보관료를 받는다.
돈을 저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돈인지 절대 묻지 않고 무조건 저축해주며 그 누구에게도 저축한 사람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값으로 받는 돈이다.
이것이 바로 스위스 뱅크들로 전 세계의 돈이 몰려드는 비결이다.
“알고 있소!”
“돈을 전부 인출하시렵니까? 아니면 계좌나 비밀번호를 바꾸시렵니까?”
“카드를 발급받고 싶소, 언제, 어느 때, 어떤 은행에서든 무조건 돈을 찾을 수 있는 무한카드 말이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은 신속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3천억 불은 새로운 계좌에 새로운 비밀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준은 언제, 어느 때, 어떤 은행에서도 돈을 찾아갈 수 있는 무제한 신용카드“VVSIP”를 받았다.
이준이 여러 개의 은행을 돌며 돈을 확인하고 비밀번호와 계좌번호, VVSIP 카드를 받고 나자 어느덧 5월이 되었다.
저녁에 호텔에 앉은 이준은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990년대까지 저축된 달러가 금고에서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이젠 돌아가야겠군!”
지금 이준의 이름은 아르진 리였다. 그의 여권에 적힌 사람의 이름이다.
출생은 바이칼 부랴트 공화국의 울란우데, 아버지는 고려인이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인 슬라브족이다. 순수한 한민족의 혈통과 순수혈통의 러시아 슬라브족의 피가 섞여 만들어진 혼혈이다.
고등학교까지는 부랴트 공화국에서 다녔고 대학은 모스크바 종합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아르진 리는 16세 때 부모가 차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친척은 머나먼 8촌이나 9촌뿐이다. 하지만 “레드 프린팅 샵”이 이런 경력 때문에 이준을 아르진 리로 만든 것이 아니다.
아르진 리는 바로 이준과 생긴 것이 거의 유사했다. 붕어빵처럼!
그리하여 레드 프린팅 샵은 아르진 리를 귀신도 모르게 제거하고 이준을 아르진 리로 만든 것이다. 지금 진짜 아르진 리는 무거운 돌을 달고 모스크바강의 밑에 가라앉았다.
이준은 독일에 가서 성형수술을 받았다. 아르진과 비슷하다고는 하나 다른 점도 많다. 성형수술을 받은 지금 아르진의 모습은 이준과 똑 닮아 있었다.
1990년 5월 28일, 이준, 아니, 아르진 리는 러시아로 다시 돌아왔다. 엄청난 돈을 손에 쥐었다. 한개 나라를 살 정도의 엄청난 돈을! 하지만 목표를 잃었다.
과거로 온 이상 박광수에 대한 복수는 할 수 없었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하지?'
이준은 국제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오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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