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746화
186장 문어발이 뭐가 나빠? (1)
나노소프트 발머 스틴이 청담동에 들어왔다.
"이제 부사장이시라고요?"
"네, 요식사업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부사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승진이 아니라 강등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발머 스틴은 CEO로 명예롭게 은퇴했다가 라면 사업으로 복직했다.
"직함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성과만 잘 내면 그만이죠."
"하긴, 개인 대주주이시니까 직책은 별로 연연하지 않겠네요."
발머 스틴은 창업주 빌 고든 다음 개인 대주주다.
전임 CEO에 2번째 개인 대주주, 요식 사업이 올리는 무지막지한 매출.
무엇보다 하수영과의 강력한 인연으로 요식 사업부의 전권을 쥐고 있다.
덕분에 이사회에서 그가 가지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회사가 가진 유동현금을 모두 털어서 3,400억 달러의 식재료 선구매금을 만들어 수영사채에 갖다 바쳐도, 반발이 거의 없을 정도다.
"지금 미국은 화이자의 표적 살충제 부작용 때문에 난리도 아닙니다. 저번에 통화로도 말씀드렸지요?"
"내성종 문제가 심각한가 보군요."
"이놈들이 내성을 가지면서 몸집도 더 커지고 활동 범위가 늘어났습니다. 아몬드 농가는 내년 농사도 답이 없다면서 사업을 정리하는 분위기입니다."
"나노소프트와 계약한 농가는 문제없죠?"
"물론입니다. 랩터 킬러들이 맹활약을 해주고 있어서 꿀벌들은 안전 합니다."
발머 스틴은 함박웃음을 한 채 말을 이었다.
"특히 이번에 도입된 신형 기체가 아주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농가에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래요?"
"네, 사냥 속도가 엄청나다고 하더군요."
"역시 신상이 좋지요? 특제 인공지능을 따로 설정한 기체거든요."
"오, 어쩐지."
발머 스틴은 간략하게 요식 사업부의 현황을 보고했다.
"북미 간편조리식품 시장의 19%를 우리 나노소프트가 차지했습니다."
"런칭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20%를 눈앞에 두고 있군요."
"수영향신료 덕분이지요. 어떤 음식이든 맛을 한 단계 끌어올려 주는 기적의 향신료를 등에 업었는데, 오히려 성장이 느리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자본에서는 양키들의 혈기왕성함을 따라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하수영은 흐뭇함을 띠고 '양키 오토'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년 입금액은 매달 20억달러 정도 기대해도 될까요?"
"하하, 그 정도는 충분히 될 겁니다."
선납한 3,400억은 라면 식재료 구매에 대한 것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수익은 별도로 매달 꼬박꼬박 입금해야 한다.
"수영향신료만 따로 팔아달라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라서 거절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어림도 없죠."
"물론입니다. 어림도 없는 말이죠."
수영향신료를 이용해서 북미의 식품 시장을 싹쓸이하는 것.
은퇴를 번복한 발머 스틴의 크나큰야망이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식품으로 의회에서 반독점법 청문회 출석을 하는 겁니다."
"그 꿈, 반드시 이뤄질 겁니다. 제도 최대한 서포트하겠습니다."
"본사에서도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가맹점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물론이지요. 아, 안 그래도 슬슬 신상 메뉴를 출시하려고 하거든요?
오신 김에 한 번 맛보시겠어요?"
"오, 드디어 신상 메뉴가 나오는 겁니까?"
수영레스토랑은 라면 메뉴 하나, 그것도 고급재료의 양에 따라 가격을 두 종류로 나눈 게 전부다.
신상 메뉴라고 하자 발머 스틴은 잔뜩 기대감을 품었다.
"바로 파스타입니다."
"파스타요? 그런데 파스타는 라면과 달리 국물이 없지 않습니까?"
"액체 소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죠. 국물이라고 하기는 뭣하군요. 아무튼 직접 보시죠."
그리고 하수영은 요리를 시작했다.
냄비에 수영조리용수를 붓고 펄펄끓인 뒤, 황비버섯을 한 움큼 집어넣는다.
"아, 황비버섯을 우려낸 물로 면을 조리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조리법이 특별한 건 아닙니다."
"확실히 맛이 다를 거 같습니다. 왜 기존 파스타 업체들은 이런 생각을 못 했을…… 아, 라면 매장들과 마찬가지였겠군요."
발머 스틴은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답을 깨달았다.
바로 부담되는 재롯값 때문이다.
"맛을 좀 더 내자고 비싼 황비버섯을 썼다가는 장사 망할 게 뻔하니까요.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조리법입니다."
"황비버섯 우려낸 수영조리용수로 면을 데치고 소스를 만들다니. 파스타 맛이 아주 기가 막히겠습니다."
"그리고 수영향신료로 마지막에 마무리를 해주는 겁니다. 자, 드셔 보시죠."
"이미 향부터 다르다는 게 느껴집니다."
경건하게 맛을 본 발머 스틴은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어 올렸다.
"사실 파스타를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맛입니다. 제가 이 정도면 파스타애호가들은 분명 환장할 겁니다."
"국수와 우동도 있습니다. 이제 수영레스토랑은 라면 한우물만 파는 게 아닌, 종합 면요리 전문레스토랑이 되는 겁니다."
"매출이 껑충 뛰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옵니다."
나노소프트 요식 사업부의 내년 기대 매출은 1,000억 달러.
하지만 새 무기를 한꺼번에 여럿장착한다면, 그 이상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이거 미국에 돌아가면 더욱 바빠지겠습니다. 몸이 근질근질하군요."
"그래도 오신 김에 천천히 놀다가 가세요. 사람이 너무 일만 하면 건강에 안 좋아요."
"물론이지요."
발머 스틴은 한국을 자주 찾는 편이다.
그가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방문 목적은 친분 다지기다.
'요즘 실리콘 밸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 말이지. 너도나도 수영레스토랑 프랜차이즈를 하려고 기웃거리고 있으니까.'
모래나 파먹어야 할 녀석들이 감히 면요리를 넘보는 것을, 발머 스틴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핵융합 연구에 투자를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천재 과학자 에릭 로한이 연구하고 싶다는데 제가 별수 있습니까? 당연히 냉큼 돈을 내어드려야지요."
"혼자서 프리덤을 개발한 인물 아닙니까?? 저라도 Shut up take my money 했을 겁니다. 그런데 언제쯤 상용화가 될 거 같습니까?"
발머 스틴은 '그게 과연 될까?'라는 가정 자체는 머릿속에 올리지 않고 있었다.
프리덤을 개발한(것으로 오해한) 에릭 로한.
2년 만에 거대한 기업의 제국을 이룬 하수영의 재물운.
그 둘이 힘을 합쳤는데, 핵융합 따위가 뭐가 대수겠냐는 믿음이었다.
"음, 이건 제가 주요 가맹점주니까 믿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밀 지켜주실 수 있죠?"
"물론입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 가는 사이 아닙니까? 절대 지키겠습니다."
"아니, 평생 함께 가는 사이인데 '절대' 비밀 지킬 거예요?"
"제가 비밀 지키는 척하면서 적당히, 왼손이 모르게 살짝 흘리겠습니다."
하수영은 슬쩍 웃었다.
"아무튼 비밀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믿고' 말씀해 주십시오."
주변에 사람이 전혀 없는데도, 하수영은 괜히 목소리를 낮췄다.
"에릭 로한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오오, 역시."
"그런데 현대 기술로는 그것을 구현하는 게 어렵다고 하네요. 기반기술을 한껏 끌어올리는 게 관건이랍니다."
"그것 역시 시뮬레이션 예측이겠군요?"
"네, 그렇죠."
"그럼 '수영조명'의 핵심 과제는 기술을 고안하는 게 아니라, 핵융합모델을 구현하는 기술을 확보하는데 있겠군요. 그 친구 머릿속에 있는 모델 말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전 그게 될 때까지 돈만 대줄 뿐이죠."
"비밀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수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일어났다.
"오랜만에 참치나 썰러 가볼까요?"
"좋습니다."
***
불안한 표정을 한 교수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자꾸만 입구 쪽을 두리번거리며, 로한이 언제 나타날지 기다렸다.
"사장님이 우리만 한꺼번에 호출한 것은 그러고 보니 처음 아닌가요?"
"그렇지요. 처음이지요."
"이거 괜히 긴장되는데……."
"사장님 성격에 그냥 친분이나 다 지자고 한꺼번에 불렀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효율을 중시하시는 분아닙니까?"
그동안 로한은 창립식 이후 한 번도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프리덤을 통한 원격 개별 지시로 회사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매일 끊임없이 내려오는 세부 지시를 통해, 교수들은 로한이 회사의 모든 것을 낱낱이 꿰뚫어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움과 함께 묘한 희열을 주었다.
이렇게 철저한 천재 과학자라면, 정말 핵융합을 완성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로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수들은 숨이 멎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
그들의 머릿속에 일제히 든 생각은 이거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는 거지?
말도 안 되는 비율과 다리 길이.
조각을 빚은 듯이 흠잡을 데 없이, 그야말로 완벽한 얼굴.
노벨 비주얼상이 있다면, 아마도 저 사람은 서너 번은 수상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 사람이 천재 인공지능 개발자이자, 핵물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역시 신은 불공평하다.'
'한 사람한테 어떻게 저런 많은 재능을…….'
'영화 보니까 무술도 장난 아닌 거 같던데, 대체 어떻게…….'
자리에 앉은 로한이 교수들을 둘러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곧 본격적으로 핵융합 연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전에 거쳐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교수들은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키며 로한의 입에 집중했다.
"여러분들은 핵융합 연구를 견인할 주요 책임자들입니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서약이 필요합니다."
"보안서약이라면 이미 입사하면서 전원이 썼습니다."
"그건 서약이 아닙니다. 서약의 이름을 하고 있을 뿐, 계약에 불과합니다."
교수들은 살짝 어리둥절했다.
계약? 서약? 그게 뭐가 다르다고?
나이가 가장 많은 교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개별적인 충성맹세를 바라시는 겁니까?"
"비슷하게 이해하셨습니다."
"……."
"저희가 어찌하면 될지……."
"내가 가진 지식과 기술은 시대를 초월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을 통해 구현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아야 하며, '영원히' 비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시대를 초월했다는 말에 교수들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여러 의구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외계문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든 출처는 나의 머릿속이자 나의 개인 연구소입니다. 그 명제에 어긋나는 의구심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마십시오."
"어떤 놀라운 것을 듣거나 보게 돼도, 출처에 관한 의문을 절대 제기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교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강경한 내용이 살짝 염려스럽지만, 그만큼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겠다는 뜻이리라.
동시에 지식의 출처에 관해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서약하겠습니다."
"저도 서약하겠습니다."
"당연히 서약해야지요. 결국 좀 표현이 강화된 보안계약 아닙니까?"
교수들이 너도나도 동의하고 나섰다.
그제야 로한은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교수들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충성을 저버릴 경우, 나는 여러분들의 전 재산 박탈은 물론, 여러분들의 자손까지 모두 추적하여 유전자를 종식시킬 것임을, 그 서약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받아…… 들이겠습니다."
보안서약치고는 너무 살벌하다 생각하면서, 교수들은 너도나도 동의 했다.
"이제 충성 서약은 이뤄졌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저어…… 만약 납치나 고문 같은 것으로 비밀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도 맹세를 저버린 게 됩니까?"
"나는 기계가 아닙니다. 유연하게 판단합니다. 일정 부분 정상참작이 됩니다."
교수들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따로 계약서 같은 것을 쓰지 않지? 그냥 대면으로 충성 맹세를 원했던 건가?'
"만약 그런 정상참작 사유 없이 서 약을 깨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계약은 깰 수 있지만, 서약은 깰수 없습니다."
"……?"
"충성을 지킨다는 게 서약이 아닙니다. 충성을 버릴 경우,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게 서약의 내용입니다. 서약은 결국 이행될 겁니다."
로한은 오른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바로 이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