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269화
291장 팍스 청담동 (1)
"제가 웬만한 걸로는 칼 안 뽑습니다."
하수영은 무척 온화한 표정으로 병원장들을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하지만 한 번 칼을 뽑으면 전부 다 썰어버리기 전에는 집어넣지 않죠. 칼 한 번 뽑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요. 기어이 사람을 자극해서 칼을 뽑게 만들었으면, 그 결과를 감당해야겠죠."
병원장들은 자신들에게 전달하는 협박인가 하고 속으로 부르르 떨었다.
청담동 내란 사태 이후, 그 많은 육군, 판검사, 정치인들이 거대한 쓰나미에 쓸려나갔다.
사형가집행법이라는 엄청난 법안까지 통과되며 대한민국 형사제도에 커다란 지각 변동을 불러일으켰다.
"아아, 오해 마세요. 여러분들에게 보복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과잉진료를 구실삼아 우리 병원에 이직해온 의사들을 협박하려던 게, 여러분들은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다니는 병원을 소유한 재벌 재단과 보건 복지부죠."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저희는 진심으로 말씀드리건대 이사장님께는 그 어떠한 섭섭한 마음도, 거스르고 싶다는 무모함 따위도 없었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사표 쓰시고 의사들 데리고 건너오라는 겁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배에 오르지 않으면, 여러분들 풍랑에 죽습니다."
병원장들은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하수영의 어투에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느꼈다.
"칼을 뽑아서 휘두르려고 하는데 일단 그 자리는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을 노리지 않지만, 재벌 병원들을 치다 보면 그 충격파가 어디까지 튈지 몰라요."
과연 하수영이 준비하는 칼은 무엇인가.
병원장들은 여러 가지를 상상하다가 문득 쓴웃음을 머금었다.
'무슨 상관인가. 지금 이 상태만 유지해도 우리 병원들은 말라 죽을 텐데.'
지금 종합병원들은 일단 '외과'란 글자가 들어간 진료과목은 전부 박살 났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외상외과 등등.
또 외과에 준하는 수준으로 박살이 났지만 숨은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는 과가 있었다.
바로 소아과다.
소아과는 그 특성상 아이들을 좋아하고 특별한 사명감 때문에 지원한 의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너무 어린 소아 중환자들은 이송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무리 닥터헬기가 날아다니는 수술실&중환자실이라지만, 몸집이 작고 체력이 약한 소아 중환자의 이송을 허락하는 주치의는 없었다.
때문에 소아과는 외과만큼까지는 아니게, 어느 정도 인력이 남아 있긴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소아과도 그만큼 위태롭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 이사장님. 그런데 그 소문이 정말로 사실입니까?"
"어떤 소문이요? 저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아서 구체적으로 짚어주셔야 저도 대답을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그, 제가 들은 소문이란 청담병원에 소아환자 전용 센터가 새로 생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아, 사실입니다. 일단 서울 병동은 병상 1,000개 이상의 규모로 생각하고 있고요."
"서, 서울 병동이라 하시면?"
"환자가 어디 서울에만 있답니까? 지금 지방에 있는 분원을 대형종합병원 수준으로 체급을 키울 겁니다. 지방에 근무할 의사가 많진 않겠지만, 다 방법이 있습니다."
실력 좋은 의사는 결국 서울에 몰린다. 그로 인한 의료 인프라 격차는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고질 병.
하수영은 높은 연봉과 낮은 업무강도 및 적은 근무시간, 그리고 순환근무를 통해서 지방 분원에 실력 좋은 의사들을 상시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분원마다 퀸 스텔리온이 상시배치되어 있어 지방에 나간 의사들은 보통 30분에서, 아무리 길어도 1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몇 주씩 지방 분원에 숙소를 잡고 머물렀지만, 이제는 퀸스텔리온을 통해 출퇴근을 시켜준다.
때문에 똑같이 서울에 사는데도 청담본원으로 출근하는 것보다 대전분원에 출근하는 게 더 빠를 때도 있었다.
거리 문제를 '사내헬기버스 시스템'으로 없애 버린 것이다. 자본의 위엄이다.
그러나 지금의 분원들은 설비는 무척 뛰어나지만 병상은 거의 갖추지 않았다. 1차 의원의 역할에 철저히 충실했다.
입원 시스템이 없다는 것만 빼면 대학병원 수준이라는 게 다르지만.
"수익을 중요시하면 종합병원 같은 걸 운영하면 안 되죠. 아, 민영의료재단들을 말하는 겁니다. 돈 벌고 싶으면 그냥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이나 만들어서 팔 것이지, 깜도 안되는 것들이 병원 운영이니 뭐니 하니 안 되는 거예요."
겉보기에는 숭고한 인류애, 박애정신, 인술 뭐 그런 정신을 충만하게 갖춘 것처럼 들려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병원장들은 하수영의 언행과 표정에서 온화한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국영병원을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대형 민간병원을 모조리 인수해서 의료일통을 노리는 사람 같다.
하늘을 향해 멈출 줄 모르는 정복자의 야심이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값에 따라 직장을 옮기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시장 원리죠. 그걸 비열한 방법으로 공격했으니, 저도 그만큼 갚아주려고 니다."
대형종합병원들을 쳐내고 싶어 하는 진심이 숨겨지지 않고 마구 뿜어져 나온다.
"다른 배들, 일단 전부 가라앉혔다가 다시 건져 올릴 생각이니, 그 전에 탈출하시죠. 아늑한 제 배로 넘어오세요."
병원장들은 홀린 기분으로 손을 잡았다.
이제 오늘 이 자리에 희박한 기대를 걸고 있을 병원재단 이사진을 배신해야 한다.
***
청담수영병원에서 국가소송을 걸었다.
소송대상은 정부, 특히 보건복지부였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악의적으로 진료비 지급을 회피했다는 권력 남용을 원인으로 들었다. 천문학적인 손해 배상액도 함께였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온 힘을 다해 소송에 응했지만, 처음부터 게임이 성립하지 않았다.
수영병원 변호인단은 수상할 정도로 다양한 직접증거들을 제시했다.
보건복지부, 그리고 건강보험공단에 스파이를 잔뜩 심어둔 게 아닌가 망연자실할 정도로 입증력이 높은 증거들이었다.
지루한 소송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변호인단에게는 월급받고 수행하는 업무였다.
변호인단은 공단에서 과잉진료 혐의로 건드린, 수영병원으로 이직한 의사들까지 대리해서 소송에 임했다.
아무리 의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부유한 전문직이라 해도, 개개인에게 걸린 소송은 매우 피곤하고 힘든 법이다.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면, 단지 일반 서민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일 뿐, 소송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호진이 꾸린 대형 변호인단이 그들에게 걸린 고소고발까지 모두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기에,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수영병원 출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사장님은 병원에 소속된 이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병원 업무로 인해 공격을 받은 것이라면, 병원이 끝까지 그 공격을 책임지고 커버해줄 겁니다.」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소송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배상책임이 나온다고 해도 병원에서 책임져준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형병원들에 잔존하는 기피과 의사들의 탈출 러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수영병원이 너무 많은 의사를 쓸어 담았기에 전국적으로 의사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정부에서는 의대 정원을 늘리는 등자구책을 취했지만, 정책의 특성상적어도 10년은 지나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청담동을 건드린 거요? 보니까 민간 병원들 간다툼에 보건복지부가 엉뚱하게 한쪽 편을 들면서 벌어진 일이더군요. 장관, 무슨 생각으로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책임지고 이 일을 다시 바로잡겠습니다."
"자기 돈 써가면서 인술 펼쳐보겠다는 사람 발목을 괜히 잡아서…… 다른 병원들은 돈 아낀답시고 티오 줄이고 의사 짜르고 한다는데, 유일하게 청담동은 사비를 털어서 의료시스템을 강화하잖습니까. 어디 편을 들어야 좋을지 명확한 거 아닙니까?"
"……."
보건복지부 장관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대통령은 육군 출신이라서 잘 모른다.
언뜻 보기에는 하수영이 하는 행동은 칭송감이 맞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결국 의료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있었다. 하수영의 호의가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지속성이 불안정한 구도를 이 나라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그의 마음이 변한다면?
만약 어느 날 그의 일신에 변고가 생겨서 하수영의료재단이 더 이상 지금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장관은 결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대통령님, 그러나 한 개인의 호의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너무 불안정하고 위험합니다."
"지금 내가 지난번에 내린, 청담동에 관한 결정들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대통령의 말투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육군 장성 출신인 대통령은 감정을 통제하는데 능숙하지만, 분노를 숨기는 것에는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분노했다는 것을 흘림으로써 분위기를 통제하고 사람을 압박해서 굴복시키는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담동은 정말 다른 대형종합병원들을 고사시키고, 이 나라의 유일한 종합병원 프랜차이즈로 자리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분원들을 세워서 공격적으로 영업을 할 모양입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예?"
"자기 돈 수십조 원 이상씩 써가면서 국민들 건강을 알뜰하게 챙기겠다는 독지가 아닙니까? 상패나 훈장을 주진 못할망정, 재벌 편을 들어서 방해하지는 말아야죠."
장관은 기가 막혔다.
이게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내가 한 것 한 번 보세요. 전기며 통신이며 수영그룹에 몰아줬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전기료 불만은 이제 터져 나오지 않고 통신 데 이터는 부자나 영세민이나 공평하게 누리고 있어요."
"……."
"청담동은 다른 건 몰라도 사리사욕으로 사업을 하진 않아요. 자기 만족감을 위해서 합니다. 그게 어떤 심리인지 내가 잘 압니다."
혹시 똑같이 군 장성을 겪은 입장이기에 어떤 동질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장관은 군 미필자였기에 육군장성출신 대통령이 수십조 원 이상의 군비를 사비로 내놓은 해군원수한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개인의 호의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했는데, 해군 원수나 되는 사람이 설마 자기 유고 상황을 대비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의 목소리가 살짝 차가워졌다. 분명한 못마땅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비록 육군 출신이긴 하지만, 해군에서 괜히 원수로 추대한 게 아니에요. 청담동은 군 장성으로서의 행정 능력도 매우 탁월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일신에 큰 문제가 생겨도, 수영그룹 체제는 제대로 잘돌아갈 겁니다. 로한 의원도 있고요."
"대통령님……."
"그러니 쓸데없는 소송 따위로 지지부진 끌지 말고 적당히 끝내세요. 청담동과 다퉈서 우리 정부도 좋을게 없습니다. 알겠어요?"
대통령이 잠시 일어나서 창가로 갔고, 장관은 '하여튼 미필은 어쩔 수 없다니까.' 라는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잊고 있었다…….'
장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은 청담동으로부터 내각제 개헌 묵인이라는 큰 선물을 끌어냈고, 그 대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전기 사업을 독점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던가.
4대병원이 망하든 말든, 하수영이 독점사업으로 얼마나 큰 재미를 보든 말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상관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