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964화
230장 천기누설 (4)
"할아버지! 제가 보이세요?"
"그럼, 보이고말고."
소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어, 어떡하죠? 저, 지금 뭔가가 이상해요! 사람들이 제가 안 보이는거 같아요! 막막 저를 통과하고 다녀요! 이거, 이거 꿈이죠? 꿈인 거 맞죠?"
"꿈이 아니란다. 진정하거라. 네 몸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귀신이에요? 저 지금 귀신이 된 건가요? 그래서 지금 우리 둘이 대화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성주신이다."
왕세경은 가슴을 한껏 펴고 말했고,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주신? 그게 뭐예요? 끝에 신 붙는 거 보니까 올림푸스 신 뭐 그런 건가요?"
"대체 요즘 설화 교육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성주신을 몰라. 허허 참."
왕세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주변을 슬쩍 살피지만,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저승차사는 없었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저승차사들은 자기한테 할당된 망혼들을 데리고 병원을 나설 뿐이었다.
'명부에 이름이 있다면 절대 이럴리가 없지.'
명부에 이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 예정된 이로, 곧 저 승차사가 데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혼이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니는데도 차사가 계속 안 나타나는 걸 보면…….
'고의적인 살인?'
살인 피해자는 정해진 운명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명부에 이름이 없고, 차사가 늦게 찾아오거나 영영 찾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원혼이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된다.
'잠깐? 병원에서 살인이라고?'
퍼뜩 든 생각에 왕세경은 분노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 아이가 병원에서 떠돈다는 것은, 병원에서 살해를 당했다는 뜻이 된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어!'
왕세경은 다급해져서 얼른 폰을 꺼냈다.
"이사장, 날세. 지금 내가 로비에서 자사가 안 나타나는 혼을 발견했네."
-병원에서 해를 입은 모양이군요. 경찰에 신고하려면 증거부터 잡아야겠는데요.
"아직 자기가 죽었다는 걸 전혀 몰라! 혼도 뚜렷하고 눈빛도 생전 그대로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럼 가능성 있죠.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병원에서 해를 입은 것 같으니 아무래도,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검경도 함부로 못 하는 서해병원에서 난리를 치겠는가."
-뒤집는 거야 제 특기고, 사는 낙이죠. 유령에게 고맙네요.
왕세경은 소녀의 손을 잡아끌고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다.
주위 사람들은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 보니, 이게 이상한 자세로 빠르게 걷는 왕세경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이사장! 내가 왔네!"
"저도 마침 다 먹었습니다. 잠시만요. 안 보이는 걸 보려면 스위치를 켜야 해서요. 요즘 너무 안 썼더니 이게 녹이 슬어서……."
하수영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떴다.
소녀를 바라본 순간, 하수영의 눈썹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동공이 확대되고, 입술에 단단한 힘이 들어간다.
그것은 정제되지 못한 분노가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흘러나온 표정이었다.
왕세경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그런 익숙하지 않은 얼굴.
"자네…… 왜 그러나?"
"상희, 네가 왜 여기 있지?"
하수영을 본 소녀, 김상희의 혼도 조금씩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회장님…… 제가, 제가 보이세요?"
"대답해, 아니, 아니다. 미안하다. 누가 널, 어떤 놈이 널 이렇게 만들었냐?"
"모르겠어요. 차에 치였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나요. 정신을 차려 보니까 여기였어요."
하수영은 눈을 꾹 감은 채, 주먹을 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제나 유쾌하던 그가 저렇게 분노를 다스리는 모습은, 왕세경에게도 몹시 낯설었다.
"범석이가 쥔 생사의 키가, 이거였구나."
하수영이 들여다본 천기는 '이창영이 서자를 찾아 전 재산을 주고 사랑해 줘야 살 수 있다.'라는 것이다.
김범석이 쥔 생사의 키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것은 이창영의 천기에 포함되는 게 아니었으니.
"이미 천기는 한 번 틀어졌습니다. 이창영 회장은 전 재산을 주지 않았죠."
하수영은 거침없이 복도를 걸으며, 옆에서 숨이 차서 따라오는 왕세경에게 말했다.
"비자금인가?"
"네, 공식적으로 드러난 재산만 주고, 은닉 비자금은 여전히 쥐고 있었습니다."
"100조 원도 훨씬 넘을 거야. 해외여기저기 깊이 잠들어 있겠지. 나중에 현덕이 그놈 승계에 쓰려고 꽁쳐 논 거구먼."
김상희의 혼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건가?"
"저 아이,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안 죽었다고?"
"네, 생령입니다. 죽지 않은 상황에서 쇼크로 인해 강제로 혼이 빠져나왔어요. 아마 이식 수술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고 몸에 조치를 한 거겠죠."
"이창영이가 이렇게까지 악독한 놈은 아니었을 텐데, 살고자 하는 노욕이 참으로 무섭군."
"적합성 검사를 한 건 이창영 회장이 쓰러진 이후입니다. 아마 측근의 과잉충성이겠죠. 시기가 맞지 않아요."
"하긴, 현덕이 놈이 굳이 살인까지 해가면서 지 아버지를 살릴 만큼 막 돼먹은 효자는 아니지."
그룹을 승계할 수 있는 이현덕 입장에서는 그런 리스크를 짊어질 이유가 없으니.
"그래도 책임은 져야겠죠. 부하의 잘못은 곧 고용주의 잘못이니까요."
"사용자의 무과실 책임주의, 옳은 정신이지. 아참,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간다고?"
"다 왔습니다."
하수영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김상희의 몸이 머무르고 있는 수술실의 위치와, 신체가 뿜어내는 혼에 대한 갈망이.
마침내 수술실 앞에 도착한 그는 두 손으로 문을 잡아서 강제로 열었다.
드드드드!
문의 구동모터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하수영은 수술실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그곳에는 뇌사판별을 하기 위해 나온 이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이들이 당황해서 하수영을 돌아봤다.
"누, 누굽니까?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요!"
"혹시 하수영 의원님? 아니,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다들 손 떼고 물러나십시오! 살인범죄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사, 살인이라고요?"
그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하수영을 보는 표정에는 당혹스러움과 불안함이 가득했다.
한창 응급환자 뇌사판별 중인데, 느닷없이 살인이라니.
하수영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와 살인이라는 단어가 준 충격 때문에, 그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왕세경을 보는 줄 알겠지만, 사실은 그의 옆에 있는 김상희를 보는 것이다.
왕세경이 김상희를 슬쩍 밀자, 혼이 순식간에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비록 청담수영병원에서 멀어져 있어 약해진 상태지만, 성주신이 가지는 권능이 제대로 빛을 발했다.
"충격기 가져와!"
하수영이 날카롭게 명령하자, 한 간호사가 정신없이 헐레벌떡 가져왔다.
의사 한 명이 눈을 부릅뜨며 말렸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비의료인이 함부로 만져서는!"
"생체 해부는 10만 번도 넘게 해봤다! 너보다는 더 잘 알아!"
하수영은 충격기를 뺏어 들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맹수가 이빨을 드러낸 듯한 위압감에 짓눌려,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었다.
전기가 충전되고, 하수영은 김상희의 가슴에 충격기를 댔다.
그리고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큰 진심을 담아 힘껏 신어를 외쳤다.
"살아나라!"
파지직! 파지지지직!
순간 수술실 전체에 불꽃이 튀며 요란한 스파크가 일더니, 불이 나가버렸다.
신어가 발한 충격으로 수술실 안에 있던 모든 전기설비가 나가 버린 것이다.
"으, 으으……."
그 순간 김상희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수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돌아보다가 의사 중 최고서열자를 가리켰다.
"거기, 박신중 의사."
"네? 넷!"
"사람 가장 많은 병실에 집어넣고, 잘 지켜라. 주사 하나, 물 한 방울도 전부 네가 책임지고 검수해라."
"이사장, 걱정 말게. 내가 옆에 꼭 붙어서 지켜보겠네."
"이 환자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나도 몹시 궁금하니까 한번 요령껏 해봐."
"바, 반드시 제대로 지키겠습니다!"
뇌사 판별 단계까지 갔던 응급환자가 눈앞에서 살아났다.
상황분별을 떠나서, 의료인들을 한번에 휘어잡을 만한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그들은 실제로 논리가 아닌 상황에 몸과 마음이 제압당한 상태였다.
"그럼 부탁합니다. 부이사장님."
"그래. 자네는 얼른 가서 다른 일을 하게."
하수영은 등을 획 돌렸다.
***
수혈을 한 지 며칠이 지났고, 부친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간은 좋아졌으나 심장이 급속히 망가져서, 당장에라도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이다 보니 김범석은 병문안을 위해 VIP실을 매일 들러야 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이지만, 뒤늦게라도 자식으로 인정해 주고 몇 조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증여해 준 사람,김범석은 진심으로 부친의 쾌유를 빌고, 또 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호자 대기실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뭐요? 우리 상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네. 안타깝게도 뇌사 상태인 거 같습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상희가! 상희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혹시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마음에 불손이 섞여 있어서 이런 벌을 받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라고요? 우리 상희가 아버지, 아니, 회장님과 조직 적합성이 일치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러니 어서 결심을 하게, 마음은 안타깝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회장님도 지금 한시가 위중하다네."
병원장이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권유했고, 김범석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 생각 좀 해야겠습니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빨리 결정해야 장기 손상을 막을 수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회장님은 죽어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서둘러 결정을 해주게."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평소 그렇게 또렷했던 사고의 흐름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기 일치야 혈족이니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하필 교통사고 시기가 이렇게 절묘하게 겹친다?
생각해 보니 사고가 난 지역도…….
'여기서 먼데? 굳이 이 먼 서해병원까지 응급수송을 했다고?'
의심의 화살은 처음에는 이현덕 등 형제자매와 친족들을 향했지만 혼란만 가중되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기증받으신다고 해서 몇 년이나 더 살겠나? 그거 더 살자고 손녀딸 배 갈라서 황천길 곱게 못 보내는 것도 못 할 짓이라고 보네."
"……기증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내 눈치 봐서 기증을 할 필요는 절대로 없네. 나라면 사랑하는 딸, 마지막에 더는 흉터 없이 고이 보내 주겠네."
이현덕은 단둘이 있을 때 은밀히 기증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그룹의 왕으로 즉위를 하기 위해서라면, 부친이 죽게 놔두는 게 낫다는 것이다.
다른 형제와 친척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얼마 전 적극적으로 채혈을 하는 모습과 상반된 이미지에 환멸이 들었지만, 그 진솔한 욕망만큼은 또렷했다.
이현덕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거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천기를 조금 볼 줄 알거든.
언제고 하수영이 했던 말이 그의 의심을 부채질하며, 확신으로 담금질하고 있었다.
뭔가 있다고, 지금 슬퍼할 때가 아니라고, 분노를 해야 할 때라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우선은 딸아이 얼굴을 보러…….
콰당!
"병원장 어딨어! 당장 나와!"
"윽!"
"어, 범석이냐? 미안, 너 인마 지금 그럴 때가 아니고 1002호부터 가봐."
VIP실에 들이닥친 하수영은 이리 저리 돌아보다가 조소를 흘렸다.
병원장이 거기 있었다.
"너냐, 감히 내 외거노비를 건드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