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96화
175장 이것은 하이엔드라는 것이다 (1)
"야드, 안 됩니다. 마일, 더 안 되죠. 갤런? 앞으로 리터 쓰세요. 파운드? 단위 착각해서 기름 부족으로 김리 착륙장에 비상 착륙한 게 이제 40년이 다 되어가요."
정서희는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해리? 피트? 저도 해리포터 좋아해요. 그런데 앞으로 미국 때문에 싫어하게 되는 일은 없길 바라요."
"……."
발머 스틴은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얌전하게 듣고만 있었다.
한때 나노소프트의 CEO로서 전 세계 IT 기업 우두머리로서 대활약을 펼쳤지만, 지금은 프랜차이즈 본사 부사장 앞에서 얌전히 깨지는 가맹점주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이게 버릇이 돼서 그만…… 앞으로는 근본도 없는 야드파운드 갤런 법은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도량형은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해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아무튼, 한 달에 2억 4,000만 리터의 조리용수가 필요하다는 거네요. 무게로는 24만 톤."
"네,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발머 스틴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24만 톤이면 몇 파운드지? 으으… 아, 아니! 내가 지금 대체무슨 생각을!'
몸에 밴 습관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떨쳐지는 게 아니다.
발머 스턴은 바로바로 업데이트가 안 되는 자신의 멘탈이 원망스러웠다.
'발머! 앞으로 또다시 본사 앞에서 이런 실수를 했다가는 이름을 탈모로 바꿔야 할 것이다!'
"당장 공급을 할 순 있지만, 프랜차이즈는 모든 매장의 맛이 동일해야 하는 게 핵심이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일부 매장에만 우선적으로 공급할 수는 없죠. 전체 매장에 공급을 하려면 먼저 물탱크 시스템을 준비하셔야 할 텐데."
"저희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단 장비 세팅부터 그럼 시작하죠. 오신 김에 탱크 제조사와 미팅이나 하실까요?"
"영광입니다."
나노소프트 전 CEO 발머 스틴은 한참이나 어린 여자를 졸래졸래 따라다녔다.
***
(주)한주공업.
수질 정화 장비 시설을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나름 기술과 오랜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늘 그렇듯 밴드 업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원청 기업이 발주를 주면 거기에 맞춰서 제품을 만들고, 납품을 올리는 식으로 먹고산다.
보통은 주로 수자원 공사가 원청이고, 가끔 중동에서 담수화 장비 공사를 할 때 발주가 들어온다.
위에서 내려주는 발주 외에 딱히 아르바이트할 만한 건수가 없는 직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 바이어가 나타났다.
"물탱크가 필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일반 물탱크는 만들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문의를 해보심이……."
"5톤, 그리고 10톤 일체형 물탱크 70만 개가 필요한데요."
"70만 개라고요! 아이고, 그런 거라면 당연히 만들어드려야지요!"
제철소에서 호미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당연히 거절당한다.
하지만 그 호미 개수가 수억, 수십억 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모든 물탱크에는 자동화된 수질 정화 장치가 달려 있어야 합니다. 식수용 물탱크로 사용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라면 저희를 정말 잘 찾아 오신 겁니다."
전무는 조금 전 방정맞게 떠들었던 자신의 입을 탓했다.
"일반 음식점에서 주로 사용할 예정이기 때문에 출수가 쉽고 간결해야 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그 뒤로도 바이어가 불러주는 요구사항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이 정도면 5톤 탱크 기준으로 79만 원…… 그리고 10톤 기준으로 139만 원 정도 되겠습니다."
국내 원청에 납품을 할 때는 모든 것을 발가벗듯이 까발려야 한다.
마진율은 무조건 10%,
그 이상은 원청이 허용하지 않는다.
전무는 그래서 마진율을 20%로 잡았다.
'어차피 깎으려고 들 테니까.'
미리 깎일 것을 예상하고, 조금 더 높게 올려 부른 것이다.
"좋습니다. 계약하지요."
"예? 아! 아, 알겠습니다! 바로 계약서 준비하겠습니다!"
자그마치 7,630억 원에 달하는 거래.
회사가 몇십 년을 영업해야 올릴 수 있는 매출.
뒤늦게 소식을 들은 사장, 박한주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윤 전무, 이분이 고객님이셔? 고객님, 저는 한주공업 사장 박한주라고 합니다. 좋은 제안을 주셔서 정말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JM식품 영업본부장 황기순이라고 합니다."
사실 황기순은 왜 JM식품 임원인 자신이 수영농장 생수 사업을 보조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살짝 들었었다.
'그런데 움직이는 돈이 너무 크잖아?'
지금만 해도 그렇다.
7,000억 원이 넘어가는 거래를 보고 없이 자기 서명 한 번으로 턱턱 집행이 되는 상황.
JM식품 단독 사업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럴 돈도 없다.
'이런 게 바로 돈 쓰는 맛인가?'
"그럼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황기순은 돌아갔고, 박한주는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이는 체험을 했다.
지금 한창 납품을 준비하고 있는 수질 정화 장비들이 눈에 차지 않았다.
"저딴 거 납품해서 얼마나 받는다고."
매출 규모도 매출 규모지만, 마진 율이 2배다.
"그래도 해온 이미지가 있으니까, 일정만 조절하면 되겠군."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
계약금 100억 원이 먼저 들어왔다.
앞으로 납품 일정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돈을 '선불'로 주는 게 계약의 내용이었다.
선불 지급, 업계 관행과 어긋나는 조건에 임원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아니, 선불로 주면 우리야 좋지만, 이 바닥에서 발주 넣으면서 선불로 준다고요?"
"원래 3개월, 6개월짜리 어음 끊어주는 게 다반사 아닌가?"
"수자원 공사도 납품 완료하고 한 달 뒤에 돈을 주는데."
박한주 사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바이어께서 그러셨다네.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도, 먼저 결제하고 물건을 받는 게 정상이지 않느냐고."
"……완전 감동입니다. 우리 그냥이 회사에 올인하면 안 되겠습니까?"
"7,630억짜리 거래면 기존 거래처다 끊겨도 수십 년은 버틸 수 있는 건데……."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아무튼, 다들 이제 불태워 보자고."
"네, 사장님."
한주공업은 먼저 100억 원으로 대대적인 설비 증설부터 했다.
직원 숫자도 일단 늘렸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1차 납품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바이어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JM 식품이 아니었다.
"프라임 컴퍼니 부사장 정서희입니다. 이쪽은 북미 가맹점주 발머 스틴이라고 해요."
"정서희 부사장님, 영광입니다."
박한주 사장은 딸뻘인 정서희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맞이했다.
그는 발머 스틴이 나노소프트 전 CEO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발머 스틴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조 공업사인 거 같은데, 규모가 생각보다 작다.
"여기는 우리 수영조리용수 외식 업체용 물탱크를 제조하는 곳이에요."
"아, 그런가요?"
"조리용수 물탱크는 당연히 본사에서 구매를 하셔야겠죠? 가맹점이니까요."
"물론입니다. 가맹점이니 당연히 본사에서 제공하는 설비를 구매해서 사용해야지요."
그제야 발머 스틴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저희는 가맹점을 상대로 돈을 벌지는 않습니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을 상대로 장사질 하는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제공하는 식재료, 스티커, 냅킨, 수저, 포장지, 심지어 인테리어까지.
돈은 소비자, 고객을 상대로 해서 벌어야 하는데, 본사가 오히려 가맹점을 상대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든 흔히 있는 일.
"다만 도량형 통일처럼, 본사가 정한 규격에 맞춰야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 당연한 일입니다."
"물탱크는 저희가 납품받는 가격과 똑같은 수준으로 제공될 겁니다. 물론 해외 운송비가 추가되겠지만, 그것 역시 절반은 본사에서 부담하죠."
"하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레스토랑 장사는 우리 가맹점이 본사보다 더 잘나갑니다."
서울, 특히 강남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수영레스토랑 내수 시장과.
북미 전역에서 3억이 넘는 시장층을 상대하는 나노소프트 가맹점.
어느 쪽의 매출이 더 높을지는 비교해 볼 필요도 없다.
물론 가맹점의 매출이 높을수록 그만큼 본사인 수영농장도 같이 돈을 버는 구조이지만,
"어디 보자…… 그럼 저희 가맹점은 10톤짜리 기준으로 200만 개 정도 주문하겠습니다."
"2, 200만 개나 말입니까!"
박한주 사장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70만 개를 발주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200만 개가 추가되다니.
"북미 전역에서 장사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지요. 우리 매장 수가 지금 몇 개인데요. 앞으로 더 늘려 나갈 거 생각하면, 200만 개로도 모자랍니다. 매장에서 물탱크 1개만 쓸 것도 아니고, 고장 등을 대비한 예비 수량까지 고려하면……."
발머 스틴은 그 자리에서 휘리릭 계약을 체결하고 떠났다.
계약금으로 3천만 달러에 달하는 수표까지 남긴 채.
즉석에서 3천만 달러짜리 회사 수표를 발행하는 것쯤, 발머 스틴에게 있어서는 하찮은 계약이었다.
***
프리덤폰 시제품이 나왔다.
얼마 전 견적을 제출하고 시제품제조를 승인받은 코인 골드만 CTO는 박덕준 앞에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막상 제작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원가가 더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얼마입니까?"
"이대로 양산을 한다면…… 제조원가가 320만 원은 되어야 할 겁니다."
"……320만 원."
제조원가가 그 정도면, 판매 가격은 못해도 340만 원은 받아야 할것 같다.
'통신사들이 기기 지원금으로 얼마나 주려나?'
"현존하는 부품 중 가장 좋은 것만 때려 박았습니다. 당연히 상용화된 제품에 한해서입니다. 실험실용으로 했다면 더 좋은 성능을 낼 수 있겠지만, 폰 하나에 수천만 원이 넘어갈 수도 있었으니까요."
"……."
오철현 사장이 머리를 가져와서 작게 말했다.
"못해도 소비자 부담금을 150만 원 이하로 낮춰야 합니다. 안 그럼 이거 안 팔립니다."
"나도 알아."
폰 값으로 150만 원도 이미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가격이다.
심리적 마지노선,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대중성을 아예 잃어버린다.
"효도폰으로는 잘 팔릴 겁니다. 요즘 노인들, 고가폰 아니면 창피해서 친구들 앞에서 못 꺼낸다고 하더라고요."
"150만 원에 판다 치면, 한 대 팔때마다 170만 내지 190만 원의 손해가 발생하는 셈이군."
"포장, 유통비용도 있으니까요. 대충 그 정도 손해가 발생하겠네요."
"우리……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 1천만 대를 판다 치면 손해가 최대 19조 원이야."
"프리덤 구독 서비스로 번 회사 수익이 한 방에 다 날아가는 상황이군요."
별도 법인이라서 정말로 실비아 컴퍼니의 수익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거액을 프로모션 한번에 불태운다는 것에, 박덕준은 가슴이 떨렸다.
"그래도 지분 내주고 외부 투자받아오는 것보다는 낫지."
"후발 주자로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정도 손실은 감수해야죠. 겔드폰과 아이폰을 뚫고 들어가려면 말입니다."
자체 기술을 축적하고, 또 적절한 가성비를 따진 폰을 출시하려면 몇 년 걸린다.
그 몇 년이 아까워서 부품 100%를 타사 것으로 구매해서 만든 하이 엔드 폰.
조립 역시 타사에 맡길 예정이니, 프리덤인더스트리가 준비할 것은 현금뿐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현금.
"프리덤인더스트리 자본금이 20조원이었지? 시작하자마자 증자부터 해야겠군. 안 그래도 쥐꼬리만 한 우리 지분율이 더 줄어들겠어."
"그건 걱정 마십시오. 서진파운드리에서 얼마든지 빌려준다고 했습니다. 지분율은 굳이 여기서 더 건드리지 말자고 합니다."
그 말에 박덕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행이군. 쥐꼬리만 한 지분율은 지킬 수 있어서."
프리덤인더스트리의 지분은 현재 서진파운드리가 95%, 그리고 나머지 5%를 박덕준 포함 실비아 컴퍼니 창업 멤버 7인이 나눠서 쥐고 있었다.
"좋아, 그럼 프리덤폰 출시를 기뻐하자고, 100% 남의 부품으로만 만들었지만, 어쨌든 우리의 첫 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