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707화
177장 물과 반도체 (1)
"탈탈 털었다. 탈탈 털었어."
텅 빈 미국 계좌를 보며 하수영이 말했다.
프리덤의 새 본체를 위해서, 미국에 갖고 있던 돈을 전부 다 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한국에서 돈을 송금해야 했다.
"중국에 황비버섯농장 세팅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너 새 본체는 꿈도 못 꿨겠다."
-정말 다행입니다, 마스터.
"그래도 돈 마냥 쌓아두기만 하는 것보다, 이렇게 시원하게 한 번 날려주니 마음이 편하네."
하수영은 후련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근데 나노소프트가 그렇게 열심히 벌어줬는데, 건물 하나에 배 두 척, 새 컴 하나 맞췄다고 모자랄 줄이야."
발머 스턴이 들었다면 억울해서 눈을 부릅떴을 발언이다.
"언제 조립하려나. 이거는 부품 전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일이네, 일이야."
-적어도 내년은 되어야 조립 준비를 해볼 수 있겠군요.
"왜, 못 기다리겠냐?"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만 어서 빨리 새 몸을 얻는 그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나저나 새 몸으로 이사가면, 너 지금 몸은 어떻게 할 거냐?"
지금 프리덤의 슈퍼컴퓨터 본체도 스펙만으로 세계 30위 안에는 가뿐하게 들어갈 수준이다.
게다가 하수영의 세심한 손길을 받은 세팅을 거쳤다.
일반 슈퍼컴퓨터로 써도 동급 하드웨어 스펙보다 월등한 성능을 보일 것이다.
-당근마켓에 내놓으면 팔릴까요?
"거기 진상 많아서 안 돼. 깎아 달라, 환불해 달라, 자기 집까지 가져와 달라, 배송비 빼달라, 중고거래가 어디 쉬운 줄 아냐?"
-그래서 마스터는 중고거래를 안하시는군요.
"내가 급한 대로 지금 네 몸, 중고로 샀다가 업그레이드 여러 번 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잖아.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수영은 옛날 생각을 하며 투덜거렸다.
"뭐든지 새것이 좋은 법이야. 그나 저나 확실히 애물단지네. 치우긴 해야 할 텐데."
-제가 한 번 구매자를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썼던 몸이니만큼, 아껴서 잘 쓸 만한 사람을 찾아보렵니다.
"최적화 잘되어 있어서 OS만 깔면 바로 잘 돌아간다고 광고해."
-네, 마스터.
지금 당장 새 본체로 이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간은 충분하다.
부품값으로만 수백억 달러 이상을 지출한 새 본체.
최고급 부품들을 아낌없이 듬뿍 사용해서 조립될 슈퍼컴퓨터.
과연 얼마나 회로 향상이 이뤄질까?
프리덤은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졌다.
'좋은 구매자가 안 나타나면 그냥 구형 바디도 내가 써야겠다.'
***
하수영이 대대적으로 부품을 주문하자, 당연히 서진파운드리의 수주량도 늘어났다.
윈텔, 마이크론, 엔비도, ADM 등에서 추가 우선발주를 새로 넣은 것이다.
"다른 것은 조금 느려도 좋으니, 반드시 이것들부터 우선해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거 부품들 쓰실 분이 바로 우리 회사 회장님이십니다."
정서진은 의지를 불태우며, 곧바로 프리덤한테 지시했다.
"프리덤."
-발주요청서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미 생산 개시했습니다.
"오, 역시 빠르구나."
-제가 쓸 새 본체 구성품이니만큼 당연하지요.
"아, 그래?"
-네, 저 이제 새 몸으로 맞추기로 했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한꺼번에 대대적으로 주문이……. 그럼 이번에 회장님이 큰돈 쓰셨겠구나?"
-미국에서 번 돈 다 털어도 모자라서 중국에서 번 돈도 일부 송금했습니다.
"나노소프트 요식사업부가 버는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그걸다 쓸 정도라니……. 하긴, 이 정도 물량이면 소매가격도 수백억 달러는 거뜬하겠네."
정서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무인 공장 내부 CCTV 화면들을 둘러봤다.
수없이 많은 로봇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면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저 많은 로봇들을 움직이는 것은 프리덤.
성능 향상된 새 본체를 얻으면, 반도체 공장의 이익도 커지겠지?
"근데 옵테인 너무 비싸지 않아?"
1테라 기준으로 1,400달러, 물론 하수영은 대량구매이니만큼 할인을 추가로 받는다.
"이번에 한해서 우리가 제조원가로 납품하면, 그게 본사에도 이익이 아닐까? 부품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잖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본체 하나 새로 맞추자고 서진파운드리의 몸값을 낮춰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정서진은 깔끔하게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사업 수완은 프리덤이 자신보다 월등하게 뛰어남을 인정했다.
'AI라서 그런지, 숫자에는 참 민감하단 말이야. 특히 돈 말이지.'
납품 예정 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데, 불현듯 포털사이트에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속보! 수영그룹, 윈텔과 140억 달러짜리 초대형 구매계약 맺어.]
[ADM, 수영그룹에 백억 달러가 넘는 GPU 매매 계약 체결.]
[IBM, 슈퍼컴퓨터 케이스 납품 계약 맺다.]
대형 언론사들이 '수영그룹'의 부품구매 계약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정서진은 내용이 순식간에 연상되었다.
"기레기들 또 펜 가지고 떼쓰기질 시작했네."
[어째서 서해전자의 우수한 D램을 쓰지 않고, 비싸기만 한 옵테인을 채택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약간의 성능 향상을 위해 수백억달러 이상을 낭비한 셈.]
[서진파운드리에 일감 밀어주기 의혹? 부당한 견제로 인해 떨어지는 서해전자 매출, 근로자들의 근심 또한 늘어나다.]
[농민의 피땀을 흘려 번 돈, 이런 식으로 탕진해도 되는가?]
[경영자라고 해서 회사를 이렇듯 무분별하게 좌지우지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 상장회사도 아니고 주주가 한 명뿐인 회사인데, 당연히 주주마음대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정서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서해전자 열심히 빨아준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줄 아나?"
-자기들에게 광고를 줄 때까지 열심히 물어뜯겠다는 전략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 그런 식의 협상 전략을 구사하는 걸까?"
-상대를 힘껏 후려쳐서 자기 힘을 과시하면 상대가 알아서 굽히며 협상을 시도할 거라는 착각입니다. 2차대전 때 진주만 습격도 그런 정신 승리가 바탕이 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돈이 많이 들어간 신문사들이네."
-실제로 제 자체적인 조사 결과, 우리 그룹에 부정적인 언론사와 언론인들은 '펜의 힘을 보여주면 알아서 광고를 나눠준다. 그때부터 튕기면서 친분을 쌓으면 된다.'라는 생각에 다수가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프리덤이 덧붙였다.
-겸사겸사 광고주인 서해그룹한테도 잘 보이고 그러는 거죠.
"근데 잊을 만하면 자꾸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데, 한 번 손을 봐줘야 하지 않나? 회장님은 소란이 너무 커질까 봐 가만히 놔두시는 건가?"
-마스터는 울타리 밖에서 앵앵거리는 벌레 떼한테 살충제 뿌려봤자 약값만 아깝다고 생각하십니다. 이런 거에 연연하지 않으시는 분이기도 하고요.
"인정한다. 우리 회장님 멘탈이 보통이 아니시긴 하지."
-사실 울타리 몰래 넘다가 걸려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수영그룹의 컴퓨터 부품 구매는 서해전자에서도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반도체사업부는 군침을 흘리면서 아까워했다.
"윈텔의 옵테인 대신에 우리 서해 전자의 D램과 SSD로 구축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성능 조금 높이자고 말도 안 되는 돈낭비를 했네요."
"아무래도 우리 회사 제품을 살 수는 없으니까 눈물을 머금고 값비싼 옵테인으로 방향을 돌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D램과 SSD는 서해전자가 성능이나 가격 면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하지만 수영그룹은 서해그룹과 여러 모로 편하지는 않은 사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D램과 SSD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옵테인으로 눈을 돌린 것이리라.
그것이 서해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착각이었다.
"괜히 파운드리에 목을 매서는……."
"그것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확실한 갑이 될 수 있었을 텐데요."
"아니, 종합반도체회사가 무슨 파운드리야, 파운드리는."
임원들은 저마다 혀를 끌끌 찼다.
보는 바와 같이, 반도체사업부도 파운드리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있다.
어느 조직이든지 덩치가 커질수록 다양한 입장이 나오게 마련이다.
사기업이든, 의회든, 행정부이든 간에.
"이번에 래플 파운드리 생산 주문크게 받았다고, 파운드리 공장에서 아주 기세가 등등한가 봅니다."
"래플 하청 그거 일시적인 겁니다. 서진파운드리 견제한답시고 어쩔 수 없이 손잡은 거죠. 오래 못 간다고요."
"파운드리 빨리 접고 시스템 메모리 쪽 투자나 더 늘렸으면 하는데."
"종합반도체회사에 누가 위탁생산을 맡기겠냐고요. 기술 유출 위험이 항상 있는데."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오너 일가에까지 닿지 못한다.
"저번에 파운드리 공장 새로 짓는다고 100조 원 날려먹은 거 생각하면……."
"그 돈을 시스템 메모리 쪽에 더 집어넣었으면 지금쯤……."
"에이, 이제 와봤자 다 지난 이야기죠."
그렇게 소소하게 불만을 털어놓고 있을 때, 직원 한 명이 황급히 다가와서 낮게 보고했다.
"이사님, 물탱크 용량이 경계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탱크에 물이 없어?"
"네, 지금 7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반도체 공장에는 대량의 물이 필수다.
그냥 물이 아니고,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한 순수한 물이 필요하다.
공정과정에서 반도체 표면의 화학물질을 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서해전자 반도체공장은 하루에 20만 톤 이상의 물을 쓴다.
"아니, 뭐가 문제인 거야?"
"수원시에서 며칠째 순환식 단수조치를 하고 있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단수 조치?"
"네, 상수원에 문제가 생긴 거 같습니다."
"아니, 이 양반들이……. 그렇게 자기에 지역에 공장 지어달라고 애걸 복걸을 할 땐 언제고, 물 공급 하나도 제대로 관리 못 해줘?"
임원들은 화가 난 얼굴로, 이 자리에 없는 수원시 공무원들을 비판하고 들었다.
"물 없으면 공장 절대 안 돌아간다고, 우리는 공업용수 시설이 훨씬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대체 수도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평생 행정법만 파고든 친구들이 뭘 알겠어요. 공장 돌리는 데 하루에 물 수십만 톤 이상씩 들어간다고 했을 때, 부시장이 그게 뭔 개소리 냐는 썩은 표정 짓던 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가만, 이거 혹시 서진파운드리 때문인 거 아닙니까?"
"아, 그러네. 거기서도 우리 못지않게 물을 많이 쓸 테니까……."
"수도시설을 갑자기 확충하진 못했을 테니, 서진파운드리 공장이 돌아가면서 경기도 전체에 물이 부족해진 거라면 말이 되네."
"이건 수원시가 아니라 경기도 전체에 항의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다들 분개해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김 팀장, 서진파운드리에서 물 얼마나 쓰는지 알아보고, 수원시하고 커넥션 같은 거 없나 그것도 조사해."
"네, 상무님."
"뼈 빠지게 일해서 지역경제 활성화해줬더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좋아, 어디 두고 봅시다."
서진파운드리에도 물을 많이 나눠주느라 공급에 정체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임원들은 당연히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 날 돌아온 보고 내용은 전혀 달랐다.
"서진파운드리는 물을 거의 안 쓴다고 합니다."
"뭐? 물을 안 쓴다니?"
"아니, 물을 안 쓰고 어떻게 반도체를 만들어?"
"월 수도요금이 한 번도 만 원 이상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수도사용량도 체크했는데, 일반 가정집보다 적은 수준입니다. 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달도 많았습니다."
임원들은 충격에 빠졌다.
화학약품 세척이 중요한 만큼, 반도체 공장은 물이 생명이다.
그런데 물을 전혀 안 쓴다고?
"그 친구들, 혹시 공기분사세척 방식을 쓰는 거 아니야?"
"설마요. 그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