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83화
215장 반도체 티배깅 (2)
그 뒤에도 하수영과 이현덕은 자주 만나서 티타임을 가졌다.
장소는 거의 대부분 청담동으로, 이현덕이 직접 하수영을 찾아오곤 했다.
오늘도 둘은 클럽 마르스에서 룸을 잡고 위스키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전 또 파운드리 시장이 엄청 잘나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 매출이 1,300억 달러 정도밖에 안 되던데요?"
"의원님, 그건 서진파운드리가 등장하기 이전 수치죠. 지금은 대부분의 종합반도체 회사들이 팹리스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 물량까지 모두 떠안게 되면, 파운드리 시장의 전체 규모는 월등히 커지게 됩니다."
이현덕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여기에서 굳이 거짓 정보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일단 팩트에 기반해서 상대가 갖는 신뢰를 쌓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근데 글로벌 반도체 시장도 연간 7,000억 달러 정도던데요?"
"일 년에 7,000억 달러면 정말 큰 시장입니다. 단일 시장으로 그만한 규모가 또 없습니다."
"그거 아세요? 작년 전 세계 밀매출만 2,000억 달러입니다."
"……허허."
"대두, 옥수수, 콩, 보리, 쌀, 다른 곡물들은 더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곡물을 가공해서 만드는 식용유, 가축 사료까지 따지면 엄청나죠. 그에 비해서 반도체는…… 뭐 1조 달러도 못 찍네요?"
하수영은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중국에서만 황비버섯 팔아서일 년에 1,000억 달러 넘게 남아요. 매출은 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거 죠."
"하하…… 80억 인구가 매일 먹는 식량에 비할 수 있는 아이템은 없겠지요. 하지만 반도체는 소수의 업체들이 그 시장을 전부 독점하고 있습니다."
"아아, 곡물도 그래요. 4개 업체들이 전 세계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죠."
이현덕은 헛웃음을 삼켰다.
하수영이 이처럼 농사에 단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좋은 신호다.
"어디 보자…… 파운드리가 대충 절반 먹는다 치면 3,500억 달러. 이익률을 2할로 잡으면 700억 달러정도 남으려나요?"
"의원님, 예전 TSMC의 이익률도 20%보다는 훨씬 웃돌았습니다. 설마 2할밖에 안 될까요?"
실은 2할이 아니라 5할을 넘나드는 수준이었지만, 이현덕은 분명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하수영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대충 3할로 잡으면 105억달러? 세금 떼고 이거저거 다 제하고 나면 진짜 수십조 원 수준이네."
갑자기 수십조 원의 이익이 작아보이는 듯한 마법에, 이현덕은 입술을 핥았다.
"진짜 한 10년 치 이익을 일시불로 받고 팔아서 그 돈 가지고 농장을 더 크게 키우는 게 남는 거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회장님?"
"10년 치 예상 총이익을 기업의 현재가치로 판단하는 평가 기준도 있긴 합니다."
"반도체는 소득세도 내야 하지만 농사는 그런 것도 없으니까 여기에 올인하는 게 훨씬 이익인데."
"세금 정책도 사업의 장래성을 판단하는 유력한 기준이죠."
"그렇죠? 지금 우리나라는 여전히 외국 기업에 식량 잠식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가에 소득세를 물리려고 했다니, 국회가 여야를 떠나서 진짜 미친 거 아닌가요?"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금뱃지 연장에만 관심이 있는 법입니다."
"역시 재벌 총수시라서 세상을 보는 식견이 대단하세요. 아니, 범석이 그놈은 당장 들어오는 수십조 원만 바라보느라고 미래를 못 봐요, 미래를."
"김범석 사장…… 제 동생이 매각을 말렸나 보군요.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서진파운드리는 그 자체로 가치 높은 자산이니, 갖고만 있어도 이익이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편들어주기를 하느라고, 이현덕은 하마터면 표정이 썩을 뻔했다.
"아! 그냥 갖고만 있을 거면 무슨 소용인가요! 그걸 팔아서 농사에 더! 더! 더! 투자해야죠."
"정말 농사 하나에는 진심이시군요. 정서진 대표는 어땠습니까?"
"매각할 거면 일부 지분은 자기한테 팔아주길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그 양반도 한 70억 달러 정도 있거든요. 인센티브 받은 거요."
"……."
이현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파운드리 사장을 맡은 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인센티브를 그만큼이나 받았다고?
볼수록 탐이 나는 회사 아닌가.
"괘씸하게 생각되지는 않으십니까?"
"농장 지분을 탐내면 괘씸했겠지만, 반도체는 아니잖아요?"
"의원님은 정말 반도체에 큰 관심이 없으시군요."
"캐시카우가 있으면 좋죠. 하지만 일시불로 단번에 키울 수 있는 농장규모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설레서 잠이 껍니다."
"안살린 왕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분도 지질학 연구에 올인하신 분이라, 반도체 사업을 내가 왜 하냐는 마인드이십니다. 그런 건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하시죠."
"굉장히 깨어 있으신 분이군요."
"하하, 사실 저도 그 부분은 생각이 같습니다. 더 잘할 수 있고,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죠. 그게 농사는 반도체는 식량이든 간에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의원님을 정말이지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이현덕은 그 와중에도 빠르게 셈을 잡고 있었다.
'연간 순이익을 최소 70조 원으로 잡고, 10년이면 700조 원. 이 돈을 일시불로 준다면 지분을 다 털고 그 돈으로 농사에 더 큰 투자를 하겠다는 건데…….'
최소 700조 원이라는 현금을 쥐어 짜낼 수 있을까?
'해외 비자금을 정리하고, 회사채를 더 발행하고, 은행 대출도 끌어 모은다 치더라도…… 그래도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할부 카드를 내밀어?'
하지만 턱도 먹히지 않을 게 뻔하다.
상대는 일시불로 털고 그 돈으로 농장을 더 크게 키울 단꿈에 젖어 있으니까.
순간 이현덕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에릭 로한 박사, 그분은 아무 말이 없습니까? 핵심공정 기술은 그분이 개발했다고 저번에 들은 거 같습니다만."
"아, 맞다. 사실 서진파운드리는 100% 제 게 아닙니다."
"……그래요?"
지분등기에는 분명 하수영의 이름만 존재하는데?
"에이, 명의만 그렇게 해놓은 거죠. 핵심 기술개발자가 지분 하나 없다는 게 어디 말이 되나요? 나중에 필요할 때 정확하게 정산해서 주기로 했습니다. 지분도 마찬가지고요."
"호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나저나 회사 가치가 엄청날 텐데, 설마 구두로만 이야기가 된 건가요?"
"로한과 저는 그깟 돈 몇 푼으로 마음이 상할 사이가 아니거든요."
"정말 대단한 신뢰관계입니다. 그럼 에릭 로한 박사의 몫은 정확히 어느 정도인가요?"
"49.9%입니다."
"거의 반반씩 나누셨군요. 투자자와 기술개발자 간에."
"그렇죠. 운영과 영업은 정 대표를 월급사장으로 앉혀서 인센티브를 주고 있고요."
이현덕은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수영의 몫이 50.1%라면, 조달해야 하는 돈도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최소 350조 원에서 최대 500조원'
마련해야 하는 금액이 더욱 현실적으로 변했다.
***
이현덕은 미친 듯이 돈을 쥐어짜냈다.
부친에게 건의해서 그룹 비자금까지 전부 양지로 끌어올렸고, 계열사들이 보유한 잉여현금을 한 곳으로 모두 모았다.
말 그대로 명동 사채 빼고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돈을 끌어모았다.
혹시라도 아부다비 왕가에서 마음을 바꿔 회사를 인수하지나 않을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먼저 300조 원을 만들고 난 뒤, 이현덕은 당당하게 하수영을 찾아갔다.
적당한 술과 입에 발린 달콤한 말로 분위기를 녹인 뒤,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의원님, 혹시 서해전자는 어떻습니까?"
"서해전자요?"
"반도체 하나만큼은 진심인 회사입니다. 한때 TSMC를 넘어서는 반도체 공정능력을 자랑하기도 했고요."
"음…… 사실 저도 서해전자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긴 했습니다만, 서해전자는 그럴 만한 돈이 없을 거 같아서 묻어만 두고 있었는데……."
"돈이라는 게 만들면 되지, 당장에 없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 대신 조건이라고 하기는 뭣하고…… 정서진 대표의 자리를 앞으로 6년은 보장해 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죠. 정 대표는 이미 뛰어난 경영 수완을 보였습니다. 다만 인센티브는 조절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거야 새 오너가 알아서 할 일이 고요. 그래서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이현덕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300조 원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400조 원 이상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아, 이런."
하수영이 갑자기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이현덕은 괜히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의원님? 왜 그러시는……."
"정 대표가 그러는데 파운드리 이익률이 50% 이상이라고 하네요. 대충 일 년에 1,800억 달러 이상 남는다는 거죠."
"……."
"그리고 에릭 로한도 정리할 거면 자기 몫도 같이 정리하자고 하네요. 다른 사람이 50.1% 안고 들어오면 자기는 그냥 거수기 신세도 못 된다고, 지분 들러리 신세 될 거라고요."
"그, 그럼……."
"아우. 어디 1조 8,000억 달러 정도 일시불로 쏴줄 만한 사나이 없나요? 그럼 미련 없이 반도체 털어버리고 농사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하수영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채 혀를 찼다.
"최대 4,000억 달러 가능하시다고요? 딱 1조 4,000억 달러만 더 만들어오면 가능할 텐데, 어떻게 안될까요?"
"그, 그것은……."
이현덕은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400조 원이면 서진파운드리의 경영권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가격이 4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1조 8,000억 달러 일시불이라니.
서해그룹이 아무리 굴지의 기업이라 해도, 그런 현금을 무슨 재주로 만들어내겠는가.
"아, 어디 2조 달러 정도 시원하게 툭툭 내놓을 만한 바이어 없나? 컨소시엄 구성해서 와도 좋을 텐데. 아아, 진짜 반도체 이거 정리하고 싶은데. 정리해서 그 돈으로 농기구나 더 잔뜩 사고 싶은데……."
이현덕은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돌아갔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줄 알았던 서진파운드리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미칠 것만 같았다.
눈만 뜨면 숫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1조 8,000억.
한국정부의 외화보유액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결국 이현덕은 측근들을 불러놓고 방법을 모의했다.
"어떻게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을까? 지금이 서진파운드리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세."
"……부회장님, 외람되지만 금액이 너무 큽니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그만한 현금을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합니다."
"이건 포기하셔야 합니다. 쉽게 살수 있는 매물이 아닙니다. 미 정부 정도는 되어야 겨우 구매가 가능할 겁니다."
"그보다 무리하게 현금을 한데 모으느라고 계열사들이 자금 경색에 빠졌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모든 돈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합니다."
"당장의 구매가 물 건너갔으니, 서둘러서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이현덕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1조 8,000억'에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저 멀리 구름 위에서 살랑거리는 서해파운드리의 모습이 보인다.
절대 가질 수 없었던, 이제는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던, 하지만 다시 보니 진짜 가질 수 없던 것…….
꿈이 그렇게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