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63화
211장 끊을 수 없는 것 (6)
보고를 받은 진석현은 눈이 뒤집혔다.
"5만 개를 사겠다고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보통 돈이 많은 게 아닌 거 같습니다."
"5만 개라. 5만 개……."
진석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5만 개면 1,500억 원.
아무리 중국 졸부라 해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돈이다.
"장사를 해본다고 했지?"
"네, 본인이 직접 복용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는지 조목조목 말해봐."
"그게……."
직원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천천히 설명했다.
"카지노를 즐기다가 중국인 고객들한테 몇 번 설명을 들은 거 같습니다."
"그렇지. 거기에 우리 고객들도 꽤 있으니까. 동향 사람이면 정보를 얻기는 쉬웠을 테고."
"복장은 영락없는 중국 졸부 2세인데, 생긴 것은 꽤나 말끔합니다. 페이스만 보면 중국인 같지는 않습니다."
"언어는? 네이티브인가?"
"중국어가 원어민 수준으로 유창하긴 한데,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감이 안 잡힙니다. 온갖 방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자기도 모르게 광동어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음. 젊은데도 중국 온 천하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로군."
그 점이 진석현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순수 중국인이라는 말이 되니까.
"5만 개는 시험 삼아 한번 던져본 느낌이었습니다. 이만한 물량을 칠수 있는지, 우리 능력을 검토해 보는, 그런 느낌입니다."
"말이 5만 개지, 고객 200명을 상대로 판매하면 1년 치도 못 되지."
화이트 스카치는 중독성은 없지만, 정서적인 의존성이 매우 크다.
혈기 왕성한 10대 청소년의 첫 경험 그 이상이다.
한번 맛을 알게 되면, 매일 밤마다 약을 찾게 된다.
하다못해 자기 전에 먹으면 쾌락에 젖어 숙면을 취하고, 다음 날 말끔한 컨디션으로 일어날 수 있다.
당장 진석현 본인만 해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화이트 스카치를 복용하고 잠이 든다.
"5만 개, 5만 개라."
1정을 200만 원에 팔아도 막상 남는 것은 1정당 몇십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
제조에 투입되는 엘릭서 드링크의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엘릭서 드링크를 더 줄일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화이트 스카치가 가지는, 무해한 성질이 사라져 버린다.
당장 다음 날 말끔한 몸으로 눈을 뜨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니.
"개당 100만 원씩 추가 수익이 생기는 건데. 그게 5만 개니까, 500억."
500억의 수익은 재벌 3세에게도 큰돈이다.
심지어 전액 현금이고, 국세청의 추적도 받지 않을 테니까.
진석현은 결심을 굳혔다.
"내가 한번 만나봐야겠다. 자리 만들어."
"예, 도련님."
"사장님이라고 부르랬다. 이 거지 발싸개 같은 놈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입조심 똑바로 하자고, 엉?"
"네, 알겠습니다."
***
보스가 직접 만나자는 제안이 나오자, 임탁정과 고윤무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표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의원님."
"이렇게까지 수사를 진행시켜 주실 줄이야. 진짜 놀랐습니다."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돈다발 눈앞에 흔들면 못 참죠."
"그런데 녀석들도 분명히 어느 정도는 선금을 요구할 텐데……."
"아, 당연히 줘야죠. 제 사비로 부담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나중에다 털어 넣으면 그때 돌려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혹시 잘못돼서 회수 못 해도 괜찮습니다. 국가에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게요."
두 검사는 잔뜩 감동받은 표정이 되었다.
수사 자금으로 1,500억이나 되는 사비를 턱턱 내놓을 생각을 다 하다.
'배포가 정말 보통이 아니신 분이야.'
특히 하수영을 처음 대하는 고윤무는 신발이라도 핥을 눈빛이었다.
하수영이 평소처럼 거들먹거리며 룰렛에 환호하고 있을 때, 직원이 조용히 다가와서 말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하수영은 퉁명스럽게 직원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기다려. 운 떨어지면 갈 테니까."
"지금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는……."
"아! 기다리라고! 바이어가 지금 게임하느라 바쁘다잖아! 하여튼 소국 놈들은 예절이라는 걸 몰라, 쯧쯧."
하수영은 험악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핀잔을 주었고, 직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물러났다.
그 뒤로도 하수영은 2시간 가까이 더 게임을 즐긴 후에야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직원을 발견하고 위아래로 눈을 훑었다.
"뭐야,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나?"
"예, 게임은 즐거우셨습니까?"
"벌써 도망친 줄 알았는데. 옛다. 받아라."
그러면서 하수영은 칩을 한 움큼쥐어서 팁으로 던져주었다.
바닥에 칩이 흩뿌려졌지만, 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얼른 몸을 숙여서 칩을 주웠다.
"나머지는 잘 묻어놔라. 내일 또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가볼까."
하수영은 뒷짐을 진 채 거들먹거리면서 홀을 나섰다.
뒷정리를 마친 직원이 뒤를 따랐다.
검은 세단 몇 대가 줄을 지어서 하수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이 뒷좌석 문을 서둘러 열어주었고, 하수영은 느긋하게 차에 올랐다.
하수영은 열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를 틱틱 부딪치면서 중국어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톈 미 미 니 샤오 더 텐미닛 내 꺼디 되는 시간 승지난 내홍에 속아우는 남자들……."
'가사가 왜 갑자기 한국어로 빠지는 거야?'
운전수와 조수석 직원 둘 다 당황해서 표정 관리에 힘을 썼다.
한국어 발음이 영 괴팍한 걸 보면, 확실히 중국 본토인이다.
게다가 한국어 부분은 가사 뜻도 모른 채 막 이어서 붙이는 것만 같다.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로, 오늘의 미팅을 위해 대절한 것이다.
야외 풀장에는 환한 조명이 눈을 밝히고 있었고, 비키니를 입은 미모의 여자들이 비치볼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한 대의 휠체어에 앉은, 눈빛이 표독스러운 청년이 쏘아본다.
'이거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하수영은 속으로 피식거렸지만, 속으로는 방자하고 오만한 중국인 졸부 2세 표정을 유지했다.
휠체어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하수영은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기집년들 좀 불러."
"고객님?"
"뭐 하자는 거야? 와서 팔다리나 좀 주무르라고 해. 걸었더니 피곤하다."
직원은 황급히 여자들에게 가서 뭐라고 말을 전했다.
여자들은 까르르 웃으며 풀에서 나와 하수영의 좌우로 달라붙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두 발을 뻗어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여자 셋이서 어깨와 두 발을 정성스럽게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천박하군.'
그 무엄한 태도에 진석현은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믿음이 갔다.
운 좋게 졸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천박한 졸부 2세 티가 줄줄 흘렀던 것이다.
"상품은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나?"
느긋하게 여자들 손길을 즐기던 하수영이 불현듯 던지듯이 물었다.
통역을 통한 진석현은 못마땅했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우리는 아직 한다고 한 적이 없는데."
"뭐야! 이런 개왕빠딴 같은 자식들을 보았나!"
순간 하수영은 버럭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고, 그 바람에 마사지를 하던 여자들이 넘어질 뻔했다.
금방이라도 그가 달려들 것처럼 굴자 건장한 남자들이 서둘러 진석현앞을 에워쌌다.
"감히 바이어를 오라 가라 해놓고는, 뭐가 어쩌고 어째? 아직 결정을 하지도 않았다고! 너희 소국 놈들은 장사를 그딴 식으로 하느냐!"
하수영이 길길이 날뛰며 온몸으로 화를 표출했고, 가드들은 여차하면 제압할 준비를 했다.
통역은 진땀을 흘리면서 옆에서 열심히 하수영이 뭐라 하는지 전해주었다.
그러다가 하수영이 가드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트라이어드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일개 소국의 조폭들 주제에."
하수영이 품에 넣은 손을 빼자, 진석현은 물론이고 다들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이, 진석현을 똑바로 겨누었다.
"날 헛걸음하게 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저건 틀림없이 진짜 총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석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오른 주먹을 왼손 바닥에 맞대어 내밀었다.
포권 자세다.
"대, 대인! 제가 감히 대인을 몰라 보고 시험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통역은 혹시라도 방아쇠를 당길까봐 쌀라쌀라 빠르게 말을 전달했다.
"이쪽 일이라는 게 워낙 천하고 위험한지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험을 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진석현은 가드와 직원들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너희 뭐 하냐! 안 따라 하냐!'
순간 부하들도 눈치를 채고 얼른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땅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토하는 우렁찬 함성.
한국어를 모르는 이라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X발, 하필 제주도 한복판에서 총을 버젓이 가지고 다니는 미친놈일줄 누가 알았겠어?'
진석현은 그렇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수영은 총을 겨눈 채 한참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총을 품에 다시 집어넣었다.
거만하게 다리를 뻗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겁에 질려 있던 여자들이 얼른 다가와서 부지런히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사죄의 뜻을 증명할 테냐?"
"화이트 스카치 100알을 선물로 바치겠습니다!"
2억 원짜리 물품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저 성난 놈을 달래서 총을 못 뽑게 틀어막는 게 중요하다.
"그까짓 사소한 선물 짓거리는 됐고, 5만 정은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는가?"
"5만 정이라고 하셨습니까?"
"거래하자고 부른 이상 거래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트라이어드의 법도다."
아무래도 대륙의 불법 조직들과 단단히 연을 맺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 많은 가드들 앞에서도 겁을 먹기는커녕, 버젓이 총을 꺼내서 위협을 하는 거겠지.
진석현은 청부업자로 중국에서 온 사람들을 쓴다는 말을 새삼 떠올렸다.
"5만 개, 틀림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음, 좋아. 그것으로 내 오늘 네놈의 무례는 잊어주도록 하지."
하수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통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계좌 번호를 다오."
"사장님, 계좌 번호를 달라고 하십니다."
"계좌 번호를? 그걸 왜?"
당황해서 시선이 부딪히자, 하수영이 씁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진석현은 얼른 스위스에 개설한 비밀 해외 계좌 번호 하나를 적어서 내밀었다.
돈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버려도 상관없는 계좌였다.
하수영은 핸드폰을 들어서 가볍게 조작한 후, 종이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 정도면 선금으로는 충분하겠지. 상품이 준비되는 대로 연락해라."
하수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휠체어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온 하수영은 손을 내밀었다.
진석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악수에 응했다.
에스코트해 왔던 직원이 후다닥 일어나서 타고 왔던 차의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하수영이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진석현은 겨우 숨을 돌렸다.
"X발, 설마 총을 갖고 다니는 미친놈이었을 줄은 몰랐네."
"소음기까지 장착된 걸 보니 보통이 아닙니다."
"설마 청부업자는 아니겠지?"
"복장이나 태도를 보면 그보다는 삼합회나 흑사회에서 한가락 하는거 같습니다. 아니면 그들과 동맹일수도 있고요."
"젠장. 이제 와서 발 빼기도 글렀네. 무시했다고 또 길길이 날뛸 거 아니야?"
괜한 욕심에 나섰나 하고 후회되었다.
그러나 계좌 내역을 확인한 순간 그런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7,000만 불? 이게 선금이라고?"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돈을 선불로 넣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