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146화
266장 혈통을 새긴다 (4)
권택상은 온몸으로 울면서 빌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를 품은 채.
하지만 하수영은 꿈틀거리는 벌레를 관찰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언젠가 언론사 오너의 구둣발에 차이고, 재떨이에 머리가 깨지고, 구두에 침과 섞은 술을 부어서 마시게 했을 때.
그때 회장이 보여주던 표정보다 더 강한 여흥에 잠겨 있는 것만 같다.
콜로세움에서 서로 피를 흘리고 장기를 쏟으며 죽어나가는 검투사들을 흥미롭게 보던 로마 귀족들의 시선이 저러했을까.
그가 빌면 빌수록, 하수영은 발에 더욱 힘을 주어 등을 밟았다.
"나중에 후배들이 생기면 정보 공유 잘 해라.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면 네놈 형제자매까지 묶어서 혈통을 새길 줄 알아라."
차라리 발작이라도 해볼까?
하지만 한 발로 지그시 누른 발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쇠기둥에 꿰뚫린 것처럼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다.
밟힌 머리가 단단한 바닥에 강제로 비벼지며 엄청난 통증, 그리고 그 이상의 모멸감과 절망을 안겨 준다.
"회장님.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입이 짓눌려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울면서 한참을 빌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동안 권택상은 하수영을 다소 만만하게 생각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형성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겨우 몇 년 사이에 초대박을 터뜨린 혈혈단신 젊은 졸부.
온 나라의 언론이 그렇게 물고 뜯었음에도, 겨우 CVN케이블에 광고를 몰아주는 소심한 복수나 하는 걸 보고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어중이떠중이 기자들이 '우리가 받아야 할 광고비를!'이라며 아까워서 울부짖는 것을, 그는 늘 한심하게 여겼다.
'하수영도 펜의 힘은 못 이긴다. 우리 언론사들이 모두 합심하면 이 땅에서 우리를 이길 세력은 없다.'
하수영이 언론 분열을 획책한답시고 일부에 돈을 뿌려대면 더 좋고.
한 번 돈을 뿌리고 펜의 맛을 알기 시작하면 더욱 지갑을 열게 된다.
다른 오랜 재벌들도 그렇게 해왔고, 신흥 재벌들도 그 수순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펜의 위력에 절여지게 되는 법.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아무리 세력이 크고 돈이 많아도 스피커 독점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제 그와 자식들은 한국 땅에서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떤 식품이든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수영농장이 나온다.
식물성 식재료는 모두 수영농장에서 키우거나, 수영농장이 관리를 받는 자영농에서 기른 것이고.
육류와 생선들은 전부 수영사료를 먹고 자란 것들이었다.
외국산 식품은 수입도 안 된다.
이 땅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직접 발품을 팔거나 사람을 시켜서 해외에서 음식을 매번 사와야 한다.
매번 아내를 시킬 순 없으니 사람을 써야 하는데, 그럼 인건비에 티켓값에…….
두 아들까지 셋이서 한 달 식비만 천만 원 단위를 훌쩍 넘기는 꼴이 되고 만다.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며 이리저리 뒷돈도 많이 챙기고 재산도 많이 모았지만, 그 막대한 식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는 예정대로 미국 이민을 추진했고, 자리를 잡기 위해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
「씨를 말리시는 거군요.」
"생각해 봐. 칼 들고 궁궐을 넘으면 어떻게 되지?"
「반역으로 9족을 멸합니다.」
권택상은 펜촉이라는, 세상에서 제일 흉악한 칼을 들고 청담동 울타리를 넘었다.
궐 밖에서 일어난 일은 방관한다는 주의지만, 달리 말하자면 궐 안에서 일어난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관대하냐? 딱 본인 혈통만 날려 버렸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9족을 싸그리 잡아다가 갓난아기고 뭐고 다 씨를 말렸어."
「권택상 본인도 펜촉으로 수십명이 넘는 사람들을 자살하게 했고,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고통받게 했으며,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속여 왔으니 인과응보로군요.」
"잘 살다가 금기를 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평소에 금기 근처에서 깔짝깔짝대거나, 이미 금기를 여러 번 넘은 놈들이 더 잘 넘지."
「작은 범죄가 쌓여 큰 범죄자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까?」
"선한 사람이 인생이 뒤집힐 만한 큰 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지. 왜 전과 17범, 18범 그렇게 불어나는 건데."
「그럼 권택상의 혈통은 정말 10년 안에 종결되는 겁니까?」
"글쎄다. 어디 오지에 들어가서 지혼자 자연인처럼 열매 따먹고 풀뿌리 캐먹으면서 산다면 또 모르지."
「그건 그것대로 고통이겠군요.」
"어차피 5년에서 10년 안에 자영농들은 세계적으로 사라져. 국가나 글로벌 기업급 지원 없으면 농사 못짓는다."
「마스터의 전생에서 지구 기후의 결말은 대체로 어떠했습니까?」
"뭘 어쩌긴 어째. 인간이 열심히 배출한 탄소 가스에 뜨거워지고 자원은 바닥나는데, 사채업자들과 전쟁광들 날뛰는 거 제어 못 해서 다 같이 멸망의 길로 갔지."
하수영은 금융 자본가나 그를 위해 종사하는 금융업자들을 사채업자라고 부른다.
「정말 예외 없이 멸망했습니까?」
"멸망의 길로 갔다는 거지, 전부 멸망했다는 건 아냐. 핵전쟁으로 수백만 명도 못 살고 다 죽어도 어찌 어찌 존속은 하더라."
「마스터는 개입을 자주 했습니까?」
"처음에는 그런데 나중에 가니까 이제 지겨워서 잘 안 하게 되더라고. 내가 21세기 지구만 수백 번 넘게 살았어. 같은 게임 수백 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메인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너무 지겨워서."
프리덤은 납득했다.
그래서 이번 생의 마스터는 농부로서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고, 가급 적 유지하려 한다는 것을.
무수히 클리어한 게임에서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직업 클래스 테크트리가 아닌가.
하다 보니까 손에 익은 버릇 때문에 옛날 스킬이나 공략이 종종 나오곤 하지만, 웬만해서는 지금의 정체성을 지키는 게 더 재밌다.
"저놈 혼자 울타리에 앉진 않았을 테고, 또 박멸해야 할 벌레들 있냐?"
「네, 권택상은 가이드만 잡아줬을 뿐, 기사 대부분은 그의 후배 베테랑 기자들이 작성해서 그의 이름으로 올린 겁니다.」
"바이럴은 원래 팀으로 움직이니까. 팀원들은 사이좋게 팀장과 함께 가야지."
***
하수영은 프리덤이 제출한 명단에 따라 11명의 기자들에게 권택상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이제 그들은 본인을 포함한 후손들이 엘릭서로 생산한 음식에서 영양분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 내 핏줄을 낳을지도 모르는 여자인데. 건드렸다가는 엿 되는 걸 알아야지."
파파라치 수준이었으면 귀엽게 봐줬을 것이다.
하지만 패륜적인 모욕처럼, 금기를 넘는 행동은 용납해 줄 수 없다.
「아, 그럼 미래의 그룹 사모님을 장효주 씨로 결정하신 겁니까?」
"근데 넷 다 괜찮지 않냐? 정서희, 로마노프, 미레아. 다들 각자만의 매력이 있다니까."
「중동으로 국적을 변경해야겠군요. 그래서 안살린 왕자와 친분을 유지하시는 겁니까?」
"꼭 중동으로 이민 갈 필요는 없지."
「역시 한반도를 통일 왕정제로 개조하여 국왕직에 오르시면…….」
"후궁들 치정싸움이 워낙 살벌해서 지겹긴 한데, 가끔 교통정리 하는 게 재밌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근데 뭐 이번 생은 일단 농사에 집중하기로 했으니까."
「전 세계 식량권력을 독점하시면 삼천정비도 거느리실 수 있을 겁니다. 마스터 같은 분은 자손을 아주 크게 보는 게 문명 전체적인 입장에서도 유리합니다.」
"나라마다 내 자식들이 수십 명씩 있으면 아주 세상 재미지게 돌아가겠네."
「왠지 이미 해보셨을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한두 번만 해봤겠냐?"
「제가 할 말이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이 경악스럽습니다.」
"원래 피조물은 창조주를 못 이긴다. 우주 이치가 그런 거야."
***
장효주에게도 상황은 알려주었다.
"그 기사 쓴 놈들, 앞으로 평생 한국에 안 들어올 거예요. 뭐, 가끔 여행 삼아서 들어올 수야 있겠지만. 근데 그것도 쫄아서 아마 안 들어오려고 할 겁니다."
"겁이라도 준 거예요? 다시는 수영씨 눈에 띄지 말고 한국 떠나라고?"
"뭐, 비슷합니다."
"저야 속이 시원하고 고맙긴 한데……. 수영 씨 정치인인데 그렇게 약점 만들어도 괜찮은 거예요?"
"이게 뭐 약점이랄 것까지야. 정치 판에서 이 정도는 흠집도 아니에요. 해운대 백사장에 떨어진 사탕 껍질 같은 거죠."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손에 피, 아니, 흙탕물 좀 묻히면 어떻습니까? 내 사람들을 돕는 일인데."
"어머, 저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진짜?"
"소중한 아티스트잖습니까."
"그럼 우리 소속사 인수해 줘요.
여배우가 소속사 대표와 연애하는거 꽤 로맨틱하잖아요."
"제가 지금은 농사에 집중을 해야 하는 때라서 다른 일에 신경을 할애할 여유가……."
"그럼 당분간 연애하자고 안 할 테니까 청담동 집에 내 방 하나 만들어줘요."
"아니, 한 번에 기어 6단을 넣으면 어떡합니까?"
"아닌데요? 그냥 겨우 1단 넣은 건데요?"
"……아무튼 효주 씨 물어뜯는 기더기 놈들 또 나오면 축출해 버릴테니까 마음 상해하지 말고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해요."
"수영 씨가 내 마음 안 받아줘서 마음 상했어요. 어떻게 축출할 거예요?"
"……."
"그냥 키스나 해줘요. 더 안 나갈게 진짜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
"하하, 제가 순진하다뇨."
"여러모로 못 미더워요. 사별한 전 여친 이야기도 사실 다 뻥인 거 아니야?"
***
미국에 도착한 권택상은 가족들과 함께 보낼 집을 알아보는 한편, 미국 이민 비자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식사는 냉동식품을 사서 대충 때웠다.
그러나 이틀도 못 가서 또다시 '배고픈 굶주림'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냉동식품을 얼른 살펴본 그는 이루말할 수 없는 허탈함에 휩싸였다.
"씨발. 나노소프트 새끼들은 OS나 제대로 만들 것이지, 왜 푸드사업에 갑자기 손을 대서는……."
하필이면 나노소프트에서 만든 냉동식품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냉동식품들도 전부 다 살펴봤다.
절반이 넘는 냉동식품들이 나노소프트에서 출시한 제품이었다.
"아, X발. 하필 제일 맛있는 게 나노소프트에서 만든 것들이네."
불공평해도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는지.
맛있어서 제일 먼저 손이 갔던 냉동식품들이 하필이면 나노소프트 제품이었다.
당연히 원재료도 수영농장에서 제공했겠지.
다시 마트를 샅샅이 뒤져서 제조회사, 원산지 등을 확인하고 난 권택상은 새삼 수영농장의 영향력에 치를 떨었다.
"……진짜 지금부터라도 미리미리 텃밭 가꿔야 하는 거 아냐?"
나노소프트는 이미 식품제조유통업에서 미국 최강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수영농장이 미국에 진출한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권택상은 앞날이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미국이 아니라 유럽으로 갔어야 했나?
아니, 하지만 거기는 미국보다 더 식량 생산 능력이 떨어지지 않나?
그래도 식량 생산으로 정점을 찍은 나라에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나?
어쨌든 미국에는 반독점법도 있지 않은가?
"X발 X바알!"
나노소프트 제조(원산지:Republic of Korea) 표시가 붙은 냉동식품을 모조리 내다 버리며, 권택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을 옥죄어 죽이려는 거대한 울타리가 아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착실하게, 꾸준히 범위를 좁혀가며 조여 죽이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날 권택상은 술을 진탕 퍼마시고 이틀 내내 앓아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