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24화
241장 포도와 설탕 (2)
포도나무를 잔뜩 담은 컨테이너가 화물선에 차례차례 실렸다.
컨테이너 23,000개를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초대형 화물선은, 백두중공업이 건조해서 하수영이 인도받은 것 중 하나였다.
"한국의 조선 기술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군요. 이런 큰 화물선은 미국조선소도 쉽게는 못 만들 겁니다."
크레인이 컨테이너를 신는 것을 구경하며 코즈펠트가 감탄했다.
하수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민간 상선 만드는 건 세계 제일이죠. 잘하면 항공모함도 만들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한국의 기술력이라면 선체 자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독도급 상륙함만 봐도 알 거 같습니다."
"흠, 그래서 나중에 백두중공업에 항모도 몇 척 발주를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해군을 위해서입니까?"
"미국 것을 사서 쓰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만, 군사용으로는 안 팔 거잖아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팔린 포드 항모 2척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으니.
속도가 안 나오는 실패작이라서.
돈 문제가 심해서.
병원선으로만 쓰기로 제한해서.
배 운용 자체는 미군이 전담하기로 해서.
그런 이유들이 아니었으면, 포드항모 2척은 팔 수 없었을 것이다.
의회에서 무조건 제동을 걸었을 테니까.
"군사용으로 팔아준다면 저야 뭐 땡큐 하면서 살 겁니다. 혹시 중재한번 해보실래요?"
"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장담은 드릴 수 없습니다. 항모는 철저한 군사전략자원이라서요."
다시 말하지만, 병원선 항모 판매는 매우 예외적인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뭐, 전투기하고는 다르겠죠. 전 1, 2년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1, 2년입니까?"
"1, 2년 안에 미국에서 군사용 항모를 팔겠다고 나오지 않으면 백두중공업에 자체 제작을 발주해 볼까 하고요."
코즈펠트의 귀에는 전혀 우스운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제가, 아니, 로한 박사가 좀 케어를 해주면 그래도 몇 번 시행착오거치고 제대로 된 항모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로한 박사가 조선업 기술에도 조예가 있었습니까?"
"그럼요. 로한 박사는 못 하는 게 없습니다. 항공이든 조선이는 화학이는 의학이든, 뭐든지 다 나오는 도X에몽의 마법 주머니 같은 전생, 아니, 지식을 갖고 있거든요."
"청담 스코프 하나만으로도 로한 박사가 생명공학에 깊은 지식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영상신호를 뇌가 해독할 수 있는 시각 전기신호로 바꿔서 전송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시각중추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전 세계 내로라하는 생명공학자들이 로한을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청담 스코프 덕분이다.
"1, 2년, 기억하겠습니다."
"계약 따오면 브로커 수수료로 1%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것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하면 계약 좀 잘 따와요."
포드 항모 1척만 중개해도 수수료가 1억 달러가 넘어간다.
코즈펠트는 갑자기 의욕이 샘솟았다.
하수영은 눈썹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마지막 컨테이너를 싣는 크레인을 주시했다.
"그나저나 컨테이너에 포도나무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서 115만 그 루나 실어버렸네요. 원래 생각했던 10만 그루보다 11.5배로 늘었어요."
"나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거 다 심을 면적이 되기는 하나요? 황비버섯도 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면적이 좀 모자랄 거 같은데."
"걱정 마십시오. 농지는 더 늘리면 됩니다."
"더 늘릴 여유는 있나요?"
"네. 92세를 맞이한 농부가 한 분있는데, 아들이고 손주고 포도농장을 물려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코즈펠트의 말에 하수영이 반색했다.
"오, 그럼 그걸 살 수 있겠네요."
"네, 그 땅에서 포도농사를 계속 짓겠다고 하면 아마 기뻐하면서 농장을 팔려고 할 겁니다."
"다행입니다. 땅이 모자라서 수확물이 적을 걱정은 없겠네요."
선적을 모두 마친 배는 드디어 뱃고동을 크게 울리며,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갔다.
이제부터 아라비아 해역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거쳐, 지중해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진짜 해적 조심해야 됩니다."
"겨우 포도나무인데 뭐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요즘 해적 시장에서 제 화물선들의 몸값이 엄청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한 척만 납치하면 해적도시 팔자가 핀다고 다들 헛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대요."
"설마……."
"몸값으로 막 수십억 달러씩 요구하려고 벼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코즈펠트는 하수영의 얼굴에 어린, 묘한 기대감을 느끼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지? 꼭 마치 납치를 기대라도 하는 듯한…… 아니야, 그냥 걱정이 많으신 거겠지.'
자기 배가 해적에 납치되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후후, 제 화물선들의 패닉룸은 완벽하게 안전하죠. 폭탄으로도 뚫을 수 없는 두께에다가 겉보기에는 벽과 구분을 할 수가 없어, 해적들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을 겁니다."
"……."
"공기 및 물 순환, 통신 시스템도 완벽하게 되어 있고 공간도 넓고 쾌적해서 괜찮을 겁니다. 영화나 인터넷 같은 것도 무제한으로 가능하고, 아 방음도 되어 있어서 TV 소리 때문에 해적에게 들킬 염려도 없죠."
"……배가 납치되어도 확실히 선원들은 모두 안전하겠군요."
"그럼요. 배를 도크로 올려서 아예 해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패닉룸을 못 찾을 겁니다."
진짜 납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코즈펠트는 아라비아 해역에서 퀸루나 호위 임무를 수행 중인 북아메리카급 경항모, 청담함을 떠올렸다.
'아덴만 근처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이 난리를 피워도, 여차하면 청담이 도와줄 수 있겠지. F35 전투기도 실려 있으니까.'
코즈펠트는 진심으로 패닉룸이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빌었다.
시간은 금이다.
하루빨리 화물이 도착하고, 포도를 옮겨 심어서 내년 농사를 대비하는 게 중요했다.
***
화물선이 프랑스로 출발했지만, 코즈펠트는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렇게 본업에서 손 내려놓고 한국에서 오래 놀아도 되는 건가요?"
"괜찮습니다. 제가 회장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본사에서는 중대한 업무를 수행 중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그러게요. 우리가 정작 전투기 이야기는 정작 빵긋도 안 하는 거 알면, 록히드마틴 이사들은 꽤 서운하겠어요."
물론 그렇지 않다.
VIP 고객과 시간을 보내며 유대감을 쌓는 것 자체가 중요한 비즈니스이니까.
"그리고 오늘은 수영콜라 신제품시음이 있습니다."
"오, 아직 시음 안 하셨나 보군요."
"네. 해운 준비를 하다 보니 이리 저리 바빠서 시음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하게 됐습니다."
"시음도 안 해보고 덥석 믿고 포도 농사를 결심하다니, 절 많이 믿으시는군요."
"농작물에 관한 거라면 회장님이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혹시 블라인드 시음으로 하시나요?"
코즈펠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블라인드 시음으로 합니다."
***
코즈펠트 역시 수영설탕의 진면목이 몹시 궁금했다.
'정말 일반 설탕과 맛이 전혀 구분이 안 될까?'
설탕을 대신하는 인공 감미료는 많다.
입에서는 달면서도 건강한 식품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다.
그러나…….
'대체품은 결국 대체품일 뿐이지.'
그래 봐야 반쪽짜리.
코즈펠트 역시 패스트푸드와 콜라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군수산업의 바쁜 업무 현장에서 느긋한 식사는 사치였고, 패스트푸드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일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생활을 수십 년 했으니, 햄버거와 샌드위치, 핫도그, 그리고 콜라는 이제 한 몸이나 마찬가지.
부사장을 단 지금도 회사에서 업무에 치일 때면 햄버거와 콜라로 간단하게 처리하곤 한다.
'오리지널 콜라에 비하면, 다이어 트 콜라는 진짜 아니야.'
그는 건강을 생각해서 몇 년 전부터 다이어트 콜라를 먹기 시작했다.
설탕을 대신하는 인공 감미료는 제법 훌륭했다.
무가당 음료임에도 달달한 맛을 괜찮게 재현해 냈다.
그러나 매번 가짜를 먹다가도 어쩌다 한 번 진짜 콜라를 먹게 되면, '역시 이게 진짜지.' 라는 소리가 저 절로 나온다.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그 악마의 속삭임처럼 끈적거리는 질척한 맛은 가짜 감미료 따위로는 절대로 재현하지 못하지."
가짜는 절대 진짜를 넘어서지 못한다.
코즈펠트의 철학이었다.
전투기 제조에 몰두하면서 쌓은 철학이지만, 식품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짜는 진짜를 넘을 수 없다. 만약 진짜를 넘어서는 가짜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진짜일 뿐이지."
코즈펠트는 이제 수영콜라(오리지널)를 C콜라보다 더 좋아한다.
평생 먹어왔던 C콜라보다 더 입에 착 감기는 그 맛을 사랑한다.
비 오는 날, 습진처럼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습도 럼 질척거리는 끈끈한 그 단맛을 참으로 좋아한다.
부드러운 물과 흙의 분자 알갱이가 온몸의 피부를 감싸주는 듯한, 그래서 빠져나오기 싫은 늪과 같은 그 속박감에 흠뻑 젖곤 한다.
다만 C콜라를 더 자주 먹는 것은, 설탕 제로 콜라 때문이다.
수영콜라를 찾은 코즈펠트는 드디어 시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콜라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기존 설탕을 넣은 오리지널 수영콜라, 다른 하나는 수영설탕을 넣은 신 수영콜라입니다."
코즈펠트는 수십 번이 넘는 시음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양쪽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혀끝에서 두 콜라는 모두 똑같은 맛을 냈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온몸의 세포를 사정없이 사로잡는 그 끈적거리는 당류의 속박 같은 맛.
"이거 혹시 한 종류 콜라만 내놓고 차이를 구분하라고 몰래카메라 중인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정확히 반반으로 섞어 진행을 했습니다."
"내가 그냥 일반인이라서 구분을 못 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 미식가 20인을 초청해서 블라인드 시음을 했지만, 모두 맛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콜라 브랜드끼리도 진짜 기가 막히게 구분하는 사람인데, 일반콜라와 다이어트 콜라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수영설탕 역시 진짜 설탕이니까요. 단지 장내 흡수가 안 되고 그저 배출될 뿐이죠."
"역시 인공 감미료 따위는 가짜일 뿐이라는 걸 또다시 확인합니다."
코즈펠트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인간은 생존활동에 있어 필요한 탄수화물, 그중에서도 당류를 강렬히 추구하는 방향으로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 왔죠."
그렇기에 영양소가 오히려 풍부해진 지금, 그 진화의 결과는 비만과 성인병이라는 가슴 아픈 대가를 남겼다.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이미 그것을 원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신체는 당류에 대해 '맛있는 것'이라는 포박으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엄숙해진 코즈펠트의 표정에서, 수영콜라 직원들은 조금 당황했다.
"저어, 코즈펠트 부사장님?"
"수백만 년 이상 걸쳐 코딩된 그 명령어를, 겉모습만 흉내 낸, 수십년 역사도 안 된 인공 감미료 가짜따위가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이거 부사장님이 너무 흥분하셨는데…….'
"맛있다고 프로그래밍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찾을 수밖에 없는, 과잉섭취는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손이 가는 것."
코즈펠트는 다이어트 콜라를 먹을 때마다 오리지널 콜라에 대한 갈망을 참아야 했던 지난날을 문득 떠올렸다.
잠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그러나 인류, 아니, 수영농장은 마침내 답을 찾아냈군요."
드디어 가짜를 시장에서 퇴출시킬 때가 왔다.
"당류가 주는 맛에 대한 갈증을 무한히 충족시키면서도,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완전한 방법을 말입니다."
저급한 인공 감미료는 이제 그만 사라져 주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