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785화
195장 이것은 빨대라는 것이다 (1)
이반 요원은 혼미한 표정으로 하수영의 쏟아지는 말을 듣고 있었다.
벌써 2시간째,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뭔가 이쪽도 말을 하고 싶은데, 도저히 말을 끊을 타이밍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말을 가로챘다가는 나쁜 인상을 줄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까 원래 말보다 주먹이 항상 더 빠른 게 러시아의 장점이자 마스코트, 정체성 아닙니까?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상대를 쳤는데, 상대 입장에서는 전투기가 더 먼저 와서 퍼붓고 가니까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하느냐! 이렇게 버럭할 정도로 말이죠."
"……."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로마노프 요원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니까 이제 그만 용건을 말해주세요."
"로마노프 요원……. 그 아가씨는 정보기관 요원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럴 수 있죠. 원래 정보 기관끼리는 서로 정보공유를 하지 않고 견제하는 게 맞잖아요? 모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경쟁 정보조직 내부 사정을 어떻게 다 안다고 자신합니까. 그렇게 눈 감고 첩보 활동하면 오래 살기 힘들어요."
"진실입니다. 우리는 단독으로 귀하, 하수영 의원을 원거리에서 경호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부틴 대통령으로부터 내려온 지시입니다."
"……로마노프 요원이 정말로 요원이 아니라고요?"
"아닙니다.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이미 따로 인적조사도 마쳤습니다."
하수영은 천천히, 그녀에게서 가져온 명함을 살폈다.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SNS 주소가 써 있는 조촐한 명함.
"아니, 생긴 것만 보면 딱 봐도 미인계로 간 한 번 보려고 첩보장이 등 떠민 여자 요원이잖아요?"
"……귀하를 상대로 미인계로 간을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 이거 참. 나만 괜히 이상한 헛소리로 헌팅 작업 친 외국인 돼버렸네."
이반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생각보다 되게 자연스럽게 꼬셨던 것 같다고 말이다.
"좋습니다. 해외정보국에서 저한테 접근한 용건이 뭐죠?"
하수영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태연히 물었다.
저 여유 넘치는 태도 좀 보라.
이건 완전히 입장이 바뀐 게 아닌가? 하고 이반은 생각했다.
"오히려 저희가 확인하고 싶습니다. 러시아를 조용히 방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관광비자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관광이 목적이죠."
"한국과 일본이 억류 중인 잠수함을 놓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관광을 목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셨다고요?"
한국과 일본이 하수영을 찾아서 어떻게든 상황 중재를 맡기려고 하는 이 판국에?
"저희로서는 믿기 힘듭니다. 귀하의 진심을 알려 주십시오."
"흐음."
"그래야 저희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수영은 한참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틴 대통령이 날 만나고 싶어 합니까?"
꺾기라고는 없이 제대로 묵직하게 들어온 스트레이트 직구다.
이반 요원은 눈을 조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시선을 맞추고 끄덕였다.
"네, 매우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좋습니다. 지금 가죠. 그럼."
이반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
워싱턴은 모스크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실 하수영은 국제안보 면에서도 나름 중요한 인사다.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업체, 그리고 반수성 금속처리 기술의 소유권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워싱턴에서는 그를 단순한 곡물 기업가로 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워싱턴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결이 좀 달랐다.
"뭐지? 뭘 사러 간 거지?"
"포드 항모로는 부족했나? 설마 쿠즈네초프 항모가 탐이 나서 사러 간건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러시아가 유일한 항공모함을 팔겠어? 해군의 자존심 문제인데."
"항모가 아니면 다른 걸 사려고? 담수헬기? 아니면 초대형 화물기?"
"러시아 소방차, 제설차가 굉장히 크고 터프하지요. 어쩌면 하수영 의원이 그 모습을 보고 구매 욕구가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우리 미국에서도 얼마든지 충분히 잘 만들어줄 수 있는데."
우리 백화점만 오던 VVIP 고객이 어느 날 다른 백화점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워싱턴 정가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동안 하수영이 구매한 물품을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반응이다.
포드 항모 2척과 탑재할 비전투용 각종 항공지원기.
퀸 스텔리온 수십 척, 공중급유기 3기.
람보르기니 트랙터 수백 대와 볼보트레일러 수백 대.
초대형 담수헬기 수백 기.
이 정도면 대한민국 국방부보다 더 귀중한 고객이다.
그런 고객이 경쟁 백화점, 아니 경쟁 국가로 훨훨 날아가 버렸으니,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항모? 초대형 화물기? 담수헬기? 소방차? 제설차?"
"하수영 의원이 러시아에서 혹할만한 물건이 대체 뭐가 있을까요?"
"요즘 하수영 의원 이것저것 벌이는 사업이 많아서 장비 구매력이 예전 같지가 않아. 만약 러시아에서 크게 지르기라도 하면, 우리 미국에서는 그리 많은 돈을 쓰지 않겠지."
때문에 미국은 CIA까지 동원해서 하수영의 러시아 행보를 살폈다.
하지만 어느 마피아 아지트로 끌려간 이후로 행적이 끊겼다.
러시아 대테러부대가 바로 덮친 것을 보면, 러시아도 분명히 하수영의 입국을 안다.
그러나 마피아로부터 안전한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행히 하수영이 장효주와 통화한 것을 통해서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되자 밀실에서 부틴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록히드 마틴, 헌팅턴 인걸스 인더스트리즈(항모 제조사) 등 군수산업체는 하수영이 러시아제 무기에 '꽃히지 않기만을' 빌었다.
또한 지금 이 시기를 선택한 의도도 열심히 해석했다.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하수영 의원을 찾아서 동해 대척 중재를 맡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걸 피하겠다는 의도 아닐까요?"
"음, 하수영 의원 성격에 자기 책임도 아닌 일을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겠지. 피곤하기만 하고 얻는 것은 없으니까."
"겸사겸사 러시아 제설차 아이쇼핑도 하고, 아무래도 그런 의도 같습니다."
"우리 미국에 대한 압박이기도 할 겁니다."
"핵추진 잠수함…… 그게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그래서 저는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아무리 미끼라고는 하지만, 일본에 핵추진 잠수함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요."
참모들은 대통령을 그렇게 몰아붙였다.
"어차피 한 척뿐입니다. 그마저도 프로펠러가 파손돼서 가동불능, 차라리 우리가 회수하겠다는 조건으로 중재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프로펠러는 왜 고장이 난 건가?"
"일단 프로펠러 2축 모두 파손된 것으로 보입니다. 샤프트를 아무리 회전시켜도, 추진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습니다."
잠수함은 현재 한국 해군 사이에 갇혀 있는 상황.
일단 견인해서 도크에 올려서 자세히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좋아. 그럼 우리가 회수하겠다는 조건으로 한국을 일단 누그러뜨려야겠군."
"양쪽의 반발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일본은 주고 뺏는 것에 대한 반발.
한국은 왜 일본에 저런 것을 줬느냐에 대한 반발.
하지만 대통령은 태연했다.
"그건 잘 다독거려봐야지."
세계최강대국의 국가원수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
크렘린 궁.
부틴은 온화한 인상으로 하수영을 맞이했다.
국빈도 아니고 정식 외교 일정을 잡고 방문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 입장에서 하수영은 웬만한 국가원수보다 더 중요했다.
반도체와 반수성 금속을 양손에 움켜쥐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국가재정급 레벨의 막대한 개인 자산까지도.
"무엇을 드시겠소?"
부틴은 미소까지 띤 채 직접 하수영의 기호를 확인했다.
"러시아에 왔으면 역시 따뜻한 홍차죠. 홍차 한 잔 부탁드립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
하지만 부틴은 조금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실은 녹차인데 홍차로 잘못 알려졌다는 건 알고 있소?"
'이번에는 녹차인가 보네. 저번에는 콜라였었나? 사과주스였었나?'
"그럼 녹차로 부탁드립니다."
"폴로늄은 넣지 않을 테니, 너무 실망하진 말아 주시오. 너무 비싸. 우리 러시아 재정이 요즘 빠듯해서 말이오."
"아, 그건 좀 아쉽네요."
측근들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이나 억양은 매우 따스하지만, 주고받는 내용만 보면 살벌한 말다 툼을 벌이는 것만 같다.
둘이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가 없으니, 더욱 손에 땀이 고였다.
"지금 한국에서 귀하의 입장이 상당히 미묘한 위치인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게 보이나 보군요."
"이런 시기에 러시아를 대뜸 방문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겠지요?"
"세 나라가 알아서 결론 내리라고 자리를 피해 준 건 맞습니다."
"역시."
"제 공백이 한국, 미국, 일본의 생각을 복잡하게 꼬아놓겠죠. 머리 실컷 굴릴 겁니다."
세 나라가 러시아행을 놓고 각자만의 고민으로 머리를 끌어안게 만든 것이다?
부틴이 눈빛을 빛냈다.
"혹시 구체적인 의도 자체는 없었다는?"
"알아서 상상하고, 알아서 스트레스받겠지요. 원래 사람이라는 동물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무는 걸 잘 하잖습니까?"
"푸하하하!"
부틴은 입을 크게 벌린 채 껄껄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측근들은 한결 마음을 놓았다.
"그거뿐만은 아닌 거 같은데, 러시아에서 무언가 거래를 할 만한 게 있지 않소?"
"당연하죠. 예전부터 한 번 와야지, 와야지 하다가 홍수 난 김에 요트꺼낸 겁니다."
"그나저나 러시아어가 너무 자연스러운데, 정말 러시아가 처음인 게 맞소?"
"이번 생은 처음입니다."
"독학으로 공부했다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수준이오."
어느덧 녹차 두 잔이 나왔다.
부틴도 하수영과 똑같은 녹차를 마셨다.
'우리 러시아에서 무엇을 사려고 왔을까?'
러시아가 본 하수영은, 식량산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에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전형적인 다목적, 다국적 기업인이었다.
포드 항모를 구매한 것이 순수하게 병원선 운용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쿠즈네초프 항모를 원해서……?'
딱 1척 있는 항모, 해군의 유일한 자존심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됐고, 또 돈만 지나치게 잡아먹는 중형급 항모란 약점이 있다.
'차라리 항모를 팔고, 그 돈으로 신형 항모 건조에 보탠다면 장기적으로는 러시아 해군에 이익…….'
분명히 항모 하나만 달랑 사지는 않을 테니까.
그 밖에도 이것저것 원하는 게 있으니까 러시아를 찾은 게 아닐까?
'대담하군.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는데 사전협의도 없이 일단 입국부터 하고 보다니.'
포드 항모 2척까지 구매했으니, 아마도 세상이 만만했겠지.
하지만 부틴은 인정했다.
적어도 이 청년은 그런 오만함 정도는 품을 자격이 있다.
'우리 러시아 화물기와 헬기의 성능도 알아주지. 제설차 역시 개조하면 한국의 산악지대 장애물 제거용으로…….'
그렇게 부틴이 수십, 수백 가지가 넘는 물품 목록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가스관이 필요합니다."
"가스관? 하지만 북한은 신뢰할 수가 없소. 중간에서 훔쳐 놓고 시치 미나 안 떼면 다행이지."
"북한을 관통할 필요가 없죠. 바다가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부틴은 눈을 부릅떴다.
측근들도 놀라서 턱이 쩍하고 벌어졌다.
"바다에 다리도 놓았는데, 가스수송관이 뭐가 어렵겠어요? 우리 가스파이프 하나 놓을까요?"
약 10초 동안 말이 없던 부틴이 더욱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녹차는 마셨으니, 보드카는 어떻소?"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