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94화
217장 즐거운 목장 경영 (3)
하수영과 후원회 노인들의 안색이 싹 굳었다.
그들이 어디 가서 저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볼 일이 있겠는가.
하수영이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부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공직이 있는 귀한 몸이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닐세."
"어르신, 하지만 분노하신 상태에서 잘못 나섰다가는………."
"어허, 내가 지금 분노한 것으로 보이나?"
"그럼?"
"흥분해서 설레기까지 하는군. 평화롭게 고기 뜯고, 농가 체험만 하다가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슴 뛸 일이 생길 줄 어찌 알았겠나?"
부회장은 한껏 의젓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흙이 잔뜩 묻은 가죽 부츠와 멜빵바지, 그리고 더러운 삽.
영락없는 시골 영감이다.
"이봐요, 거기 애엄마 되는 양반. 우리가 지금 다 들었소."
"뭐, 뭐라고요? 뭘 들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을 해놓고 왜 잡아떼시오? 공부 못하면 저 노인들처럼 나이 들어서도 힘들게 산다니. 아이 교육을 그런 식으로 하면 쓰나."
"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엄마, 그렇게 말했잖아?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저 할아버지들처럼 힘들게 산다고."
"지, 지환이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여자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펄쩍 뛰었다.
사과 따위는 절대 입에 담지도 않을 표정.
부회장은 오랜 연륜을 통해 한눈에 그것을 알아봤다.
그러나 절차에 따른 명분은 필요하다.
명분이 충분히 갖춰지면 더욱 우아하고, 그리고 잔혹하게 상대를 밟을 수 있다.
명분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더 마음껏, 거칠게 밟아도 주변의 찬사를 받는다.
"우리 영감들이 그래도 열심히 살면서 자식들도 잘 키웠고, 나름 좋은 일도 많이 하면서 살았다오. 가진 게 적으나마 베풀 줄 아는 삶을 누렸지."
"이봐요, 영감님.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니까 왜 자꾸 헛소리하는 거예요?"
"그리고 노동이란 본래 신성한 거요. 거대 자본도 결국은 노동력의 촘촘한 응축이 쌓이고 쌓여서 구축된 것, 그런데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노동을 천시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건 옳지 못하오."
"아니, 진짜 이 미친 영감이! 왜 자꾸 바쁜 사람 붙들고 헛소리냐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기회를 주겠소. 우리 모두 앞에서 정중히 사과하시오. 그게 아이의 교육에도 도움이 될 거요."
"흥! 천박한 흙 노가다나 하는 영감놈이 아주 입은 먹물 듬뿍 처바르셨네! 지환아, 가자!"
그리고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후다닥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사라지는 걸 보면, 자신도 창피한 마음은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다들 삽을 든 채 험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겁이 나서 떠난 걸 수도.
부회장은 온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고, 하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하 의원이 도와줄 필요는 없네. 우리도 이 정도 힘은 있어."
"제가 돕는 게 오히려 즐거움을 깎아 먹을 거 같은데요? 그건 돕는 게 아니죠."
"역시 하 의원은 우리와 잘 통한다니까. 그러니 이렇게 우리들이 하의원 주변에 모여든 거겠지."
부회장은 비서와 통화를 연결했다.
"박 비서, 아줌마 하나 좀 조사해 줘야겠어. 자세한 설명은 프리덤을 통해서 듣게."
-네, 회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고하게."
전화를 끊은 부회장(후원회 부회장이란 의미)의 눈에 기분 좋은 마음이 넘실거렸다.
"자, 하 의원. 우리가 이제 뭘 하면 되나?"
"여기 퍼낸 계곡 돌과 흙을 저기 덤프트럭에 옮겨 담을 겁니다. 저도 같이 할 거고요."
다른 노인이 나서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뭐가 들어서기에 이렇게 파헤치는 건가?"
"위쪽 계곡에서 관광객들이 버리는 쓰레기들이 이 지점에서 하천으로 합류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쓰레기 포집 시설을 설치할 겁니다."
"아하, 하천 정화를 위해서군. 그런건 반드시 필요하지."
"보다시피 중장비가 들어와서 작업을 하면 주변이 다 망가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 손으로 하게 됐습니다."
"당연하지. 보니까 소형 포크레인도 들어오기 힘들겠는데."
"중장비 들여온다고 정작 주변을 다 망가뜨리면 진짜 배보다 배꼽이 큰 거지."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다.
모처럼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 체험을 한 노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인부들도 서울에서 관광차 내려온 노인 그룹이라는 걸 알고는 살갑게 대했다.
그리고 다들 하수영의 활약에 혀를 내둘렀다.
"저게 사람이여, 인간 굴삭기여?"
"굴삭기 삽으로 저렇게 팍팍 퍼담아서 나른다고? 아유, 나는 저거 반의반도 못 들 거 같은데."
하수영은 소형 굴삭기용 버킷을 삽자루 끝에 달아서 돌과 흙을 팍팍나르고 있었다.
경력 좀 먹었다 싶은 인부들도 그 장면에는 눈을 비비고 믿지 못했다.
"저 정도는 해야지 소 100만 두를 갖추니 마니 할 수 있는 거구먼."
"대체 어려서부터 뭘 먹고 컸기에 저렇게 힘이 장사일까?"
"올림픽 같은 데 나가면 그냥 메달이란 메달은 다 휩쓸겠는데……."
새참 타임이 되자, 농장에서 소, 돼지, 오리 고기를 바리바리 실어서 보냈다.
다들 작업 도구를 내려놓고, 화덕에 둘러앉아 그릴에 구워지는 고기들을 즐겁게 뜯어냈다.
"이야, 진짜 맛있는데."
"힘들게 일하고 나서 먹으니까 훨씬 더 맛있는 거 같아."
"역시 하 의원 말이 맞았어. 음식을 더 맛있게 먹고 싶으면 땀을 흘린 다음에 먹으라더니."
하수영은 쉬지 않고 고기를 구우면서 말을 받았다.
"원래 야외에서 먹는 게 맛있고, 멀리서 먹는 게 맛있고, 일한 뒤에 먹는 게 맛있고, 맛있는 게 더 맛있습니다. 그 넷을 합쳐놨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겠죠?"
"박씨! 부회장! 아까 조사 맡긴 건 어떻게 됐나? 아직도 결과 안 나왔어?"
"덤이야, 어떻게 된 건지 박 비서한테 확인해 봐."
-연락이 왔습니다. 다만 주인님의 즐거운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제가 조금 후에 알림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이 딱 좋지."
-예, 그 여자의 이름은 윤선혜, 전 업주부이고 남편은 (주)선주건설 과장입니다.
"선주건설? 누구 선주건설 아는 사람?"
"난 모르는데."
"나도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작년 매출이 얼마야?"
-작년 매출은 2,500억 원입니다.
"건설사가 매출 2,500억이면 뭐 작디작은 곳이잖아."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나왔고, 각 프리덤들이 열심히 주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의 압구정빌딩 서린타워에 입주해 있는 건설사입니다.
"아, 생각났어. 거, 사장은 아주 싹싹하고 예의 바르던데 직원 마누라는 왜 그 모양이래."
-윤선혜의 남편인 박진희 과장은 박선주 사장의 친아들입니다.
"뭐야, 사장 며느리였어?"
또 다른 노인도 보고를 받았다.
-주인님이 부산 서면에 짓고 계신 상가빌딩 1차 하청으로 참여한 기업중 하나가 선주건설이군요.
"나하고는 또 그렇게 얽혀 있었어?"
그리고 또 다른 노인도.
-박선주 사장의 주요 인맥 중 하나가 박청아 서울시의원입니다.
"청아? 내가 10년 넘게 데리고 있다가 독립시킨 그 청아 말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다시 또 다른 노인도.
-박진희 과장은 주인님의 승마 클럽 회원입니다. 3년 전에 가입했고, 올 초에도 주인님께 새해 인사를 올렸습니다.
"아, 듣고 보니 기억이 날 거 같기도 하네. 그럼 아까 그 여자가 그 친구 와이프였단 거지?"
-네.
여기저기서 말이 쏟아져 나왔다.
10명이 넘는 노인들이 한두 다리 이상 건너면 선주건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었다.
대충 인맥도가 정리되자 부회장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먹고살려면 우리 '하수영 사무실'과 연결이 안 되어 있을 수가 없지."
"하다못해 시골 촌구석에서 편의점하나를 하려고 해도 엮이는데 말이지."
"근데 하 의원도 뭔가 연결되어 있을 거 같은데. 하 의원은 뭐 없나?"
"글쎄요. 제가 농사일 말고는 직접 챙기지 않는 주의라서. 프리덤, 뭐 연결돼 있는 거 있냐?"
-자잘하게 연결이 된 게 꽤 있긴 합니다만…….
"큰 거 하나만 콕 집어서 말해 봐. 다른 어르신들과 종목 겹치는 건 빼고."
-선주건설은 수영사채에서 700억대출을 받은 상태입니다.
잠깐의 정적.
이윽고 후원회 노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박수를 짝짝짝 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청담동을 수호하는 용사. 한 방이 굉장히 묵직하구먼."
"빚 700억 한 방이면 다 끝나는 거지."
"내 승마 클럽 신입이라는 건 부끄러워서 이거 명함도 못 내밀겠는데?"
"내가 부끄러움을 만회할 기회를 줌세. 지금 전화기 들고 박진희 그 친구한테 연락해."
"내가?"
"그럼 그런 자질구레한 건 당연히 막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 나이에 막내 소리를 들을 줄이야."
"돈 많으면 형님이고 돈 없으면 막 내야. 인생사가 안 그런가?"
"알았네, 알았어."
승마 클럽주 노인은 투덜거리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었다.
-앗, 회장님! 박진희입니다! 어쩐 일로 다 연락을 주셨습니까?
"응, 자네가 선주건설 다닌다고 했었나? 내가 친구들하고 체험 관광왔다가 거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야."
-네네! 맞습니다! 선주건설이 제 직장입니다!
"선주건설이 압구정 서린타워에 입주해 있지 않은가?"
-네네! 맞습니다!
"여기 있는 친구 중 하나가 서린타워 건물주거든."
-아니, 그런 우연이! 정말 놀랍습니다!
"혹시 춘부장께서 선주건설 대표되시지 않나? 내 친구가 박청아 의원한테 이야기를 들었다 하네."
-맞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친구분께서 박청아 시의원님과는 어떤 사이이시기에…….
"그 친구가 청아를 한 10년 밑에 데리면서 사람 만들어놨었지. 지금도 청아가 명절 때만 되면 인사드리러 찾아온다네."
-그, 그렇군요!
박진희의 음성에 더욱 빡센 긴장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강남 사교 목적으로 가입한 승마클럽 회장이 실없는 소리를 할 리는 전혀 없고, 인맥이 무시무시하게 얽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잠깐만, 내 친구 하나가 지금 그러는데 서면에 짓고 있는 작은 상가 빌딩에 선주건설이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묵호빌딩! 묵호빌딩이 맞습니까?
"그건 모르겠대. 그 친구가 가진 빌딩이 어디 한두 개여야 말이지. 서면역 1번 출구 나와서 바로 보인다고 하는데."
-묵호빌딩 맞습니다! 이럴 수가! 회장님 지인분들 인맥이 저희 회사와 이렇게나 끈끈하게 엮여 있었다니요!
"하하, 우리 하수영 후원회 사람 수가 많다 보니 이런 일도 있는 게지."
-……지금 하수영 후원회라고 하셨습니까? 혹시 청담동 지역구 강남구의원 하수영 의원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내가 말을 안 했군. 내가 여기 후원회 멤버 중 하나야. 지금 후원회 노인네들끼리 다 같이 충청도로 놀러 왔어."
-그럼 하수영 의원님도 혹시………?
"여기 금산락읍에 그 친구 목장이 하나 있어서 놀러온 걸세. 수영목장이라고 자네도 알 거야, 아마."
-금산락읍! 마침 제 와이프도 아이들 데리고 거기 근처에 놀러가 있습니다!
승마 클럽주 노인은 씩 웃었다.
선주건설이 수영사채에 700억 대출이 있다는 걸 박진희 과장이 모를 리가 없다.
"아, 그런 우연이 또 있군그래. 자네는 지금 서울이지?"
-아, 네. 주말 근무 중입니다. 이 럴 줄 알았으면 저도 처자식과 같이 내려갈 걸 그랬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지금 아버지, 아니, 대표님이 옆에서 당장 내려가서 인사 올리겠다고 말씀 전하랍니다!
"그럴 필요 뭐 있나? 그냥 우리끼리 이야기하다가 반가워서 얘기 한번 해본 걸세."
-저희 부자,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상대는 거의 떼를 쓰듯이 내려와도 된다는 확답을 얻어냈다.
회사와 관련된 주요 인맥들이 한자리에 모인 야유회다.
당연히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고 눈도장도 박고 싶은 게 사업가의 마음.
"내려온다던가?"
"그럼 안 내려오고 배겨? 시아버지되는 친구도 같이 온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