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712화
177장 물과 반도체 (6)
"반갑습니다. 하수영입니다."
시원스러운 인사와 함께 악수를 청한다.
이문석 사장은 정말 하수영이 나타나자 속으로 당황을 금할 수 없었다.
'정서진 대표만 몰래 포섭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다 틀어졌잖아?'
공정 기술은 정서진이 개발했고, 하수영은 돈을 댔다.
그것이 이문석 등 서해전자의 관점.
따라서 쩐주인 하수영 몰래 정서진을 회유해서 기술을 넘겨받고, 서해 전자가 새로운 쩐주가 된다는 전략이었는데.
갑자기 정서진이 하수영을 이 자리에 대뜸 불러 버렸다.
'일이 틀린 건가? 둘 사이가 그 정도로 끈끈했나? 아니면 하수영 의원이 그만큼 파격적인 조건으로 투자를 한 건가?'
매입비로 일시불 3,000억 원.
특허 기간 동안 매년 500억 원.
매출의 15% VS 순이익의 30%, 그중 높은 금액.
이것도 넘치도록 파격적인데, 그것을 가뿐히 무시할 만큼?
"……서해전자 반도체 사업부 사장 이문석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초면이지만 오래 알고 지낸 분처럼 친근하네요. 아마도 귀한 건물을 들고 계신 분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귀한 건물……."
이문석 사장은 퍼뜩 하수영의 별명을 떠올렸다.
청담동 킬러.
청담동 부동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물 수집가.
이상하리만치 청담동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가치 높은 다른 강남 부동산에는 흥미가 전혀 없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입자 집합명령 기술 특허를 팔면 서해물산이 가진 청담동 아크리엔 빌라를 통으로 주시겠다고요?"
"아, 예. 그런데 입자 집합 명령기술이라고 하셨습니까?"
뭔가 기술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아서, 이문석 사장은 눈을 빛냈다.
정서진은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청담동부동산에 미치신 분이라고 하지만…….'
그 엄청난 기술을 적에게 고이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 지식을 알려줘도 결국 활용을 못 하면 소용이 없으니까, 그걸 노리고 오히려 돈만 받아내시려는 건가?'
오지의 원주민들에게 핵융합로 기술을 알려줘 봤자 전혀 활용을 못하는 것처럼.
서해전자도 입자 집합 명령 기술을 줘봤자 전혀 구현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우리, 어렵게 갈 거 뭐 있습니까? 제가 값 제대로 쳐 드릴 테니까 파시죠."
"그건 곤란합니다. 아크로엔 빌라는 원래 주요 임원 제공용으로 지은 주택입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거 잘하면 물꼬를 틀 수도 있겠는데?'
이문석은 여유를 되찾았다.
상대방의 약점을 찾은 짐승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이문석 사장님, 지금 제가 사장님께 좋은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놓치지 말고 잡으세요."
"기회라니요?"
"아, 이거 참. 또 괜한 잘난 체만 하게 생겼네요. 하하. 일어나시죠."
하수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이문석은 당황해서 따라 일어났다.
"지금 어디 가시려고 하시는지……."
"보여드릴 게 있으니까 따라오시죠. 정 사장님, 반도체 공장으로 갑시다."
"네, 안내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차로 가지요. 일단 승용차는 워낙 불안해서요."
그렇게 해서 하수영의 캠핑카를 타고 셋은 반도체 공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엉겁결에 따라가게 된 이문석은 필사적으로 생각을 굴렸다.
'갑자기 공장으로 왜 데려가겠다는 거지?'
상식적으로 쩐주인 하수영이 기술을 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현덕도 기술 개발자인 정서진을 포섭하라고 한 것이고.
지금 하수영의 행동에 담긴 목적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현덕 부회장이 운전대 잡고, 뒤에 편안히 타서 이동해 본 적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문석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그룹의 위계질서는 확고합니다."
"제가 이렇게 너그럽고 유연한 사람입니다. 다른 재벌 총수가 어디 자기가 운전대 잡고 부하 직원 뒤에 태우는 거 본 적 있나요? 하하."
"그, 그렇습니다만……."
"한국 재벌들 참 문제가 많아요. 한 줌도 안 되는 지분 가지고 회사 전체가 자기 것인 마냥 이리저리 흔들지요. 한 5%는 되려나 모르겠군요. 회사가 주주들 거지, 재벌 가문게 아니잖아요?"
"……."
"그에 비해 우리 서진파운드리는 지분 관계가 깔끔하지요. 제가 이렇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자기 자랑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문석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분명히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
비아냥이든,조롱이든, 떠보기든…….
어느덧 캠핑카가 반도체 공장에 도착했다.
"정 사장님, 전부 보여드리세요."
"네? 정말 전부 보여드립니까?"
당황했던 정서진은 하수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문석은 궁금증을 가득 품은 채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저번 견학 때는 들어가지 못한 구역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벽이 나오고, 수많은 2족 보행 로봇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다니는 광경이 나타났다.
"……!"
이문석은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 못이 박혔다.
마치 수십 년 뒤의 미래 공장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충격이었다.
"이, 이건 대체……!"
"서진파운드리 공장에 상주 직원이 없는 이유입니다. 로봇이 전부 다 처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수영이 자랑스럽게 설명했지만, 이문석은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대형 공정 설비가 눈에 띄지 않는다.
서해전자도 공정 설비에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대형 무인화 장비로 사람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반도체 공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입자 집합 명령 장치입니다."
정서진이 모니터 패널을 작동해서,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반도체 부품이 갑자기 생겨나고, 곧바로 출하되어 로봇의 손에 옮겨진다.
그리고 또다시 반도체 부품이 생겨 나고, 밖으로 꺼내지고, 반복하고…….
"이거 CG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실시간 내부 공정모습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반도체가 갑자기 생겨난다고요? 이걸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무형 에너지를 이용한 3D프린터…… 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이문석은 정수리가 감전된 듯한 충격에 몸이 흔들렸다.
무슨 설명인지는 대번에 이해했다.
그래서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 게 말이 되는가?
"우리 공장은 반도체 설계도대로 실리콘과 기타 입자를 차곡차곡 쌓아서 제품을 만듭니다. 그래서 화학약품 처리가 필요 없고, 세척 과정도 불필요하지요. 물을 안 쓰고, 오염 물질 배출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
이제는 더 놀랄 힘도 없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파르르경련하는 눈으로 하수영을 바라본다.
그가 해맑게 웃으며 끄덕인다.
"서해전자의 원시적인 공정 기술과는 비교도 안 되죠? 영광으로 아십시오. 회사 외부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이 비밀을 알게 되셨습니다."
"제게…… 제게 이걸 알려주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서해전자 파운드리 공장이 망할까요, 안 망할까요?"
"……."
파운드리는 무조건 접어야 한다.
아니, 생산 자체를 접고 아예 팹리 스로 전환을 해야만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기술을 무슨 수로 당해 낸단 말인가.
이런 걸 그런 푼돈으로 삼키려 했으니, 정서진이 하수영을 바로 호출한 것이리라.
"이번 생은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서해전자가 최근에 자꾸 껄떡거리더라고요. 그래서 손 좀 봐주려고 파운드리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서해 전자 반도체는 내 손에 망할 겁니다."
이문석은 덜덜 떨렸다.
하수영의 선언과도 같은 그 말을, 조금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문석 사장님은 청담동부동산을 들고 왔으니 제가 기회를 드리지요."
"기회…… 라고 하셨습니까?"
"TSMC로 옮기세요. 아, 그전에 아크리엔 빌라는 넘기시고요. 가격은 좋게 쳐 드릴 테니, 서해그룹에서도 특별히 문제 삼지는 않을 겁니다."
빌라 하나 매도한 거 가지고 커넥션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
이문석은 당연한 듯이 'TSMC로 옮겨라' 라는 하수영의 태도에서, 서진파운드리의 진정한 위엄을 느낄수 있었다.
'그 정도는 TSMC에 통보 하나로 모두 끝난다는 것이겠지…….'
"침몰하는 배에 계속 있으실 건가요? 아니면 기회를 잡아보시겠어요?"
"……죄송합니다. 회장님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문석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반도체 생산을 접더라도, 자신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팹리스로 빠른 전환을 꾀하는 과정에서 그룹 내 자신의 입지는 더더욱…….
"반도체 사장까지 해보신 분이 상황파악이 이렇게 안 되시네. 지금 저는 우리 회사 기밀을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나가시려고요?"
"예?"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닙니다. 회사 최대 기밀을 목격하셨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제, 제가 마음대로 들어온 게 아닙니다!"
"하하, 이문석 사장님은 선택권이 없어요. 이미 판은 벌어졌고, 적응하시는 수밖에요."
이문석은 속이 어지러웠다.
아니, 제멋대로 자기들 비밀을 보여주고는 그걸 가지고 협박을 한다고?
보통은 어떻게든 비밀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이렇게 선심을 베푸는 데도 거부하신다면야…… 저로서도 어쩔 수 없겠지만요."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문석은 괜히 불길한 느낌이 들어,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저를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출된 회사 비밀을 어쨌든 간에 지켜야지요. 안 그런가요?"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TSMC 자리까지 마다하시는 분인데, 저도 그 이상은 해드릴 마음은 없고, 참, 자제분들이 아주 명석하고 예쁘시던데요?"
순간 이문석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수영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음기 없이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밀 유출은 제가 알아서 잘 막겠습니다. 돌아가셔서 '죽을 때까지' 서해일가에 충성하시면 됩니다."
그 순간, 이문석은 얼마 전에 봤던 '맨 프롬 콜롬비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수영이 연기했던, 마약상 김주환.
끝없는 탐욕에 항상 굶주려 있는, 그 지독한 살의의 욕망.
어쩌면 그게 연기가 아니라 본모습이 아닐까 하는 충격이, 지금 그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생각하기 전에 생존 본능이 그렇게 근육을 움직였다.
"TSMC로 가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수영이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언뜻 불량해 보이는 자세, 그러나 압박감은 숨을 쉬지 못할 만큼 더욱 깊어졌다.
영화에서 느꼈던 맹견의 음성, 마치 송곳니가 고막을 깨무는 듯한 두려움이다.
"서해전자 반도체는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반드시 망합니다."
"아크리엔 빌라는요?"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TSMC는?"
"……제가 꿈에 그리던 직장입니다."
"제가 강요했나요?"
"아닙니다. 모두 제 선택이고, 회장님이 내려주신 은혜입니다."
"이창영 회장이 행랑채 관리는 잘했네요."
***
이문석은 술을 마셨다.
하수영의 눈빛과 속삭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술로 씻어 내리려 했다.
'분명히 나와 가족들을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고 했어.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회사의 기밀을 보여준 것이겠지.
이제야 납득이 간다.
어째서 하수영이 2년 만에 그런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그는 수십 년간 서해일가에 충성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귀영화라는 대가가 있기에 가능했던 충성.
그리고 부귀영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이다.
'아크리엔 빌라…… 그것만 넘기면 된다 이거지.'
이문석은 양주 두 병을 혼자 다 비우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살벌하던데요. 저도 숨죽이고 봤습니다. 정말 연기력이 대단하시더군요. 영화에서부터 느꼈지만, 정말 대배우의 자질이……."
"아, 연기로 보이셨어요?"
"……예?"
"전 진심으로 말한 건데."
"……정말이십니까?"
하수영은 살짝 굳은 정서진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마음만 그렇다는 겁니다. 진심으로 경고하면 넘어올 거라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설마 비밀 유출 막자고 사람 죽어 나가는 그런 일이 벌어졌겠어요?"
"만약… 이문석 사장님이 끝내 거부하셨다면……."
"아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상상하세요? 그럴 리가 없다는 '계산'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이문석 사장님은 망해 가는 서해 전자에서 TSMC로 탈출해서 좋고, 저는 아크리엔 빌라 얻어서 좋고, 모두가 윈윈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