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33화
205장 청담식 세레모니 (3)
코카잎은 처음에는 항공편으로 날랐다.
당연히 물량이 부족하고, 운송비도 많이 들었다.
1차로 출발한 화물선이 도착하는 데는 한 달 남짓 걸리는데, 그 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항공편도 같이 운용한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화물선들이 들어와서 코카잎과 설탕 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제 수영콜라의 물량 부족은 없습니다. 공격적으로 마케팅 개시하겠습니다."
마침내 김범석은 정서희를 만났다.
정서희는 말로만 들었던 김범석을 실제로 만나자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수영 씨가 이 사람을 그렇게 신뢰한다고?'
조 단위 사기 전과까지 있는 사람인데?
물론 자세한 내역을 접한 정서희는 그가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죄선고를 받았다고 반드시 악하지 않고, 무죄선고를 반드시 선하지도 않다.
돈으로 판결문을 살 수 있는 세상, 잘못된 '개판결'은 흔히 넘쳐나니까.
"지금도 남미에서 화물선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코카잎, 설탕수급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정서희 사모님."
"사, 사모님?"
정서희는 순간 귓불까지 빨개졌다.
배불뚝이 대머리 중년 남자의 한 마디에 이렇게 가슴이 요동치기 있다고?
갑자기 그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유독 맛있어 보였다. 마치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하얀 돼지처럼…….
"사모님, C콜라 매출은 바닥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조정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기회를 주지 말고 쉴 새 없이 밀어붙여야 합니다."
"가격을 조정한다고 해서 소비자들이 다시 돌아갈까요? 김 사장님……도 수영콜라를 먹어봤으면 아실 거잖아요."
"그래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콜롬비아산 코카잎은 수영농장산 코카잎에 비해서 한 가지 모자란 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아, 하긴. 처음에 만든 시제품하고 그 다음 제품은 맛에서 차이가 났어요."
"저는 적이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김범석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외모와 다르게 기이한 매력이 흐르는 대머리 배불뚝이 중년 남자다.
"다시는 C콜라가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주인님에게 선택받은 미천한 저의 첫 사명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사모님."
"왜, 왜 자꾸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우리 둘만 있을 땐 그렇게 부르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범석은 밝게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묘한 기분이다.
분명히 아버지뻘의 중년 남자인데,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발아래에 존재했었다는 복종 서약을 온몸으로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듯한 느낌이다.
***
C콜라는 이미 회생불능이었지만, 수영콜라는 막판 부스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CD1에는 수영콜라 프로모션이 꽉깔렸고, 1+1 사은품 행사가 연달아이어졌다.
1.5리터에 2,000원.
600ml에 1,000.
250㎖ 캔에 600원.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가 이렇게 음료수를 가격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먹어본 게 언제였더라?"
"작은 캔 하나에도 천 원이 넘어가는 시대인데, 겨우 600원이라니……."
"진짜 수영콜라 만만세다, 만만세."
C콜라가 전혀 팔리지 않으니, CD1은 이제 명분을 갖추고 브랜드에서 퇴출시킬 수 있었다.
"C콜라요? 이번 주에 단 한 개도안 나갔어요, 단 한 개도."
"이런 상황에서 우리 매장에서 왜 추가 발주를 합니까?"
"지금 있는 것도 반품시키려다가 혹시나 싶어서 놔두는 거, 모르십니까?"
델지생건의 주가는 조금씩 하향세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C콜라가 바닥을 쳤는데도 주가가 폭락하지 않는 것은, 콜라 외에도 다양한 B2C 상품을 취급한다는 장점 덕분이었다.
***
백두중공업에서 40척의 메가 컨테이너선을 인도했다.
23,000TEU급 메가 컨테이너선.
컨테이너 23,000개를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초대형 선박이다.
배수량만 따지면 포드 항모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행사는 포항 앞바다에서 가졌다.
백두중공업은 컨테이너선 40척을 나란히 줄을 맞춰 도열시켰다.
태극기와 휘장 등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샴페인과 폭죽도 준비했다.
수많은 포항시민들과 백두중공업직원들도 다시없을 이 초대형 인수식을 지켜보기 위해 나왔다.
23,000TEU 컨테이너선 40척을 한꺼번에 인수하는 행사는 이전까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직 60척 남지 않았어요?"
"아, 그러네요. 그럼 다음에는 60척을 한꺼번에 인수하려나?"
"원래 일일이 진수식을 따로 해야 하는데, 40척을 한꺼번에 인도하는 거라서 생략하고 명명식만 한꺼번에 갖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지."
40척의 배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이 첫 진수를 하는 게 아니었다.
여러 도크에서 흩어져 건조된 후, 일괄인수 및 명명식을 위해서 오늘 한꺼번에 이곳에 모였다.
이 역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수영 어민 회장님은 진짜 인생이 파격 그 자체야, 파격."
"한 걸음 한 걸음이 전부 전례가 없는 것들로만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샴페인 브레이킹은 누가 한대요?"
샴페인 브레이킹. 배의 이름을 지을 때 여성이 샴페인을 배에 부딪쳐 깨뜨리는 행사.
"4명이 진행한대요."
"배가 40척인데, 겨우 4명이 한다는 겁니까?"
"선주께서 명명식에 부를 만한 여성 인맥이 별로 없답니다."
"의외네요. 하수영 선주라면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미녀들일 줄 알았는데."
아무튼 샴페인을 깨줄 4명의 여성들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들을 맞이하러 나간 백두중공업 한두철 상무는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아는 여자가 별로 없다며?'
겨우 네 명이지만, 네 명 모두 하나같이 미모가 심상치 않다.
한국 톱여배우인 장효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정서희 부회장도 아는 얼굴.
그런데 남은 두 명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미레아라고 해요. 라스베이거스에서 하수영 의원님을 잠시 도운 인연으로 이런 근사한 행사에도 초청을 받았네요."
다행히 금발 여성 한 명의 한국어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로마노프라고 불러주세요. 러시아에서 왔어요."
러시아 미녀의 한국어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의사소통을 할 정도는 되었다.(오늘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영광입니다. 오늘 귀빈들을 가까이에서 에스코트할 한두철 상무라고 합니다."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가 든 한두철상무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네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기운을.
특히 장효주와 정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러시아에서 만났다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이 남자, 대체 해외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하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한두철 상무는 오늘 명명식이 별탈 없이 끝나기를 기원했다.
***
"사모님이 넷으로 불어났군. 이거 이거, 내명부를 모시는 보람이 있겠어."
-주인님은 이 상황이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거 같습니다.
"문제 될 거 있나? 나의 주인님, 하수르 나즈만 서지느한 유지르 지옌 안희 님께서는 아부다비 국적도 갖고 계시는데?"
-…….
"네 분이면 딱 좋아. 아랍은 아내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다고 하지 않나?"
김범석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흐뭇하게 웃었다.
명명식에는 당연히 하수영 계파원들도 초청을 받았다.
이서환 부산시의원, 정가덕 울릉군 수, 기타 울릉군의원 등등.
그들은 동서양의 조화를 이룬 네 여자들을 훔쳐보며 수군거렸다.
"우리 의원님, 아는 여자는 몇 명 없으시다고 하시더니."
"과연, 저 정도는 되어야 우리 의원님의 '아는 여자사람친구'가 될 수 있는 거군요. 완벽하게 납득했습니다."
"아는 여자가 몇 명 없는 게 아니라 알고 지내고 싶은 여자가 몇 명 없었던 거군요."
"몰랐는데 우리 의원님 여자 보는 눈이 겁나게 높으시네."
"그러고 보니 장효주 여배우, 정서 희 부회장님 말고 다른 여자와 일대 일로 식사하시는 걸 내가 본 적이 없어."
하수영 계파원들은 하수영의 눈높이를 알게 된 것에 만족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배에 부딪쳐 샴페인이 깨지고, 뱃고동과 함께 박수가 울려 퍼진다.
여자들은 각자 '할당받은' 10척의 배에 열심히 샴페인 브레이킹을 해주었다.
포항시민들 사이에는 곳곳에 사죄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포항을 버리지 말아주세요!]
[포항을 잠식한 부동산업자들을 내 쫓으시고, 포항을 살려 주십시오!]
[포항에 바닷다리 놔주세요!]
지상파 뉴스에서도 메인으로 다룰정도로, 인수식은 인기를 끌었다.
-23,000TEU 메가 컨테이너선 40척 일시 인수는 유례가 없었던 것으로…… 중략… 지방경제에도 큰 활기를 불어넣은 조선 사업…… 중략… 동급 60척 또한 한창 건조중이며…….
[이름을 받은 40척의 컨테이너선, 곧바로 콜롬비아로 출항한다!]
[콜롬비아산 콜라 원료 수송 임무를 띤 컨테이너 선단, 즉시 출항!]
기사를 보고 델지생건 경영진은 깨달았다.
C콜라는 이제 한국에서 팔릴 길이 막혔음을.
C콜라 본사 입장에서는 상관없다.
그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고, 한국 시장은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 높은 비중이 아니니까.
하지만 델지생건은 달랐다.
콜라 독점으로 열심히 꿀 빨던 시기가 이제 완전히 끝나 버린 것이다.
"우리도 가격을 조정하면 어떻게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1.5리터를 이제 와서 소매가 2,000원에 팔자고? 그럼 공장 출고 가를 얼마나 낮춰야 하는지 알고 있나?"
"하지만……."
"틀렸어. 이제 콜라 사업은 답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지. 콜라 하나로 끝난 게."
콜라는 델지생건의 본체가 아니다.
델지생건은 그밖에도 치약, 비누, 샴푸, 세제, 화장품 등 다양한 화학생활용품을 팔고 있다.
"우리 회사 제품 오프라인 매출 상당수는 수영그룹으로 빠져나간다는 걸 잊지 말게. 출혈경쟁 해봤자 저쪽에 명분만 쥐어줄 뿐이야."
"상무님 말씀이 맞습니다. 씨디원은 수영콜라를 출시할 때에도 우리 C콜라 견제를 안 했죠. 우리가 지저분하게 물고 늘어지면 씨디원도 더 이상 신사적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패배를 피할 순 없을 땐 깔끔하게 잘 지는 법도 승부의 한 방법이야."
"결국 원액 레시피를 가린다는 것은 그냥 변죽만 올리다가 끝났네요."
"언론 플레이에 우리고 한국C콜라고 간에, 시선만 빼앗긴 거지, 뭐."
"그나저나 원액 발주한 물량은 어떻게……?"
"어쩔 수 없이, 예정대로 추가 발주는 멈추고, 사업 철수할 준비해야지."
C콜라도 이미 한국지사를 철수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사장님이 너무 걱정입니다. 저번에 회장님께 불려가신 이후로, 내내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엄하신 분이잖나. 자식 그릇 보고 거기에 맞춰서 쉬운 사업 안겨 줬는데,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주력 아이템 하나를 날렸으니……."
당연하지만 재벌 계열사들은 오너기분이 사내 분위기를 좌지우지한다.
델지생건 임직원들은 한동안 콜라의 '콜' 자도 꺼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