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00화
236장 육 그리고 해공 (5)
천만 원.
평범한 가정 출신의 이십 대 초반 병장에게는 정말 엄청난 돈이다.
그런 돈을 전화 한 통으로 아무렇지 않게 입금을 해버렸다.
분대장은 눈앞의 신병이 정말로 대단한 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런 인물이 대체 왜 이런 곳으로 오는 거지?
어디 수방사나 계룡대 같은 곳에서 꿀 빠는 보직 같은 걸 하지 않고?
"분대장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잘 들으십시오."
끄덕끄덕. 끄덕끄덕.
"신병 폐하 납신다! 모두 신병 폐하를 영접하라!"
내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우렁찬분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래식 내무실 침상에서 나뒹굴던 소대원들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아, 분대장님 왜 안 하던 걸 하시는 겁니까?"
"김 뱀이 언제부터 신병을 저리 살뜰히 챙겼다고. 대충 데려와서 아랫놈들한테 휙 던지고 가더니 말이다."
"신병이 하도 오랫동안 안 오다 보니 김 뱀도 그동안 애가 탔지 말입니다."
"신병 폐하라. 그래, 요즘은 이등병이 아니라 이등별이라고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병사들은 분대장이 신병의 더플백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킬킬거렸다.
"야, 김 뱀! 뭐 하냐? 네가 왜 신병 떠블백 들고 있어?"
"김 병장님, 신병이 어지간히 맘에 드셨나 봅니다. 제가 보기에도 매우 똘똘해 보입니다."
저마다 신병을 향해 한마디씩 했고, 신병은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신병놀이는 글렀고, 야 신병! 어디 자기소개나 한번 해봐라."
말년병장 한 명이 드러누운 채로 입을 열었고, 분대장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다들 주목! 우리 신병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한다!"
"분대장님, 신병 그만 꿇리지 말입니다. 요즘 잘못 꿇렸다가는 애들이 마음의 편지로 영창 보내지 말입니다."
"주목! 주목!"
분대장이 겨우 소란을 가라앉히고, 신병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병 진독재입니다."
"우와, 이름부터 한번 살벌하네."
"군 생활 편히 하고 싶습니다. 소대원분들의 협조가 적극적으로 필요 합니다."
"……."
순간 분위기가 한껏 싸늘해졌다.
다들 하나같이 '미친, 폐급 중의 폐급이 왔어!'라는 표정이 되었다.
말년병장은 입이 떡 벌어진 채,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신병은 또 체음이다.' 라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짬이 안 되는 일이병들은 각을 딱 잡은 채, 험악한 소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분대장. 쟤 돌려보내. 저거 분명히 일주일도 안 돼서 큰 사고 쳐서 우리 소대 뒤집어놓는다. 소대장님이랑 쇼부를 치든 엎드려 빌든……."
"일주일에 백만 원씩! 전역할 때까지 자기 위로 무조건 준답니다!"
그때 분대장이 허겁지겁 말했고, 분위기가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고참 병장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김 뱀, 내가 말년이라고 지금 장난을 쳐도 너무 심한 건……."
"사실입니다! 전 한 달 치 벌써 받았습니다! 이 신병, 아니, 이분! 진짜 돈 많은 부자랍니다!"
"분대장님, 신병 놀이 대상이 잘못 되었지 말입니다? 왜 저희를 향해 신병 놀이를 하십니까?"
"김 뱀, 이건 좀 너무 재미없는 장난입니다."
하수영은 분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 명씩 차례대로 계좌번호 부르라고 하십시오."
일단 선입금부터 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
빠짐없이 백만 원씩 모두 받았다.
이제는 모두가 신병이 진짜 사회에서 잘나가는 부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동시에 그런 부자가 왜 이런 현역부대까지 굴러들어왔는지, 그 점이 의아했다.
"소대원으로서 병사 한 명의 역할은 충실히 하겠습니다. 부당한 내무부조리만 피하고 싶습니다. 전역하는 그 날까지 매주 백만 원씩, 꼬박 꼬박 챙겨드리겠습니다."
"우리 소대원이 40명인데 그럼 매주 4,000만 원…… 신병, 아니, 신병님. 그만한 돈이 돼요?"
"제가 지금도 밖에서 돈 굴리고 있는데 주 수익이 4억 원입니다."
"……."
"물론 우리만의 비밀입니다. 비밀을 누설할 경우 저는 모른 체할 겁니다. 배반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으시면 시도해 보시면 됩니다."
주급 100만 원.
현역 병사들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가고도 남는 거액이다.
'A급이 아니라 SSS급 신병이잖아!'
'진짜 신병 폐하가 맞네, 맞아.'
그렇게 황제 신병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다른 이병들은 휴식 시간에도 내무실에서 각을 딱 잡고 앉아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신병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편히 누워서 먹고 싶은 걸 먹으면서 TV를 보고 시간을 보냈다.
정작 고참인 이등병들도 그런 상황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자신들도 똑같이 신병으로부터 주급을 받기로 했으니까.
아니, 함께할 군생활이 기니까 자신들이 상병장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타 소대, 그리고 간부들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비밀을 누설한 놈은 내 손에 끝날줄 알아라. 절대로 다른 소대에도 자랑해선 안 된다. 입도 뻥긋하지 마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급체 들리게 하고 싶은 사람, 거수해."
황제 신병을 위한 그들만의 병영생활 비밀은 철저히 지켜졌다.
***
-재미있게 군 생활하셨는데요?
"내가 군대에서 보낸 시간만 다 합치면 왕조가 몇 번은 탄생하고 멸망했어, 인마. 그냥 군대는 가는 거 자체가 짜증 나는 거야."
-그런 것치고는 해군 원수 놀이는 재미있게 잘하고 계십니다만?
"뭐든 우두머리로 하면 재밌는 법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밑에서부터 병사로 군 생활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외의 다른 삶에서는 병사로 입대하지 않고 잘 피해 가셨나 보네요.
"장교로 가거나, 특수부대 능력자로 가거나, 해외로 이민 가거나. 뭐 일반 병사로 한국군에 입대할 일이 없었지."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병사들 매수해서 잘 지내셨던 거 같은데요. 누가 배반이라도 해서 소대가 뒤집어지기라도 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한 달도 아니고 매주 꼬박꼬박 들어오기 때문에 병사들은 더욱더 철저하게 기밀을 지켰다.
"나중에 가서는 내무 부조리고 뭐고 싹 없어지고 사단에서 가장 사이 좋고 화기애애한 소대가 됐지."
-마스터 성격에 주급만으로 끝내진 않았을 텐데요.
"에어컨하고 히터도 싹 달아줬지. 우리 소대만 달면 그러니까 대대 전체에. 전기료 때문에 벌벌 떨까 봐 발전기도 따로 기증하고, 한 달에 한번씩 걸그룹 위문공연 면회 불렀다."
-소대원들에게는 천국이었겠는데요. 대체 왜 트라우마가 생긴 겁니까?
"여하사 한 명이 나중에 들어왔는 데, 되게 예쁜 거야. 그리고 나도 몇 달 정도 갇혀 있으니까 그게 주체가 안 되더라고."
-설마? 사귀셨습니까?
"당연히 사귀었지. 근데 나중에 일이 터졌다. 새로 온 중대장 놈이 내 애인을 성추행했거든."
-헐, 미쳤군요.
"그래서 내가 부대 뒤집어놨다. 근데 그 중대장 놈이 육군 참모총장 아들이더라."
-이거 제대로 꼬였군요.
"총장 놈이 자기 아들 진급 안 막으려고 내 애인과 나한테 다 뒤집어 씌웠지. 병사와 여간부의 부적절한 관계로 몰아간 거야. 자기 아들 성추행은 쏙 빼놓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졸지에 난 영창 가고, 애인은 꽃뱀 돼서 무고죄로 군 교도소 갔다. 그걸 하루라도 참을 수 있겠냐?"
-못 참죠. 제가 아는 마스터라면 더더욱.
"내 인생에서 그렇게 극한까지 날 밀어붙인 적이 별로 없었어. 겨우 이틀 걸렸지. 48시간 걸려서 전생권능 하나 간신히 일깨웠다."
-그리고요?
"이미 전과자 돼서 수형 중인 애인의 명예와 자유를 1분이라도 빨리 복권시키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더라고."
-내란이라도 일으키셨습니까?
"내란이라니! 혁명 왕조 창설이라고 해야지, 인마."
하수영은 버럭 소리를 높이며 핀잔을 주었다.
"바로 육군교도소 쳐들어가서 애인 빼내 오고, 그 뒤부터 공권력과 붙었다. 이미 칼을 뽑은 이상 끝장을 봐야 했으니까. 외계인이다, 매드사이언티스트다, 이런저런 말도 많았지."
하수영은 그때를 아련히 회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결국 대한민국 무너뜨리고 왕조국가로 강제 전환시키고서야 부패한 육군의 부조리를 종결지을 수 있었지."
-뭔가 로맨틱합니다. 누명을 쓰고 갇힌 애인을 위해서 세상과 싸우고, 세상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정복할 수밖에 없었다니. 그래서 그 애인은 왕비가 되었겠군요.
"아니, 그냥 후궁 삼았는데?"
-…….
"어유, 지금도 후회한다. 그냥 그때 돈으로 잘 해결을 본 다음에 나중에 시간 들여서 천천히 멸문시키면 되는 건데. 지금 당장 다 때려 부숴야겠다는 분노를 못 참아서 건국까지 해버렸잖아."
-그래서 생긴 트라우마입니까?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너무 갑자기 크게 일 벌이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진짜 죽을 때까지 궁에서 일, 집에서 일, 외국에서 일, 일만 하다가 생 마감한 거 같네."
하수영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총장 놈이, 아니, 육군이 아주 조금만 공평성을 지켰어도 그렇게까지는 안 됐지. 이러니 내가 육군에 마음이 좋을 리가 있냐?"
-그동안은 용케 내색을 안 하셨습니다.
"항상 과거만 품고 살 순 없잖아. 지금 육군이 또 그때 육군하고는 다르고, 그래도 똥별들 하는 짓거리는 변함이 없어서 가끔 확 그냥 해군에 흡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더라."
-해군 흡수입니까?
"그래. 육군 따위는 필요 없어. 그냥 해군 지상전투사령부로 흡수합병되는 게 낫다."
해군 휘하 지상전투사령부라니.
육군이 들었다가는 아마 기가 막혀 발작을 일으킬 발언이다.
"어차피 나중 가면 탱크가 날아다니고 바다에 잠수도 하고 그러는데, 땅과 중력에 얽매여서 전투하는 일자체가 없는데, 육군이 계속 존재할 순 없지."
-가장 먼저 태어났지만,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될 병종이라…….
"누가 촌스럽게 땅에 발붙이고 걸 다니면서 전투하냐? 탱크 무한궤도도 사실 차가 너무 무거우니까 뻘밭에 안 빠지려고 만들어진 거지."
-중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육군의 취약점이긴 합니다.
"언젠가는 해군이든 공군이든 아무튼 휘하부대 지상전투사령부로 확 통폐합되겠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
해군과 공군 전투드론에 무선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하수영의 제안을, 국방부 장관은 당연히 쌍수를 들어 반겼다.
그는 육군 출신이었지만, 육군이 제외된 것을 그리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후배 놈들이 랩터 드론에 너무 심한 욕심을 부렸으니, 제외당하는 게 당연하지. 나도 군에서 10년 이상 떠나보니까 알겠더라고."
"어느 나라든 육군은 태생적으로 욕심이 너무 많아. 끝없는 식탐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쿠데타 국가들도 가만 보면 죄다 육군이 주체란 말이야."
"이 기회에 근뇌파 녀석들뿐만 아니라, 근뇌파를 방조했던 육군 지휘부 녀석들도 싸그리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겠군."
장관은 펜타곤까지 찾아와서 무선 전기 문제로 하수영과 자리 한 번 만들어달라는 레넌 총장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해군과 공군은 각각 10여 대의 고성능 무인기를 선별해서 무선 전기 수신칩을 달았다.
그리고 일부러 육군 주력기지 근처 상공을 끊임없이 배회하며 존재감을 한껏 알렸다.
군 최상위층 상황을 모르는 육군 장성들은 주력기지 근처를 거듭 훈련비행 하는 드론들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상함을 깨닫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 드론, 지금 대체 며칠째 땅에 안 내려오고 날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