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보닛.
바샤로프는 작은 골동품 가게의 주인이다. 그의 가게에는 오랜 골동품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리 중요치가 않아서인지 잘 팔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먹고살 수입은 되는 모양이다.
아내와 세 자녀를 부양하는 것을 보면···.
“어서 오세요. 무슨 골동품을 찾으십니까? 손님.”
늦은 저녁, 문을 닫으려 할 때 나타난 사람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애송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동양인 같고 어떻게 보면 러시아인 같다.
“여기 칭기즈칸의 황금 수저가 있다고 해서 왔소!”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던 바샤로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잠시 당황했던 표정을 급히 지우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 말했다.
“칭기즈칸의 황금 수저인지는 모르지만, 황금 수저가 여러 개 있긴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수저를 찾는 것입니까?”
“황금 수저의 가운데에 오색 보석이 박힌 것이오!”
그 말에 긴장했던 바샤로프의 얼굴이 부드럽게 변했다.
“아, 그 수저 말이군요. 그럼 들어오세요. 안에 보관하고 있거든요. 요새는 세상이 너무 험악한지라.”
주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나와 가게 문을 잠갔다.
“레드 프린팅 샵(붉은 인쇄점)은 어떻게 알았소?”
바샤로프의 한 손에는 어느새 뽑았는지 장전된 권총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애송이 청년은 흔들림이 없다.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옐로우 어새씬에서 왔다.”
청년의 말에 바샤로프는 권총을 내렸다.
“이거 비싼 고객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그리고는 아내를 불러 차를 가져다 앞에 놓았다. “옐로우 어쌔신”조직은 1985년에 만들어진 조직으로 암살을 주 수입으로 한다.
그들의 조직 구성원은 소련 시절 KGB의 킬러들이었던 “붉은 칼”의 부대원들이다. 원래 붉은 칼 요원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테러와 요인암살을 주로 담당했던 극비의 부대원들이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고 KGB마저 해산되자 그만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살기 위해 “붉은 칼”들은 조직을 만들었고 정치적 적수를 제거하거나 마피아들의 수뇌들을 암살했다.
또 “올리가르히( 소련 해체 후 생겨난 신흥 재벌들)”들의 경제 전쟁에서 상대편의 주요 간부들을 암살하는 청부도 받아들였다.
그런 관계로 정체가 탄로 나면 외국으로 도망쳐 한동안 숨어 있어야 한다. 그 때문에 “레드 프린팅 샵. (붉은 인쇄점)”과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레드 프린팅 샵”은 각종 증명서와 여권 위조, 정치적 서류부터 재벌전쟁의 계약서들까지 똑같이 위조하는 전문가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을 요구하십니까?”
“내 러시아 신분증과 여권이오. 아주 확실한 신분증 말이오.”
확실한 신분증이란 것은 진짜 러시아인으로 필요하다면 죽여서라도 신분증과 여권을 만들어주는 것이 “레드 프린팅 샵”의 방식이다. 대신 값은 엄청 비싸다.
“그런 조건이라면 10만 불입니다. 선금으로 5만 불. 신분증과 호적, 여권을 받을 때 나머지를 입금해야 합니다.”
“그러지.”
사내는 군말 없이 가방을 열고 달러 다발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정확히 5만 불이다. 그것이 어려 보이는 이 사내가 “옐로우 어쌔신”조직원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럼 사진을 찍고 보름 후에 오시면 됩니다. 고객님.”
“알겠소.”
사진을 찍고 난 청년이 가게를 나섰다. 그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가다가 미행이 없는 것을 알고서야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모호바야 거리 46번지!”
“예. 출발합니다.”
택시가 눈으로 덮인 도로 위를 맹렬하게 달려갔다. 젊은 사내는 바로 K301호, 이준이다. 자신이 47년 전의 과거로 왔다는 것을 이곳에 도착한 후,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알았다.
식당에 걸려 있는 달력이 1990년 1월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여러곳에서 확인해보고서야 진짜 1990년, 그러니까 2037년부터 47년 전의 과거로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이제 자기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준은 과거로 회귀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제일 처음 한 것이 바로 자기의 신분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레드 프린팅 샵”은 47년 후의 미래에도 존재하는 어둠의 조직이다. 그것을 생각해 내고 모스크바의 여러 곳을 헤매며 머리가 붉고 몸은 청색으로 그려진 앵무새가 있는 식당이나 여관. 호텔, 사무실, 가게들을 찾아다녔다.
간판에 작고 붉은 머리에 온몸이 진한 청색으로 그려진 앵무새가 있는 곳은 “레드 프린팅 샵”의 청부지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뿐이다. 이런 “레드 프린팅 샵”은 47년 후의 미래에도 있었기에 이준이 찾아낸 것이다.
2037년에 러시아에 있는 킬러조직과 마피아들, 모든 지하세계의 조직들은 바로 1985년부터, 더 정확히 보면 소련이 해체되고 개방이 시작된 후부터 생긴 조직들이었다.
“손님. 모호바야 46번지에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택시비를 지급한 이준이 내렸다. 46번지에서 “모스크바 관광호텔(tourist hotel)”까지의 거리는 15분 정도 걸으면 된다.
“관광호텔”은 신분증이나 여권을 보지 않고 받아주는 유일한 호텔이다. 인도를 걷는 이준의 우측에는 모스크바 종합대학 기숙사가 바라보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기숙사 옆으로 지나갈 때였다. 기숙사의 담장 너머에서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투탁거리는 소리. 여인의 억눌린 비명이 들렸다.
‘납치?’
인간은 15~20만Hz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준은 개조된 인간이다.
그 때문에 청각과 시력이 일반인과 비교하면 10배나 된다.
평소에는 일반인과 같지만 집중하면 200미터에서 개미가 방귀 뀌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또한 시력은 2,000미터에 있는 100원짜리 동전을 볼 수 있다.
이준은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4명의 남자가 여인 한 명의 입을 틀어막고 팔을 뒤로 묶은 후 담장 옆으로 움직이는 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앞, 약 500미터 지점에 있는 모스크바 종합대학 후문 옆에 승합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승합차의 문은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인신매매범들인가?”
이준은 얼핏 담장 너머의 종합대학 여대생 기숙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 시대는 국가 체제가 유명무실하게 되어 러시아 전체가 무법천지로 변했을 때였다.
강한 자들은 정치권의 최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고 총기로 무장한 마피아들이 제 세상처럼 날뛰던 때이다.
그들은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은 힘과 폭력으로 쟁취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살해했고 대낮에도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상대 조직과 기관총까지 난사하며 시가전을 벌였다.
이런 형편이니 아름다운 여자들은 자기 몸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강력한 폭력과 죽음을 주는 총구 앞에서 어떻게 몸을 지킬 수 있을까?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현 러시아였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이준은 신경을 껐다. 아름다운 여자를 납치해가든, 팔아서 창녀로 만들던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 이곳은 이준의 고향이며 조국인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는 관심을 접고 뚜벅뚜벅 관광호텔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다! 관광호텔로 가자면 승합차를 지나가야 한다.
이준이 승합차에 거의 다가갔을 때였다. 후문으로 4명의 사내가 꽁꽁 묶여서도 몸부림치는 여인을 끌고 나왔다.
그때 여인이 이준을 보았다. 이준도 그녀를 보았다. 입을 틀어막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니, 웬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세의 미녀였다.
이준이 눈을 깜빡거리자 야간모드로 변했다.
그러자 햇빛이 내리쬐는 대낮처럼 여인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였다.
키, 175㎝, 몸무게 55kg, 생체 나이 22세!
이준의 머리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여인에 대한 정보였다. 기다란 금발 머리가 허리까지 출렁이는 아름다운 미녀가 몸부림치며 애절하게 이준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의 얼굴은 무심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준에게는 그저 성별이 다른 여자일 뿐이다.
저 아름다운 피부를 한 겹 벗기면 똑같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생명체일 뿐이니까!
“빨리 차에 태워.”
“예.”
검은색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여인을 강제로 끌고 승합차로 올라갔다. 그리고 떠날 줄 알았다. 한 데 아니었다.
승합차를 타고 온 자들의 두목이 힐끔 이준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저놈, 지워버려, 우리 일을 목격한 자다!”
“예. 알겠습니다.”
조장쯤 되는 놈이 이준에게 다가오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소음기가 달린 마카레브권총이다. 그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참 운이 없는 놈이구나! 우리 일을 목격한 자들은 다 죽는다.”
그리고 권총을 쳐들어 올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퓽퓽퓽퓽퓽~
조용한 어둠을 가르며 소음기를 낀 총소리가 미약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 차에 앉아 있던 “블랙 레퍼드(흑표범)” 행동단 제13대의 대주 유리 셉츄크는 두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총탄이 발사되는 순간, 그 앞에 서 있던 애송이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7미터 정도를 단숨에 도약하여 제1조장 율리의 뒤에 나타났다.
그건 정말 1초를 몇 등분한 극한의 빠름이었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준이 서 있던 자리를 보는 율리의 목을 이준이 번쩍 잡아 들었다.
”컥, 커커컥!“
율리는 무슨 가벼운 헝겁 인형처럼 달랑 들려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이준의 사전에 자기를 죽이려 한자는 절대 살려준다는 조항이 없다.
이준이 손에 잡힌 자의 몸을 승합차를 향해 던져 버렸다.
쒸이익~
콰앙~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승합차에 부딪힌 율리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그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허연 뇌수들과 핏물이 시창에 덕지덕지 흘러내렸다.
‘맙소사. 사람을 개구리처럼 던져 버리다니?’
유리 셉츄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놈은 우리 상대가 아니다!’
지금까지 세상 무서운 게 없다고 활동하던 셉츄크이다.
하지만 무슨 조약돌 던지듯 율리를 집어 던져 죽이고 승합차를 쏘아보는 이준의 눈은 정말 소름이 끼쳤다.
”빠, 빨리 차를 출발시켜라!“
”예? 아, 예!“
운전기사가 셉츄크의 호통 소리에 차를 급발진시켰다.
아아아앙. 윙~
도로를 맹렬히 회전하며 고무 탄내를 풍기던 승합차가 맹렬한 속도로 내달렸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그 겁나게 무서운 애송이가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살았다. 그런데 대체 어느 파의 놈이지?’
모스크바에는 6개의 전국구 마피아조직과 20여 개의 중소규모 마피아조직이 춘추전국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저리도 겁나 무서운 놈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어쨌든 최소한의 피해로 살았다.
”야, 이새꺄. 더 밟아.“
”예. 지금 최대로 밟고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이젠 못 따라오겠지!’
안도의 숨을 내쉬던 셉츄크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차에서 약 50미터쯤 앞에 언제, 어떻게 왔는지 놈이 서 있다.
”빠, 빨리 밟아.“
”예?“
“놈을 밀어 버리란 말이다!”
"아, 예!"
그가 고함을 지르자 운전기사가 맹렬하게 차를 돌진시켰다.
아아아앙~
차가 급발진하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하지만.
꽈앙~
포탄이 터지는 것처럼 요란한 폭발 소리가 셉츄크의 귀를 때렸다. 그리고 뒤가 높이 쳐들렸던 승합차의 꽁무니가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앞을 본 셉츄크가 경악했다.
“오, 마이 갓!”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내가 한 손으로 차의 보닛을 짚고 있었다.
그런데 보닛이 거대한 바위에 맞은 것처럼 쭈그러지고 엔진이 있는 부분까지 푹 들어갔다. 아마 엔진도 박살이 났을 것이다.
‘뭐, 뭐야? 저놈!’
사내가 뚜벅뚜벅 문 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누구도 도망칠 생각을 못 했다.
그의 압도적인 힘에 모두 기가 질린 것이다.
철커덩.
승합차 문이 무슨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그것을 옆으로 던진 이준이 말했다.
“나오세요. 아가씨!”
그녀가 머뭇거리며 나왔지만 누구 하나 꼼짝도 못 했다.
그때 이준이 말했다.
“오늘은 살려준다. 그러나 다시 이 아가씨의 곁에 어슬렁거리면 너희들의 목을 뽑아 버릴 것이다. 명심하도록!”
그 말에 셉츄크와 부하들의 목이 자라처럼 쏙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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