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90화
173장 대왕님의 다이어리 (2)
책이 담고 있는 내용.
책의 재질, 제본 형식, 서체, 등등.
그 모든 것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일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바로 시간.
시간만큼은 그 모든 근거들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한 노교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말도 안 되오. 이 서명, 이 옥새 인영은 틀림없이 진품이거늘…… 이것마저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고미술품 제작자가 존재한다고?"
"이걸 만든 자는 틀림없이 고미술계 지하에서 위조품 제작자로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일부 젊은 학자들은 일찌감치 현대 제작품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것처럼 보이는 처리를 하려다가 무슨 사달이 난 거겠지요. 제작자가 마침 그때 죽었다거나."
"아니면 재미 삼아 만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세월이 흐른 처리는 안 한 것이지요. 진품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쉽게 알아볼수 있도록 말입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미 진품이 아니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었다.
탄소연대측정.
만들어진 지 수십 년밖에 안 되었다는 증거 앞에서, 더 이상의 희망 회로는 무의미했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한 노교수가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내용이 너무나 완벽하오. 한글 창시자가 아니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창제 과정의 모든 아이디어와 구상 과정이 시간 순서대로 엮여 있소."
"뛰어난 모조품 제작자가 뛰어난 언어학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고대한글의 모든 것에 정통한? 이것은 너무 희박한 가능성 아닙니까?"
"아!"
그 순간 어느 중년 학자가 소스라 치게 놀라서 박수를 쳤다.
"베낀 겁니다! 이건 바로 진품을 베껴서 만든 거라고요!"
"아! 그렇군! 위작을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히 진품이 존재한다는 증거!"
"아아! 그렇군요! 진짜 훈민정음창제일지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동안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지하 미술계에서 암암리에 조용히 유통되던 것을 모조품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창제 과정의 모든 내용이 완벽한지 설명이 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 훈민정음 창제일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
세종대왕이 창제하는 모든 과정이 기록된?
학자들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희망으로 크게 부풀었다.
"그런데 진품을 어디서 찾아내지요?"
"어쩌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하더라도 개인의 소장 금고에서 영영 빛을 못 보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학자들은 아예 진품 문화재를 보고 만든 위작품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었다.
문화재보존국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교수님들, 여기 담긴 내용이 개인이 지어낸 픽션이 아니라는 겁니까?"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창시자가 아니고서는 담을 수 없는 내용들로만 되어 있어요."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 자체를 상상해서 이런 내용을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언어천재라고 해도 부족합니다."
"틀림없이 원본이 따로 있습니다. 이건 그 원본을 보고 베껴서 만든 위작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탄소연대측정으로 수십 년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원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겠군요."
"내용뿐만 아니라 서책이 만들어진 형태와 재질…… 위조품 제작자가 원본을 직접 보면서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문화재청에 새로운 과제가 생겼군요. 훈민정음 창제일지 원본을 찾아내는 것 말입니다."
***
문화재청은 창제일지를 낱낱이 촬영한 후, 하수영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내용이 중요하지, 서책 자체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위조품이라는 것을 부정한 노 교수가 있었다.
"절대로 위조품이 아니오! 탄소연대측정인지 뭔지가 잘못된 거요! 아무리 봐도 그건 진품이었소!"
"새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보존이 너무 잘되어서 그런 걸 수도 있소! 서책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절대로 위작 따위가 아니오!"
"그렇지만 교수님, 탄소연대측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만들어진 지 백 년도 안 됐습니다.
절대로 진품이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노 교수는 안타까운 마음에 몇 번이고 가슴을 쳤지만, 결국 대세를 꺾지는 못했다.
창제일지를 돌려받으려고 하수영이 문화재청을 직접 방문했다.
그래도 가치 높은 귀중한 문화재이 니만큼, 남에게 맡겨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하수영은 노 교수가 끝내 모조품임을 부정하며 가슴을 치는 광경을 보았다.
"저분은 왜 저러시죠?"
문화재청 직원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난 하수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역시 학식이 깊은 분이라서 그런지 보는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예?"
"이거 진품 맞거든요."
"……."
직원은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하수영은 태연하게 말했다.
"문화재청이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저야 감사하죠. 이런 위대한 국보급 문화재를 제게 그냥 돌려주다니 말입니다. 솔직히 강제보상 처리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정말 진품이라고 믿으시는군요. 하지만 탄소연대측정 결과는……."
"아아, 탄소 측정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탄소 측정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요. 물리학적으로 완벽한 판독 기법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말에 직원의 눈빛도 달라 지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바로 시간여행으로 미래에 온 진품을 위작으로 착각한다는 겁니다."
"……?"
순간 직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하수영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었다.
뭐? 시간여행?
"어디 개인 수장고에 잠자고 있는 진품을 찾으실 모양인데, 백날을 찾아도 안 나옵니다. 이게 바로 진품이니까요."
"그, 그런……."
직원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어버버했다.
"가만있자, 그 개인이 갖고 있다는 해례본 추정 가치가 1조 원이라고 했었나요?"
"그것은 지극히 과장된 것입니다. 그만큼 해례본의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 창제일지 가치는 그럼 얼마나 될 거 같아요?"
"……."
"뭐, 진품이라고 치면 가치가 얼마 일까 한번 말해주세요."
"만약 진품이라면, 이 창제일지야말로 진정으로 1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직원은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진품이라면?
세종대왕의 창제 과정의 모든 친필기록.
겉표지부터 속지까지 모든 것이 세종대왕의 친필이며, 친필 서명과 옥새까지 찍혀 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세종대왕의 유산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학자분들은 진품의 보존 상태에 따라서 그 가치가 적어도 3조 원은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3조 원이라……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표시를 해야겠네요."
"진품이 아닌데 위작 표시를 안 하시면 법에 저촉됩니다."
"문화재청은 진품이 아니라고 했고, 그렇지만 나는 진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표시하는 것은 상관없죠?"
"그, 그렇습니다만."
하수영은 서책을 단단한 이동식 강화유리상자에 집어넣었다.
방수 및 내열처리가 되어 있는 유리상자.
그는 동료 학자들을 상대로 통곡을 하다시피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노교수를 마지막으로 흘끗 돌아봤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장명진 교수님?"
"누구요? 아, 당신이 그 훈민정음창제일지가 발굴된 땅 주인?"
"네, 하수영이라고 합니다. 강남에서 구의원직을 맡고 있습니다."
"젊은 정치인이셨구먼."
책에 얼굴을 파묻고 사는 학자라서 그런지, 하수영이 누군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하기야, 자기가 즐겨 먹는 식품을 만드는 회사 사장 이름까지 줄줄이 꿰고 다니는 소비자가 얼마나 될는지.
"이 서책이 진품이라고 생각하신다면서요?"
"탄소연대측정인지 뭔지가 잘못된 거요! 그 서책은 틀림없이 진품이오! 난 그렇게 믿소!"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진품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고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소. 위작은 제아무리 잘 만든다 해도 그것을 흉내낼 수 없지."
"음, 공감합니다. 가짜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진짜의 분위기라는 게 있지요. 저도 이 서책에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오, 그게 정말이오?"
"네, 저는 이 서책이 진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보라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보관할 겁니다."
"내가 다 고맙구려. 정말 다행이오. 그래도 개인 소장가가 그 가치를 알아본다니……."
"또 저는 개인 수장고에 감춰두지만은 않을 겁니다. 제 의원사무실이 있는 빌딩 1층 로비에 전시해서, 누구나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지진, 화재, 침수, 침습, 도난에 대한 방비도 철저히 해둘 겁니다."
늙은 장명진 교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기뻐했다.
"그렇게 해준다면 세종대왕님께서 지하에서 우리 젊은 의원님을 아주 대견하게 여기실 거요."
"교수님도 언제든지 오셔서 보시면 됩니다. 청담동 휴민트타워 1층 로비에 상시 전시할 계획이니까요."
"청담 휴민트타워, 알겠소. 내가 나중에 꼭 찾아가리라."
***
휴민트타워.
1층에 하수영의원사무실이 있는 8,000억 상당의 고층 빌딩.
1층 로비의 한쪽 벽 전체에 서책을 위한 전시관이 생겨났다.
두껍고 단단한 방폭강화유리로 만들어진 투명전시관이었다.
전시관 좌우로는 70인치 대형 디스플레이 패널이 각각 설치되었다.
디스플레이 패널은 서책의 모든 속지를 일일이 정밀촬영한 사진이 슬라이드쇼처럼 지속적으로 재생된다.
책을 펼치지 않아도 언제든지 책의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서책의 유래, 가치, 내용, 해석 등 자세한 내용까지 상시적으로 표시된다.
전시관 상단의 벽에는 큼지막한 글씨가 붙어 있다.
[대왕님의 다이어리]
디스플레이의 서책 소개 내용에는 '문화재청이 원본과 똑같이 만든 위작품이라고 판정했다. 하지만 나는 진품이라고 생각한다.' 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관람객들은 이게 정말 국보냐, 아니면 위작이냐를 놓고 매일같이 견해 대립이 오갔다.
"진품이라니까! 우리 하수영 의원님이 새로 산 땅에서 나왔고, 의원님도 진품이라고 굳게 믿으신다면 진품이 맞아!"
"하지만 탄소연대측정 결과로는 백년도 안 됐다고 하잖아?"
"탄소 측정이 완벽해? 정말 완벽하다고 할 수 있어?"
"그래도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새책 같아서 탄소연대측정 결과에 신빙이 가는데."
"저게 어딜 봐서 새 책처럼 보이냐? 딱 봐도 대충 600년은 된 거 같은데."
"어? 뭐야? 분명히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새 책 느낌이 났는데, 책이 바뀐 건가?"
"바뀌기는 무슨. 여긴 24시간 상시개방이라서 책이 바뀌면 관람객들이 모를 수가 없다고."
기이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문화재 감별에 참가했던 학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청담동을 찾았다.
그들은 방폭유리관 안에 놓인 서책의 겉표지를 보고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책이… 그 짧은 사이에 나이를 600년을 한꺼번에 먹기라도 한 건가?"
"아, 아무리 봐도 새 책이 아닌데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의 경악을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디스플레이에서 다음과 같은 글자가 흘렀다.
[문화재청이 원본과 똑같이 만든 위작품이라고 판정했다.]
[하지만 나는 진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거 설마…… 사실은 하수영 의원님이 원본과 위작품을 둘 다 발견했었던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