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95화
217장 즐거운 목장 경영 (4)
윤선혜는 아들을 데리고 캠핑 카라 반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망할 영감탱이들 같으니라고,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나이 들어서까지 손에 흙 묻히면서 사는 거지."
"진짜 엄마 말 안 들으면 나도 나중에 그 할아버지들처럼 사는 거야?"
"그러엄. 성격 고약한 거 봤지? 사람이 나이가 들었으면 지환이 할아버지처럼 인자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얼굴에 들어찬 거라고는 고집뿐이잖니."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서 수박을 먹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엄마, 아빠한테 전화 왔는데?"
"이이는 회사에 있다는 양반이 무슨 일로? 여보세요."
-어, 당신. 나 지금 아버지 모시고 거기 금산락읍 내려가는 중이야.
"아니, 왜 아버님까지 모시고 내려 와요?"
모처럼의 캠핑인데 시아버지까지 모시면서 지내야 한단 말인가?
윤선혜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거기 인사드릴 분이 있어서 내려가는 거니까 당신은 상관 말아. 혹시 당신도 같이 인사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는 해두고.
"이 시골 자락에 인사드릴 사람이 누가 있어요?"
-거기 수영목장이 있잖아. 하수영회장님이 마침 내려가 계신다고 하더라고.
"어머, 그래요? 별일이네."
윤선혜 입장에서는 촌구석에 있는 서해전자 대리점을 이현덕 부회장이 찾았다는 것과 동급일 정도로 의외였다.
-그리고 그분 후원회도 같이 내려가 계시는데, 우리 회사에 도움 주시는 분들도 많아. 그래서 인사드리려고 급히 내려가는 거야.
"난 그런 자리에 나가기 싫은데."
-그래도 잠깐 인사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
"알았어요, 알았어."
윤선혜는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준비해서 지환이 데리고 여기로 빨리 와. 네비 주소 찍어줄게.]
***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뒷좌석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희야, 나 지금 옷차림 안 이상 하냐? 한 번 봐다오."
"문제없습니다. 아버지. 아니, 사장님."
"이렇게 단체로 인사 올릴 기회가 올 줄이야. 네가 진짜 큰일 해줬다."
"아뇨, 전 승마 클럽 활동한 것밖에 없는데요. 거기 인맥이 장난 아니라고 친구한테 소개받아서 들어갔던 거고요."
"장난 아니긴 한가 보구나. 클럽주가 하수영 후원회 멤버라니. 거기는 아무나 쉽게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우리 대출상환일이 이제 몇 달 안남았죠?"
"연장하려면 잘 보여야지."
(주)선주건설이 진 700억 대출은 원래 타은행 대출이었던 것을, 수영사채가 인수한 것이다.
수영사채 출범 이후, 예치금과 주거래의 대대적인 이동 과정에서 수영사채가 일부 대출계약도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한 은행들이 철퇴를 맞았을 테니까.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고, 두 부자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내렸다.
200여 명이 넘어가는 작업복 차림의 노인들이 밀짚모자를 등 뒤로 매고, 막걸리와 고기를 먹고 있었다.
두 부자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먼저 알아본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요?"
"저희는 서울에서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저는 박선주, 이쪽은 제 아들 박진희라고 합니다. 회장님."
"아아, 어서 오시오. 여기 앉아서 한 잔 드시오."
노인은 얼른 자리를 만들어주었고, 둘은 황송해 하며 앉았다.
잠시 후 승마 클럽주 노인이 나타났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안 와도 된다니까 뭣 하러 굳이 내려왔어."
"아닙니다. 어르신들 즐겁게 한잔하시는데 꼭 인사 한번 올리고 싶어서 내려왔습니다."
"내가 말 전했으니 이제 다들 올거야. 자기들 얼굴 보러 내려오는거 같아서 그 친구들도 미안해하고 있거든."
"감사합니다. 회장님."
재벌 회장들만 모인 야유회에 단둘이 참석한 신입 사원이 이런 심정이 리라.
두 부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인사를 올리고, 술도 얻어 마셨다.
그저 노인들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태풍을 맞아가며 기어가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아, 박선주 사장님이시라고? 박청아 의원한테 한 번 이야기를 들은 거 같아."
"영광입니다. 회장님. 제가 한 잔 따라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선주건설이야 임대료 한 번 안 밀리고 꼬박꼬박 입금하는 좋은 임차인이지. 다른 임차인들도 전부 다 선주건설 같았으면 얼마나 좋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선주 건설도 대박 하나 터뜨려서 곧 사옥 짓고 나가야지. 우리 서린 타워에 들어온 임차인들이 하나같이 죄다 잘 돼서 나갔어요."
아들 박진희도 진땀을 흘리며 노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분들 한 분 한 분이 최소 천억대 이상의 자산가들……."
심지어 절반 이상이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숨은 알부자들이다.
본래 자기들 잘난 맛에 살아야 할 노인들을 이렇게 모이게 만든 구심점, 하수영.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근데, 의원은 어디 갔나? 인사 한 번 시켜주려고 했더만."
"잠시 목장 둘러본다고 아까 나가던데? 곧 돌아오겠지."
"하여튼 부지런한 건 알아줘야 해요. 아, 박 사장. 혹시 청담동의 하수영 의원이라고 아시는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건설계에서 그 존함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60이 넘은 박선주는 청년처럼 씩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독도와 제주도를 잇는 해상다리, 그것만으로도 그분은 우리나라 건설업계에 큰 획을 남기셨습니다. 건설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마침 저기 오는군."
"하여튼 주인공이라니까.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지."
박 부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돌렸다.
흙 묻은 부츠에 멜빵바지, 아무렇게나 등에 걸쳐 맨 밀짚모자.
영락없는 시골 농부의 모습이지만, 특이한 게 있었다.
바로 사람이 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삽.
소형 기중기에 달려야 할 버킷을 삽머리 대신 매단 것이다.
"하 의원, 여기 서울에서 내려온 선주건설 박선주 사장일세."
"반갑습니다. 하수영입니다. 식사는 하셨나요?"
"영광입니다, 의원님. 식사는 아직 못 했습니다만……."
"그럼 안 되죠. 식사부터 합시다."
그리고 하수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근사한 고기 바베큐를 종류별로 만들어냈다.
각종 산나물과 버섯 등 채소 곁들임, 고급 백탄의 초고화력으로 끓여낸 전골까지.
두 부자도 접대를 위해 온갖 고급 레스토랑은 많이 돌아 다녀봤다.
하지만 하수영이 산지에서 만들어낸 만찬에는 감히 견줄 수가 없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죠."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부자는 조용히 기겁했다.
하수영이 어른 허벅지보다 굵은 뼈다 귀 살점을 들고 먹기 시작한 것이다.
10인분은 넘어 보이는 고기가 말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으, 역시 시골에서는 막걸리지."
"프라임컴퍼니에서 막걸리는 언제 내놓는 건가?"
"곧 내놓을 겁니다. 요즘 쌀이 너무 남아돌아서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하거든요."
하수영은 커다란 동이에 막걸리병 여러 개를 한꺼번에 콸콸콸 부은 뒤, 한 번도 입을 떼지 않고 원샷으로 삼켜 버렸다.
박선주 부자는 질린 눈으로 그 광경을 봤다.
'생긴 건 곱디고운 호리호리한 청년인데, 완전 상남자로구나.'
'건설 짬밥 좀 먹었다는 친구들도 상대가 안 되겠어.'
건축주가 공사현장에서 저런 모습을 한 번 보이면, 아마 인부들이 다 기가 죽지 않을까 싶다.
"의원님, 식욕이 대단하십니다."
"힘든 농사일 하려면 많이 먹어야 해서요. 고봉밥이라고도 하잖습니까."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금융권 엘리트이신데, 속은 아주 사내이십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박선주는 순식간에 하수영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들었다.
접대를 위해서 쓸개고 간이고 다 빼놓고 염치 불문하고 내려왔는데, 만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팬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래서 이 많은 강남 알부자 어르신들이 몰려든 것인가…….'
말로는 설명 못 할, 그냥 저절로 사람을 당기는 힘이 그에게 있었다.
박선주는 3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뤄낸 그의 신화가 어쩐지 납득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여, 여보? 다. 당신하고 아버님이 왜 여기 있어요?"
다소 겁에 질린 며느리의 목소리가 박선주를 일깨웠다.
그는 윤선혜를 돌아보며 일어났다.
"오, 며늘아가 왔니? 진희 네가 불렀냐?"
"네, 아버지. 여보, 인사드려. 여기 이분들은 하수영 의원님을 지지하시는 후원자들이신데, 우리 회사가 평소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어."
"네?"
윤선혜는 말 그대로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후원회 부회장, 허허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윤선혜는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이 경련했다.
"이거이거, 우리 박 사장 며느리 되시는 분이었구먼. 세상이 참 이렇게 좁아요."
"이런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우리가 좀 더 잘 대접을 해드렸어야 했는데."
"아이고, 박 과장 안사람 되는 분이었어? 어서 이리 와서 앉아요."
노인들의 분위기만 봤으면 두 부자도 웃으며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윤선혜의 안색이 불길한 느낌을 심어 주었다.
"회장님들, 혹시 저희 며느리가 무슨 실수라도?"
"으응으응,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까 저기 아래에서 슬쩍 마주쳐서 덕담 한마디씩 주고받은 게 전부라네."
"이리 와서 앉아요. 술 한잔해요."
"네가 박 사장 손주로구나? 이리와서 할아버지들이 주는 고기 한 점먹거라."
"우리 하수영 농민 회장이 피땀 흘려 키운 농작물을 먹여서 키운 고급 한우란다. 아주 맛있을 게야, 허허."
"와아, 감사합니다!"
아들은 그저 고기를 준다니까 좋아서 자리에 덥석 앉았다.
윤선혜도 창백하게 질린 채로 자리에 앉았지만, 초점이 풀린 채로 입을 열지 못했다.
두 부자는 그걸 보고 알아차렸다.
분명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노인들이 전혀 문제 삼지 않고 허허롭게 웃으며 대해주는 판국에서, 자신들이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진희야, 웃어라.'
'네, 아버지.'
두 부자는 비틀려지는 입가의 근육을 억지로 당기며 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회장님들, 아무래도 제 안사람이 몸이 안 좋은 듯해서 먼저 데리고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가정부터 챙겨야지. 우리는 염려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봐요."
"네, 염려 마십시오."
박진희는 적당히 분위기를 봐서 처자식을 데리고 일어났다.
그때 하수영이 술기운에 조금 벌게진 채로, 아들 지환을 보며 말했다.
"거기 어린 친구, 집에서 엄마 말씀 반드시 꼭 잘 듣고 자라야 한다? 알았지?"
"가, 감사합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박진희는 부친의 눈짓을 받고 얼른 처자식을 데리고 그곳을 떴다.
분위기는 여전히 밝았고, 노인들은 웃으면서 먹고 떠들고 있었다.
박선주는 후원회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최우석 앞에 다가가서 술병을 높이 받쳐 올렸다.
최우석이 웃으며 빈 잔을 내밀었고, 박선주는 조심스레 술을 따른 뒤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제 며느리가 회장님들께 무슨 실례를 한 모양입니다. 제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함이니, 부디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응, 실례를 하긴 했지."
"부의장님, 죄송합니다!"
"괜찮네. 우린 신경 쓰지 않으니까."
"맞아, 맞아."
"아까 자네 며느리가 나타났을 땐 얼마나 놀랐다고. 세상이 이렇게 좁단 말이야?"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고 각본이지, 각본이야. 누군가의 각본."
"뭐, 그래도 재미있었어."
"우리는 신경 안 쓰니까 박 사장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어."
다들 웃으면서,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다고 말을 해준다.
그러나 박선주는 오히려 가슴이 조여 들어가는 듯이 두려움을 느꼈다.
특히 하수영이 가장 눈에 박혔다.
'700억 대출 상환 연장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