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랜차이즈 갓-1099화 (1,099/1,270)

프랜차이즈 갓 1099화

256장 파종의 시기 (1)

모스크바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부틴 대통령의 측근들이 친위 쿠데 타를 일으켜 부틴을 크렘린 궁 깊숙한 곳에 감금했다.

러시아는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민주주의국가.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은 국권 장악은 아무런 명분과 권위, 근거가 없는 통치권 쟁탈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측근들은 총리를 권한대행으로 내세워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누구도 상상 못 한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국제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대륙에 피가 흘렀고,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총성이 그치지 않았다.

SNS에서는 온갖 음모론이 판을 쳤다.

-대통령이 치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마르시초프가 이 기회에 러시아의 왕이 되기 위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의회와 국민들이 쿠데타에 반발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강제로 개전이 된 이상, 의회와 국민들은 당장 쿠데타 세력을 끌어내릴 여유가 없다.

그중에는 부턴 자작극설도 있었다.

-대통령 감금은 사실 자작극이다.

부틴은 전쟁을 강행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측근들을 시켜 스스로 은폐되었다.

-전쟁이 끝나면 부틴은 친위 쿠데 타를 진압하는 형태로 복귀해서 통치권을 회수, 또다시 독재를 펼칠 것이다.

-우리는 독재자한테 더 이상 속거나 끌려가서는 안 된다.

부틴은 어디에 있는가.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

자작극인가, 아닌가.

무수한 억측 속에서도 부틴은 끝까지 조금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러시아군의 보급 및 수행 능력 부족으로 인해 고착되었다.

봄을 기다리며 동면에 들어간 어린 밀싹들이 즐비한 곡창지대 일부가 전장으로 변했다.

수확을 위해서는 봄에 충분한 비료를 줘야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농사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밀값이 치솟을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러시아에서 은밀히 하수영을 찾아왔다.

***

여전히 섹시한 매력을 자랑하는 로마노프가 하수영을 보고 반갑게 웃었다.

"잘 지냈어요?"

"그럼요. 잘 지냈습니까?"

"잘 못 지내요. 이 시기에 제가 왜 한국에 들어왔을까요?"

"달갑지 않은 메시지를 갖고 오신 모양이네요."

"맞아요. 저밖에 이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이반 요원은요?"

"……연락이 되지 않아요.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하수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로마노프 씨가 아는 건 별로 없겠어요."

"맞아요. 크렘린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저한테 그런 걸 말해줄 리도 없고요."

"로마노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쿠데타요?"

"네."

로마노프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자작극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요. 수영 씨는 좀 아쉽겠어요? 그래도 수영 씨 편의를 많이 봐준 러시아 통치자였잖아요?"

"맨 프롬 콜롬비아 2를 찍을 때 러시아군이 크게 협찬을 해주기로 했는데, 정권이 바꾸었으니 무산된 것 정도? 그거 말고는 딱히 없군요."

"농장과 목축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되지 않아요?"

"걱정이야 로마노프 씨가 가져온 메시지를 듣고 난 다음에 하면 되죠. 전부 없던 일이 돼도 저는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

"휴. 제가 왜 이런 임무를 맡았는지. 이런 일로 수영 씨를 만나러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해합니다. 쿠데타 신군부가 명령을 내리는데 일개 여대생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그냥 따라야죠. 그나저나."

하수영은 컵을 느릿하게 돌리며 미소 지었다.

"로마노프 씨를 보낸 걸 보면, 그래도 신정권이 농장과 목축지 건을 없던 일로 할 마음은 없나 봅니다."

"……맞아요. 그래서 러시아에서 수영 씨와 가장 친한 저를 보낸 거예요.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매듭지 으려고."

"그럼 저는 러시아 농장과 목장을 하던 대로 운영하면 됩니까?"

"네. 오히려 크렘린은 수영 씨가 전쟁 때문에 발을 빼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혜택을 챙겨주려고 해요."

"흐음."

"크렘린이 전해달라는 메시지는 이거예요. 그전보다 대우가 좋으면 좋았지, 더 나빠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라고."

그러면서 로마노프는 친서를 꺼내어 하수영에게 내밀었다.

러시아에서부터 동행한 요원들이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친서를 건네는 장면을 행여나 누가 보지는 않을지 경계하는 것처럼.

친서를 보낸 이는 현 러시아 총리이자 쿠데타 세력이 내세운 바지사장이었다.

하수영하고도 안면이 있다.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하수영은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친서를 열어서 내용을 읽었다.

멋들어진 외교적 표현이 가득한 친서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했다.

떠나지 마.

제발.

잘해줄게.

응?

친서를 다시 접어서 갈무리한 뒤 정중히 챙긴 하수영이 말했다.

"그간 러시아 농장, 목장에 투자한 게 많아서요. 정권 바뀌었다고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면 저도 굳이 빠질 이유는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모스크바에서 반전 여론 때문에 우려가 깊나 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제가 그거 때문에 언짢아서 농기구들을 다 빼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는 건가요?"

순간 로마노프는 흠칫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그녀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본인에게 큰 독이 된다.

당장 호위 겸 감시자들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쥐어짜 냈다.

"크렘린은 진심으로 수영 씨가 농장에 집중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건 사실이에요."

"좋습니다. 저도 예전 이상으로 잘대해주겠다는데, 농사업자로서 굳이 발을 뺄 필욘 없죠. 자, 두 분은 이제 그만 비켜주시겠어요?"

하수영이 처음 보는 요원 둘을 바라보며 말하자, 요원 한 명이 어려워하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로마노프 양의 철저한 경호를 명받았습니다."

"이런, 이반 요원이 없으니까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네. 설마 모스크바에서는 아직도 모르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로마노프는 내 여자예요."

"……!"

"내가 아끼는 여자 중 한 명이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둘만의 회포를 풀어야 하니까 이만 비켜달라는 겁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재울 테니까 두 분은 내일 낮에 우리 집으로 오세요."

"그, 알겠습니다. 저희가 실례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조금 당황해하던 요원 둘은 그제야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미인계를 내세워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 했는데, 이미 밀이 구워져서 빵이 된 상황이 아닌가.

"자, 이쪽으로."

하수영은 로마노프의 허리에 팔을 감고, 오랜 연인처럼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캠핑카에 태운 뒤 곧바로 청담동 저택으로 향했다.

아마 요원들은 철수하지 않고 뒤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하수영이 직사각형 형태의 장비를 들이밀자 로마노프가 당황했다.

"뭐예요, 그게?"

"우리가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를 남이 관음하게 둘 순 없죠."

파지지직!

불꽃이 튀었고, 로마노프는 움찔해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생각 외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한 거예요, 방금?"

"로마노프 씨 옷에 도청기나 카메라가 있을까 봐 청소했어요. 당신을 못 믿어서는 아니고."

"아아, 그랬군요. 잘했어요. 저도 내심 찜찜하던 차였어요."

"이반은 어떻게 됐나요?"

"……정말 몰라요. 감시자들 있다고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요."

"대통령은요?"

"그것도요."

"흐음. 로마노프 씨는 제가 어떡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뭐라고 말을 하면 그대로 하실 건가요?"

"중요한 참고는 되겠죠. 로마노프씨는 제 러시아 친구 중에서 가장 친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러시아 친구라고 해봐야 아는 여자는 저 한 명뿐이잖아요."

"그게 바로 특별한 거죠."

로마노프는 저도 모르게 풀썩 웃었다가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솔직히 저도 전쟁을 반대하지만,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가는 큰일 나요. 그래서 아까도 뭐라고 말을 못했어요."

"그럴 거 같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근데 저는 정말 수영 씨 여자가 되어도 좋은데. 원 오브 뎀도 괜찮아요. 수영 씨 같은 남자라면."

농담처럼 피식거린 뒤, 로마노프는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수영 씨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제 생각, 제 소감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

"수영 씨는 단순히 농장과 목장을 두고 맺었던 거래를 이어가는 것뿐이지만, 정치적으로 소란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래요."

"그렇습니까."

"그냥 여기 있는 동안 저 사랑하는 티만 좀 많이 내줘요. 그래야 내 조국에서 앞으로도 무사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저 친구들까지 데리고 식도락 패키지 한 번 다녀오죠. 제대로 커플 영화 한 번 찍어봅시다."

신정권이 로마노프를 보낸 것은 하수영을 상대로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 든 이상, 원치 않아도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볼 수 있는 입장.

자신의 여자인 척하는 게, 그녀한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수영은 경호 겸 감시자들 앞에서 유감없이 로마노프를 사랑하는 티를 내줬다.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나눴으며, 그들이 보든 말든 진한 키스를 가지기도 했다.

하수영은 그들에게도 유쾌하게 친절을 베풀었다.

독도 펜션까지 다 함께 이동해서 친구처럼 만찬을 즐겼다.

하수영이 내보이는 호탕한 모습에는 요원들도 곧 경계심을 풀었다.

과연 실각한 대통령이 친하게 지낼만한, 러시아 스타일의 상남자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반 그 친구, 혹시라도 죽었으면 할 수 없지만 살아 있으면 잘 대해 주십시오. 그래도 나하고는 추억을 나눈 친한 친우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한 번 그 친구 소식을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피앙새, 근데 왜 내가 준 카드를 아직도 안 쓰고 있어요?"

"제가 그걸 어떻게 써요. 당신 돈을 함부로 써버리면 제가 돈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거밖에 안 되잖아요."

"저런, 돈이 많아서 날 사랑한 게 아니었나요? 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돈에서 나오는 자신감을 매력적으로 느낀 건 사실인데, 돈 그 자체는 아니에요. 돈 가지고 거들먹거리기만 하면 저질 남자였으면 오히려 마음을 안 줬을 거라고요."

"하하, 그랬군요."

어느덧 넷이서 함께 즐기는 여행처럼 돼버린 가운데, 요원들은 이제 경계심을 완전히 풀고 술도 진탕 마셨다.

하수영의 한 손은 언제나 다정하게 로마노프의 어깨나 허리를 안고 있었고, 보란 듯이 둘 앞에서 스킨십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미 하수영은 배 진수식 때 로마노프를 초청한 적도 있다.

요원들 입장에서는 둘의 사이를 의심할 이유가 없기에, 로마노프가 그의 여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머릿속에 새겼다.

***

탑층 객실 발코니에서 하수영과 로마노프는 난간에 나란히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러면 이제 비밀 안가에 끌려갈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그 정도로 위험한 건 아니었어요. 크렘린에서 저를 교섭인으로 인지한 게 조금 불안했던 것뿐이죠. 쿠데타세력 눈에 너무 띄면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러시아가 많이 불안한가 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