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36화
205장 청담식 세레모니 (6)
델지생건 고영식은 며칠 동안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하수영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프로필 사진이나 메시지를 일부러 바꾸지도 않고, 델지생건 본사를 방문한 그날 설정한 그대로 두었다.
"복수는 가장 차갑게 만들어서 먹을 때 가장 달콤한 맛이 나는 법."
하수영은 잠시 밀어두고 있던 청담스코프 양산 사업에 요즘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애초에 '스코프 싸게 만들어줘! 엉엉!' 하며 떼쓰는 정부한테 호된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알려주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
자신이 필요해서, 재미있어서 시작한 사업이 아니기에 느긋할 수 있었다.
"1,520억 원이면 최첨단 5세대 전투기 한 대 값인데, 그걸 누구나 자동차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싸게 만들어달라니. 이렇게 양심이 없을 수가 있나?"
-6,000조 원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저렴하게 불렀습니다, 마스터.
"스코프 5,000만 원에 팔아봤자 우리한테 얼마나 남겠냐?"
-마진율은 5%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 5,000만 원짜리 하나 팔아서 겨우 25만 원 건지는 거야. 원금회수하는 데만도 한오백년은 걸리겠네."
-그래도 시각장애자들에게 빛을 찾아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스터.
"좋은 일이긴 한데 그 좋은 일을 한 수백만 년 이상 해왔다고 생각해 봐."
-이해가 됩니다.
"이번 생은 그냥 하고 싶은 은퇴라이프 위주로 적당히 즐기려고 했었는데. 아직 23살밖에 안 됐는데 테크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하수영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이러다가 청담동에 궤도엘리베이터 올리기도 전에 대한민국 국왕 테크부터 찍게 생겼어."
-그건 제가 솔깃한데요? 마스터가 이 나라 체제를 전복하고 전제왕권 국가가 된다면, 더 많은 농산물을 퍼뜨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때가 되어도 지금처럼 농사에 90% 이상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니야. 농사는 이제 뒷전이 돼버리는 거지."
-세계전쟁에 휘말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군요. 확실히…… 하지만 그리되면 제 농장의 농산물이 전 세계 시장을 확고히 지배할 수 있는 루트가 열릴지도…….
"컷. 고의적인 아포칼립스 농장 루트는 상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스코프 공단을 어디에 짓지?"
스코프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은 소재, 설계, 생산 단계부터 새로이 바뀔 것이다.
비용을 수천 분의 1 이하로 떨어뜨리기 위해서.
제철, 조선, 고속도로, 철도 같은 국책사업과는 비교도 안 된다.
대도시 이상의 공단이 될 것이고, 따라서 입지 조건부터가 엄격하다.
-세종시와 대전 인근이 가장 이점이 큽니다. 무엇보다 세종시에는 수영조명이 있습니다. 핵융합 연구진을 비롯해서 고급 두뇌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는 공단이 들어갈만한 부지가 얼마 없다는 거지."
이미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된 지역이기에.
초대형 메가시티 공단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은 지역이다.
"난 마음 같아선 강원도에 짓고 싶은데 말이지."
-동해시 부근을 생각하십니까?
"그래. 지구 온난화도 대비해야할 거 아니냐? 슬슬 기온 올라갈 텐데, 세종이나 대덕 쪽에 지으면 나중에 더워서 일하기가 힘들 거다."
-확실히 온난화도 고려해야 합니다. 열섬 현상이 심해져서 여름에는 실외에서 거동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겠군요.
"이미 지금도 여름에는 건물 밖을 벗어나기가 힘들어."
-사람들이 여름에 건물 밖에서는 50미터만 걸어도 땀을 줄줄 흘리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가 딱이라는 거야. 시원해서 근무하기에는 좋을 거란 말이지."
-문제는 산이 너무 많습니다. 초대형 메가시티 공단이 들어서기에는 지형적으로 너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게 아쉽다."
접근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프라임건설이 서울과 동해를 잇는 민자도로와 자기부상선로를 건설하는 중이니까.
특히 자기부상열차가 들어서면 서울과 동해가 20분 안으로 묶인다.
"동해에 지어야 독도 관광하기에도 딱이고, 여러모로 좋은데 말이지."
-자연경관 훼손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태백산맥 일부를 밀어서 공단을 짓는 것도…….
"그냥 공중도시로 기획을 해볼까?? 아, 그러려면 수영조명이 일단 핵융합부터 뽑아내야 하네."
-마스터의 전생 기억 중에 쓸 만한 기술은 없습니까?
"있지. 넘치지. 근데 지금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은 없다."
-으음…….
"기술의 발전이라는 게 그렇게 바로바로 퀀텀 점프가 되는 게 아니야. 단계별로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해."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엘릭서, 신어 권능이 없었으면 물에 뜨는 티타늄 같은 건 애초에 만들지도 못했을 거야. 그나마 아버지가 자식 위해서 쓸 만한 몇 가지를 주셔서 다행이지."
무한전생의 기억, 그리고 주신의지식보고 안에는 방대한 정보가 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 시대에 구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
물론 하수영이 제대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몇십 년 안에 우주권 문명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죽어라고 수백 번도 넘게 해본 것을 뭐하러 또 하나?
이번 생은 농사와 음식점에 집중하기로 했는데.
"아아, 그냥 신어로 말만 하면 내가 딱 필요한 오버테크놀로지 물건들이 뚝딱 하고 튀어나왔으면 좋겠다……."
-신어를 좀 더 가다듬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느 세월에? 어디 산에 처박혀서 폭포만 보고 몇 년 몇십 년 면벽 수련하라고? 그동안 농사는 안 짓고?"
-하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지요.
하수영은 다시 지도에 표시된 강원도를 보면서, 스코프 메가시티 공단의 상상도를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바로 그때였다.
평창동 : 똑똑……?
"오! 우리 평창동쿨가이께서 드디어 연락을 주셨네!"
하수영은 신이 나서 얼른 스마트폰을 쥐었다.
그리고 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청담동가즈쏜 : ㅇㅇ?
평창동 : 저어, 혹시 하수영 회장님 연락처이신가요?
청담동가즈쏜 : ㅋㅋ? 님 갑자기 말투 무엇? 나 청담동가즈쏜인 거 까먹음?
평창동 : 그, 그럼 하수영 회장님과는 무관하신 인물…….
청담동가즈쏜 : 동일인물 맞는데?
내가 수영농장 다닌다고 했잖슴.
평창동 : 그, 그렇군요.
청담동가즈쏜 : 근데 프사닉 변경뭐임? 쿨가이는 왜 뺌?
평창동 : 제가 건방지게 어떻게 그런 닉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청담동가즈쏜 : 진짜 갑자기 말투무엇? 아니, 무슨 일 있었음?
평창동 : 제가 델지생건 고영진 사장입니다.
청담동가즈쏜 : !!!!!!!
평차동 : 저번에 주신 연락처를 받고 두 분이 동일인물인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청담동가즈쏜 : 하…… 이런 우연이.
청담동가즈쏜 : 진짜 말도 안 되네.
청담동가즈쏜 : 아니.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말을 너무 편하게 했네.
청담동가즈쏜 : 매출가지고 놀린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고영진 사장님.
평창동 :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못난 꼴을 엄청나게 많이 보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청담동가즈쏜 : 그래요. 그나저나 이 번호로 연락을 했다는 것은…….
평창동 : 네, 제가 생각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톡 말투와 현실 말투가 너무 갭이 크니 당혹스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좀 진정된 모양입니다.
"SNS에 왔으면 SNS 말투를 써야지. 얘 많이 쫄아 있냐?"
-예, 지금 임원들 몇 명도 달라붙어서 함께 멘트를 잡아주고 있습니다.
청담동가즈쏜 : 그럼 공장을 팔겠다는 겁니까?
평창동 : 예. 팔겠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를 가다듬고 싶습니다.
청담동가즈쏜 : 쿨거래 좋군요. 지금 휴민트타워로 오실 수 있습니까?
평창동 : 물론입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고영진은 40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휴민트타워에 도착했다.
종로에서 청담동까지 차 막힘을 생각하면, 정말 빠르게 온 것이다.
하수영은 저번처럼 점잖음을 잔뜩 바른 정장 차림으로 고영진을 맞이 했다.
"먼 길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아, 네. 회장님. 영광입니다. 그런데……."
고영진이 뭔가 망설이는 눈치이자, 하수영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내 톡 말투가 좀 그렇죠? SNS 세상에서만큼은 나도 모르게 내 나이에 맞는 언행이 나옵니다. 그래도 무례하지는 않죠?"
"아, 예. 물론이십니다. 밝고 경쾌하면서도 언제나 기본 예의를 지키시는 언행에 저 역시 많은 본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요즘 것들은 얼굴 안 보인다고 부모 패드립이나 치고 말이야. 나처럼 엄한 아버지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런가 봅니다."
"……."
고영진은 하수영을 상대로 했던 말이 생각나서, 차마 웃지도 못하고 등에서 식은땀만 흘렸다.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니 아버지 뭐하시니? 진짜 안부 궁금하다.
-3년 전에 지구 떠나셨는데.
-애비 없는 놈이었구나. 그러니까 인성 그 모양이지.
-영진아, 추하다. 그래도 패드립은 좀 아니지 않니?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평창동쿨가이가 고영진 사장님 본인이었을 줄이야. 처음에 제가 홧김에 한 말이 정곡을 찔렀군요.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게……."
"아니, 왜 처음에 내가 물었을 때, 사장님 본인이면서 본인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건가요? 문득 그게 궁금하군요."
다시 말하지만, 하수영은 거짓말은 안 했다.
수영농장 다닌다고 분명히 말을 했으니.
"죄송합니다. 제가 익명이라고 너무 망둥이처럼 날뛰었습니다."
고영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동행한 수행 임원들도 함께 머리를 숙였다.
"오해가 있네요. 추궁하는 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왜 본인이 아니라고 한 건가요?"
고영진은 하수영의 눈빛을 보았다.
진심으로 그게 궁금해 죽겠다는 마음이 엿보인다.
고영진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부자가 낡은 옷 걸치고 판자촌을 거닐면서 나는 여기와 다르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일종의 그런 심리입니까?"
"저, 절대 아닙니다!"
정곡을 찔린 기분에 고영진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내 마음에 그런 음침한 색채가 있었다고?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시죠? 저도 그런 거 즐깁니다. 내 신원을 숨기고 낯선 곳에 녹아들어서 지켜보고, 휘어잡고, 그런 거 원래 재밌는 겁니다."
"회, 회장님……."
"전 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요. 뭐 중요한 건 아니죠."
고영진은 자신의 마음을 거듭 들었다 놨다 하는 것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 공장인수계약을 체결할까요?"
하수영은 준비해 둔 계약서를 내밀었다.
원래 이런 큰 비즈니스는 충분한 실무진 협상을 거친 후, 결재가 떨어지고, 경영자는 마지막 서명만 한다.
델지생건은 이런 식의 급작스러운 계약 체결에 익숙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오늘 바로 계약서를 준비해 두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가 계약서를 충분히 검토한 후에 다시 연락을 드려도……."
"이런 계약서 몇 장 검토하는 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오너가 고객센터 게시판에서 진을 치고 있는 회사라서 뭐든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줄 알았는데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몇 가지 검토는 거쳐야 해서…… 공장인수를 철회하는 것은 아니니 며칠만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거 공장이 콜라 몇 병 값이나 한다고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네요. 휴, 알겠습니다. 며칠 시간을 드리 죠."
고영진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영진 사장님, 언제 한 번 청담으로 이사 오세요. 살기 좋은 동네입니다."
"아, 네. 언제고 기회가 되면 꼭 청담에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빌라 한 채 싸게 세줄게요. 평창동쿨가이 위해서 청담동가즈쓴이 그거 하나 못해주겠습니까? 하하."
며칠 후, 델지생건 콜라 공장은 정식으로 수영콜라에 넘어갔다.
계약 체결 이후 하수영이 프리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프리덤. 잘 봐라. 사과란 바로 이렇게 돈으로 하는 거다."
-말로 하는 사과는 무의미하다는 거군요.
"먼저 밟고 빼앗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은 전혀 안 중요해. 그건 결국 세레모니일 뿐이니까."
-그래서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콜라 공장 인수에 적극적이셨군요.
"이 정도면 금융치료는 충분하니까 당분간 고영진 사장과 친하게 지내야겠어."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원래 골 넣고 세레모니는 길게 해야 상대가 더 빡치는 법이다. 어차피 휘슬 불 심판도 없는데."
-그렇다면 오늘 고영진 사장과 저녁식사 약속을 잡겠습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