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100화
256장 파종의 시기 (2)
로마노프는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쟁 터졌으니까 미치도록 불안하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수영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고, 로마노프는 그동안 쌓인 걱정과 불만, 우려, 분노를 한꺼번에 실컷 토해냈다.
입안의 침이 마를 정도로 실컷 토로한 로마노프는 혼자서만 너무 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요. 나 혼자만 너무 떠들었죠?"
"로마노프 씨,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라스베이거스에 가 있는 게 어때요?"
"라스베이거스요? 혹시 수영 카지노 호텔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거기에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 드리죠. '제 여자'니까 남들이 보기에도 크게 이상하진 않잖아요?"
"라스베이거스도 좋긴 한데……. 전 기왕이면 수영 씨 곁에 있고 싶은데요. 안 될까요?"
"왜 안 됩니까. 삼성동 카지노에 좋은 자리 만들어드릴게요."
"진심이세요?"
"저는 미녀들에게 늘 친절합니다."
"선은 딱 긋잖아요. 어제도 내 유혹에 안 넘어갔으면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거 원래는 자존심 상하는 말인데, 수영 씨가 그러면 이상하게 안그래요. 신기해."
"원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죠."
***
현재 러시아에는 수영목장만 운영되고, 농장은 아직 땅만 준비 중인 상태다.
러시아는 개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파종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
올해 러-우 농사는 흉년을 찍을게 예정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영목장이 철수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는 것은 크렘린에서 크게 반길 대답이었다.
당장 다른 목장들은 가축 사료 조달을 걱정하는 판이지만, 수영목장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수영은 요원들에게 전했다.
"로마노프는 당분간 한국에 남으라고 했습니다. 내 여자를 차마 전쟁중인 위험한 나라에 보낼 수는 없겠네요."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전장은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입니다."
"전장이 뜻하지 않게 확대되는 것도, 특수부대가 적 수도에 후방공격을 가하는 것도, 전쟁 중에는 얼마든지 있는 일이죠. 개전의 문을 열었으면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로마노프 가족들은 잘 부탁합니다. 내가 유의 깊게 지켜보고 있겠어요."
두 요원은 그것을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연해주 목장은 축산업을 위해서 내게 꼭 필요한 지역이죠. 의도된 불이익이 없다면 굳이 철수할 이유도 없습니다. 총리님에게는 그렇게 전해주세요."
바지사장인 총리가 아니라, 뒤에 있는 진짜 배후자에게 전하라는 뜻.
러시아 요원들은 결국 로마노프를 한국에 남겨놓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실각한 게 맞네요. 쿠데타는 위장이 아닌 거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실각으로 위장한 거라면 저한테 친서나 메시지가 직접 전달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럼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됐네요."
"쿠데타 세력은 뭐, 저야 연해주 목장만 잘 챙기면 그만이니까요."
하수영은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작물은 공장에서 키울 수 있는데, 가축은 그게 안 된다니까요. 넓고 쾌적한 공간이 필요한데, 이 나라는 땅이 너무 좁으니."
장차 전 세계 육류 시장을 지배하려면 한국 축산업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축들을 계란판의 계란처럼 숨 쉴틈도 없이 24시간 빽빽하게 가둬둘순 없으니까.
비좁은 공간은 비위생성을 낳으며, 결과적으로 스트레스를 중첩시킨다.
때문에 축사장은 넓을수록 좋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피던 로마노프가 물었다.
"수영 씨한테 전쟁은 어때요? 수영씨 재정에 어떤 식으로는 영향이 있을 텐데."
"있겠죠. 아마도 긍정적인 방향으로요."
세계적인 곡창지대 하나가 전쟁으로 올해는 망했다.
장사만 생각하면 거농인 하수영 입장에서는 쾌재를 부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덤덤해 보인다.
그것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특수 효과로 인해 돈을 번다는 자책감이 안기는 상쇄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죠."
"수영 씨는 지금 멀리서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오늘 아침은 가까이서, 저녁은 더 가까이서, 내일 아침은 멀리서, 저녁은 더 멀리서. 그걸 무수히 반복하고 있죠."
"……어렵네요."
무한한 전생의 기억을 반추하는 말이지만, 로마노프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개인적인 답도 찾았습니다."
"그게 뭔데요?"
"내가 당장 하고 싶은 것, 지금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거죠. 지금처럼요. 연해주 목장 철수 안 하기로 했고, 로마노프 씨도 한국에 눌러 앉히기로 했잖아요?"
밝게 웃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로마노프는 처음으로 그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하수영은 청담동 쓰리룸 오피스텔한 채를 로마노프에게 내주었다.
당연하지만 월세는 안 받기로 했다.
"나중에 장효주 씨 만나더라도 비밀로 해주세요. 혹시 섭섭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분은 월세를 내나 봐요?"
"안 받으면 오히려 이상한 소문 납니다. 대신 CF로 잘 챙겨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정확히 둘 사이가 어떻게 돼요? 그걸 확실히 알아야 저도 속도를 정할 거 같은데."
'방향'이 아니라 속도,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영화 찍으면서 키스 한 번 한 게답니다."
"그럼 내가 이겼네요. 우리 이번에 애정표현 엄청 했잖아요. 감시자들 보라고."
"뭘 그런 걸 가지고 이기고 지고를 따집니까."
하수영은 로마노프를 위해 삼성동외국인 전용 카지노, SKLWITH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그 일을 가지고 SKLWITH 사장까지 따로 만났다.
"오해하실까 봐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취업 청탁이 아닙니다. 거래를 하자는 거지요."
"오해하지 않습니다. 의원님께서 장기적으로 흠이 될 만한 일은 절대로 손대지 않으신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래라 하시면……."
"자리 하나를 더 만들어주세요. 기존 티오에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아예 한 자리를 더 늘려달라는 뜻입니다. 대신 안드로이드 프리덤 1기를 무상으로 렌탈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게 정말입니까?"
SKLWITH 사장의 눈이 흥미로 물들었다.
현재 라스베이거스 수영 카지노에서 안드로이드 프리덤은 매우 핫하다.
안드로이드 프리덤 실물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부유층 고객들 덕분에 수영 카지노의 매출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황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관광공사에서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한 전략적 비즈니스니까요."
"그렇습니다. 감사가 나와도 책잡힐 게 전혀 없습니다. 좋습니다. 의원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 로마노프 양을 잘 부탁합니다."
딜러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아마도 홍보부 같은 곳에 배치가 될 것이다.
SKLWITH 사장은 안드로이드 프리덤 배치가 매출 증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기대되었다.
***
러시아 정권 교체와 전쟁으로 인해 국제 곡물가가 본격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 세계적으로 생산량이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감소하고 있었는데, 러-우 전쟁이 시장을 기폭시켜 버렸다.
특히 한국은 1%대를 웃돌던 밀 자급률이 지난 2년 동안 자연재해로 인해 0%를 찍은 상황이었다.
국내에서 밀농사를 짓는 것은 이제 수영농장이 유일했다.
「마스터, 국내 밀 농가는 더 이상 자생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농장에서 밀 시장까지 접수해서 관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주곡 시장까지는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쌀에 이어서 밀까지 내가 떠안게 됐구나."
수영농장은 국내에 밀을 팔지 않는다.
생산되는 밀은 한국과 미국의 수영레스토랑의 라면 면발을 만드는 데 쓰인다.
「자연스럽게 밀 농가가 없어진 만큼 밀 시장을 접수하기에는 제격입니다. 벼는 다른 농가를 생각해서 건드릴 수 없지만, 밀은 접수하시죠.」
"그래야겠다. 일단 가볍게 1,000만 톤만 생산해 봐."
「연간 소비량이 200만 톤입니다. 1,000만 톤은 너무 많습니다.」
"뭐? 그거밖에 안 돼? 어쩐지, 왜 그렇게 자급률이 낮나 했다."
「시장이 너무 작으니 가격 경쟁력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죠.]
"가격을 안정시키기는 해야 하니까 그럼 500만 톤 정도 생산해서 시장에 풀어."
「알겠습니다. 일주일 안으로 시장에 풀겠습니다.」
생산하는 것은 금방이다.
오히려 작물 포대를 쌓아두는 공간을 확보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행히 서락산 일대에 창고를 잔뜩 지어놔서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마스터, 꿀벌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벌통은 충분하냐?"
「각 양봉 농가에 한 통씩 나눠줄 정도도 못 되는 상황입니다. 마스터가 직접 벌들에게 분봉을 하라고 지시해야 할 거 같습니다.」
"신어가 다 좋은데 벌 같은 미물한테는 내 뜻이 왜곡될 수 있어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게 세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게 문제지."
「지금으로써는 벌 세력을 아주 크게 늘리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알았다. 오늘 농장 들러서 벌통에 대고 한마디씩 해줘야겠군."
「신어 권능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어서 저 역시 매우 기쁘고 흐뭇합니다.」
"네가 기쁘고 감정이 뭔 안다고."
하수영은 서락산 테라리움을 들리기 위해서 캠핑카에 탔다.
운전대를 놓고 자율주행에 맡긴 그는 팔베개를 한 채 말했다.
"아, 그리고 나더러 집회에 함께 해줬으면 하니 마니 한 농민들 있지?"
「모두 17명입니다. 제가 따로 엄중하게 경고를 줬습니다.」
"벌써?"
「네. 편안한 집회를 위해 차량 지원까지 해줬는데, 집회에까지 함께 해달라는 요구가 귀에 들어가서 매우 불쾌해한다고 말했더니 벌벌 떨더군요.」
"불쾌하진 않은데. 어디 한두 번 겪어봤어야지. 이제는 별 감흥도 없다."
「양봉농가는 약간의 기름 외에는 마스터의 지원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보니, 아직 분위기 인식이 제대로 안 되는 거 같더군요.」
"벌통 새로 나눠주면서 한 번 휘어 잡고 가는 게 좋겠군. 힘 빡쎄게 줘서 장소 세팅해 봐라."
「알겠습니다.」
테라리움을 방문한 하수영은 벌통을 찾았다.
수많은 벌들이 농장에서 부지런히 수분 작용과 꿀 채취를 하고 있었다.
10단으로 높이 쌓인 벌통이 캐비닛 블록처럼 빽빽하게 정리되어 있고, 로봇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통을 관리한다.
보기만 해도 뿌듯해지는 광경을 음미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JS중공업 사장 최태현이었다.
"네, 사장님. 무슨 일이시죠?"
-의원님, 금 채굴이 거의 다 끝나 갑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그럼 언제쯤 신 농장 착공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저기, 그런데…… 이걸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나쁜 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이고, 지금 땅에서 뭐 나왔죠? 설마 우라늄이라도 나왔어요? 제발 그건 아니라고 해주세요."
-가장 깊이 묻힌 금광석까지 채굴하고 나니까, 그 밑에서 고순도의 티타늄과 구리 광석이 발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