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98화
255 장 한파 그리고 봄 (7)
리철만은 맛의 쾌락에 잠겨 살았다.
하수영이 꼬박꼬박 보내오는 음식은 언제나 그의 혀를 쾌감에 젖게 해주었다.
너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가족들이 신기해서 손을 뻗은 적도 있었다.
"아버지, 저도 한 번 먹어보면 안됩니까?"
"너희는 안 된다. 이 음식은 오직 나만 먹을 수 있어."
"예? 어째서……."
"내가 이 음식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귀순까지 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한 맛이란 말이다. 너희들도 그렇게 되고 싶은 거냐?"
"아, 알겠습니다. 다시는 탐을 내지 않겠습니다."
하수영의 신신당부이기도 했다.
진정한 수영농장맛은 사람의 정신까지 휘두르는 힘을 가졌으니, 정신 수양이 되지 않은 가족들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하라고.
'철만이 너처럼 정신이 단단한 사람 정도는 되어야 그냥 맛있구나 더 먹고 싶네, 하고 넘어가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이거 먹었다가는 마약환자처럼 돼서 노예를 자청하게 될 거다. 가족들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지?'
'알겠습니다. 의원님이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리철만이 가족들이 못 먹게 질색하는 것은, 가족들이 음식맛에 중독될까 봐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가족들과 음식을 나누게 되면 자신이 먹을 몫이 줄어드니까.
그것이 바로 리철만의 진정한 걱정이었다.
또한 리철만 본인이 이미 음식맛에 중독이 돼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정작 본인만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
금단현상은 그 약물을 투여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리철만은 삼시 세끼 수영농장 맛을 섭취하고 있기에 금단현상을 겪지 않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맑고 날카로운 이성이 유지되고 있어, 본인이 이미 지독한 중독에 빠졌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 가족들은 조금 달랐다.
"어쩐지, 네 아버지가 고향에 올라 오자마자 내내 중독환자처럼 불안정하고 이상한 반응을 보여서 의아했는데, 그게 저 음식 때문이었구나……."
"어머니. 설마 수영농장에서 음식에 약을 타서 아버지를 조종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충성을 맹세했으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래도 네 아버지가 이제는 아주 멀쩡해 보이니까, 음식에 위험한 약같은 걸 탄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정말 아주 맛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는 걸까요? 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머니."
약물중독 환자들은 필연적으로 서서히 망가져 간다.
하지만 리철만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불안에 떨지는 않았다.
***
청담동에 눌러앉은 리철만은 한동안 저택에서 푹 쉬었다.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고, 국정원 면담에 있을 때에도 요원이 직접 자택으로 찾아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털어놓은 덕분에, 국정원은 그의 귀순을 의심하지 않았다.
김씨 왕조의 숨겨진 비자금 32억달러까지 고스란히 수영사채에 바쳤으니, 북한에서 알게 되면 암살자를 보내서 죽이고 싶어 할 것이다.
돌아갈 다리를 완전히 불살라 버린 리철만은 모든 의심을 완벽히 벗었다.
애초에 그는 군인이나 특수요원이 아니라, 돈 관리에 출중한 금융 전문가.
장기적으로 하수영 암살을 노린다는 의심도 비껴간다.
리철만은 주에 몇 차례씩 외출을 했다.
특별히 멀리 가지 않고, 동네 근처에서 혼자서 외식을 했다.
1인분이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까지도 가는 맛집들을 종종 둘러봤다.
별 3개짜리 음식을 먹고 난 뒤, 리철만은 몹시 만족스러워하며 가게를 나선다.
"음, 바로 이 맛이야. 이 구정물같은 맛. 아우, 퉤퉤퉤. 진짜 못 먹겠군."
남들은 인스타 핫플레이스니, 맛집이니, 연예인 단골가게니 하는 가게 들.
하지만 리철만의 혀끝에서는 간도 제대로 안 된 음식을 만드는 곳들이었다.
가게 주방장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리철만의 혀가 천상계의 맛에 익숙해진 나머지, 인간계의 맛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외식을 해서 혀에게 불쾌감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철만에게 이것은 주기적으로 필요한 절차였다.
"역시. 수영농장의 맛은 천상의 진미야. 일반 음식들과 비교하니까 매번 더 확실히 알 수 있어."
항상 극상의 맛의 쾌락에 잠겨 살지만, 가끔 일반 음식을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먹는 게 얼마나 맛이 좋은지, 그 감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미남미녀에만 둘러싸여 있던 연예계 매니저가 한 번씩 거리로 나가서 평범한 일반인들을 주기적으로 봐줘야, 아 내 주변이 다 미인들뿐이구나 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익숙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그러나 좋은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당연시하게 되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판단이 흐려지고 만다.
리철만은 그런 흐릿한 판단에 삼켜지는 걸 막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더럽게 맛없는 일반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그냥 집밥을 먹으면 되지만 아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에 그런 반응을 보일 순 없기 때문에, 가끔 외출을 하는 것이다.
"농축된 청담동 맛…… 그 놀라움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도 가엾군."
***
[3월 초부터 낮기온이 최고 30도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상청의 예측은 보기 좋게 틀렸다.
그것도 더 안 좋은 쪽으로,
"최고 기온이 30도 찍는다며! 이건 최저 기온이 30도가 넘었잖아!"
"이 구라청 개새끼들을 죄다 오체 분시해서 저잣거리에 널어놔야 할 것이로다!"
"오늘부터 기상청 놈들 죽이는 건 무조건 정당방위다. 정당방위! 내가 인정한다고오!"
하루 최저 기온 32도.
그러니까 가장 온도가 낮아야 할 새벽녘의 기온이 32도였다는 뜻이다.
때아닌 열대야에 전국이 난리가 났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아카시아꽃이 일제히 피어날 정도로 따뜻했다가 갑자기 한파가 밀어닥쳐서 꽃잎이 죄다 시들었다.
그게 며칠이나 됐다고, 30도가 넘는 열대야가 찾아온단 말인가.
사람들은 패딩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으며, 에어컨 사업부는 이른 호황에 비명을 질렀다.
에어컨 청소업체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일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처 청소를 하지 못한 주민들은 곰팡이 냄새 풀풀 나는 에어컨 바람에라도 의지해야 했다.
"도저히 에어컨 켜지 않고는 못 버틸 날씨다."
"미친. 3월 초에 30도에서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말이 돼?"
"설마 4, 5월에는 50도를 바라보는 건 아니겠지? 제발 그건 아니라고 해줘."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한국에서 50도를…… 그건 저기 아프리카 사막에서나 가능한 기온인데."
"거기는 건조해서 50도라도 버티지, 우리 한반도 습도에 50도 찍으면 그냥 다 죽는 거야. 다 죽는 거라고!"
"농담 아니라 진짜 여름에 더위병 나서 사람들 떼몰살 당할 수 있어!"
"에어컨! 에어컨이 필요하다!"
대중의 관심은 온통 에어컨에만 쏠렸다.
포털에서는 연일 에어컨 주문량이 폭주한다느니, 지금 예약을 해도 두달은 걸려야 설치가 가능하다느니, 에어컨 공장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출하가 늦어진다느니.
그런 기사들만 온통 내걸렸다.
3월의 열대야를 경험한 사람들은 당장의 더위를 해결하는 것에만 눈이 멀었다.
"떼죽음 당한 꿀벌들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꿀벌이 멸망하면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먹는 농작물의 70%이상은 꿀벌 덕분에 열매를 맺는 거예요!"
"소중한 꿀벌에도 관심을 기울여주세요!"
서울까지 올라온 양봉농민들이 피켓을 들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일목소리를 높였다.
벌들이 떼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그들은 할 수 있는 건 목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없었다.
고향에 있는 벌통은 벌 한 마리 없이 텅텅 비어 버렸으니까.
이른 되약볕 아래에서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목소리를 냈지만, 세상은 그들에게까지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꿀벌 사태가 아니라, 당장 열병에 다 죽게 생긴 게 더 급했으니까.
"어? 수영농장에서 온 차다!"
"하수영 농민회장님이 설마?"
수영농장 상호가 도색이 된 커다란 차량들이 줄을 지어 집회장 근처로 다가왔다.
차량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좌우에서 집회자들을 에워싸듯이 정지했다.
"수영농장에서 온 거죠? 지금 뭐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날이 너무 더워서 차양막과 선풍기를 틀어드리려고 합니다."
"차양막? 선풍기?"
"예. 잠시만 물러나 주세요."
특수차량의 뒤쪽 뚜껑이 열리며, 텐트가 펼쳐지듯이 거대한 차양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각각 안쪽으로 차양막을 펼치자 뜨거운 태양빛이 적당히 가려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특수차량에 설치된 초대형 선풍기가 좌우로 회전하며 강한 바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타죽을 것 같았던 것에 비하면, 훨씬 살 만한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수영 농민회장님께서는 혹시 집회장에 안 오십니까?"
"농민회장님은 지금 이것 외에도 다른 문제가 산적해 있으셔서요. 집 회장에서 함께하지는 못하실 거 같습니다."
"그분이 함께 해주시면 큰 힘이 될텐데……."
양봉 농민이 아쉬운 듯이 말을 흐리자 직원이 피식거렸다.
"농민회장님 같은 분은 이런 곳이 아니라 더 중요한 판에서 활약을 하셔야죠. 그게 피해 입은 양봉업계에도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부디 크게 내다보세요."
"다들 지쳐 있어서 그래도 회장님이 얼굴이라도 한 번 비춰주시면 큰 힘이 날 거 같습니다."
"제가 그 뜻은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직원들은 여러 개의 간이냉장고도 그 자리에 내려놓고 떴다.
그러면서 가볍게 투덜거렸다.
"아니, 날씨도 더워 죽겠는데 회장님이 여기까지 와서 얼굴을 비춰줬으면 좋겠다니. 해도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심정은 이해가 가는데 회장님이 여기 와주셨으면 하는 건 아니지. 괜히 기자들이 인터뷰 따서 이상한 기사 써갈기면 어떡하려고."
"물에 빠지면 누가 죽건 말건 나부터 물에서 나가려는 게 사람 심리라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동안 우리 회장님이 농가에 베푼 게 얼마인데."
양봉농가가 안 된 것은 이해하고, 동정심도 간다.
하지만 공사다망한 회장님이 집회에 와주셨으면 한다는 말은, 직원들 입장에서는 도가 한참 지나친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덥긴 너무 덥습니다. 옷 바로 갈아입어야겠어요."
"어차피 또 땀범벅 될 텐데 뭐하러 갈아입어? 의미 없어. 그냥 어디 사람 많은 실내 들어갈 일 있을 때만 잠깐잠깐 새옷 입어."
"아, 그렇게 하는 게 나을까요?"
"땀 젖는다고 갈아입을 거면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갈아입어야 된다. 젖는 용, 안 젖는 용, 이렇게 딱딱이분해서 나가는 게 낫지."
이게 어딜 봐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파에 수도파이프가 터지니 마니 하는 날씨란 말인가.
아스팔트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피어오르는 광경을 보며, 직원들은 차량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새삼 감사했다.
"진짜 캐리어 박사님 아니었으면 이 여름을 어떻게 보냈겠냐."
"아, 에어컨 발명자 그분이요?"
"그래. 그분 없었으면 진짜 다 죽었지. 그나저나 세상이 이렇게 미쳐가고 있어서야 원……."
"날씨 진짜 미쳤어요. 우리 아이들어른 되면 어떤 지옥이 되어 있을지 겁나네요."
"헬반도 되어 있을 건 확실한 거 같은데. 뜨거운 열지옥 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