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63화
165장 수영의과대학이 필요해 (3)
"난 그럼 오늘부터 병동 한 번 돌아봐야겠네."
왕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수영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입원한 사회지도층 가족들을 보러 가시는군요?"
"응, 맞네."
수영병원에는 사회지도층 본인이나 그 가족들이 많이 입원해 있다.
다만 VIP 환자가 아닐 뿐.
여태껏 VIP 환자로서 입원한 '한국인은 왕세경뿐이다.(VIP병실을 이용한다고 VIP환자는 아니다)
"써먹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써먹어 봐야지."
"여차하면 1인실도 내주고 그러십시오."
"이사장, 그런데 환자의 부에 따라 병실을 차등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잖나? 괜찮은가?"
"더 큰 대의를 위한 일보 후퇴입니다. 기꺼이 감내해야지요."
"그런 마음가짐이 더 마음에 드는군."
왕세경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의대 설립은 더 많은 환자들을 돕는다는 대의를 위한 수단.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잠시 타협하는 것쯤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 큰 지도자로 이름을 남길 친구란 말이지.'
이런 인물이 겨우 구의원으로 동네 정치놀음이나 하고 있는 현실이 조금 안타깝다.
'그것도 이 나라 운명인 것을.'
김순이 환자. 여성, 78세.
4인실에 입원해 있던 김순이 환자는 어느 날 병실 이동 조치를 받았다.
깔끔한 1인실로 옮겨지자 김순이 환자보다 가족들이 더 크게 만족했다.
"어떻게 운 좋게 1인실에 자리가 났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순이 환자의 아들인 여당 황정호 의원은, 마침 의사와 함께 온 왕세경 부이사장한테 깊이 감사를 표했다.
왕세경은 허허 웃으며 부채질을 곁들였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내가 부이사장씩이나 돼서 우리 황정호 의원님의 모친께서 병원에 입원하신 줄도 모르고, 미처 신경을 못 썼어요. 미안합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니 당연하신 것이지요.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황정호가 여당의 4선 중진 의원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연배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왕세경 앞에서는 몇 수 접어줘야 할 입장.
실제로 왕세경이 부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힘 좀 쓴다고 하는 사회적 고위인사들은 병원에 함부로 압력을 넣을 생각도 못 했다.
90세를 몇 년 앞두지 않은, 대한민국 경제계의 살아 있는 역사가 맨위에 버티고 있으니.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을 하시구려. 여기, 부이사장 직통번호이올시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황정호는 뜻하지 않게 왕세경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에 한 번씩 병실이나 복도, 로비에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대 고민 문제를 알게 되었다.
"재단에서 의대 설립을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야외벤치에 나란히 앉은 채, 황정호 의원은 커피를 마시며 고민을 거들었다.
"이번에 항모 병원 2척을 운영하면서 우리나라에 의사가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소이다."
"음, 안 그래도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는 사회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의협의 반발이 심하다지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누구도 자기 밥그릇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근데 국회의원은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오? 의석 숫자 늘리는 건 어느 정치가든 환영할 텐데."
"……하하, 그렇지요."
황정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멋쩍어했다.
왕세경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의대라고는 했지만, 정확히는 우리 수영재단에서 평생 쓸 의료인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고 싶은 거요."
"재단의 평생 의료인?"
"그래요. 그냥 의사 자격증 줘서 알아서 살라고 사회에 던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키운 의료인은 모두 우리 병원에서 일하게 하고 싶소."
"음……."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예 자격증도 주지 않고 그냥 굴릴 거요. 뭐, 정 못 버티고 나가겠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취지라면…… 사회적인 타협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개업의 시장이나 타병원 티오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니, 그 부분만 확실하게 보장하면 의협의 반대는 적을 것 같고.'
황정호 의원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정말로 재단 병원에서 끝까지 책임질 인력 확보가 목적이신 거지요?"
"자기가 더 이상 못 해먹겠다고 중간에 나가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재단에 붙어 있는 게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최고의 대우를 끝까지 해줄 생각입니다."
"음…… 저도 한 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주시겠소?"
사양하지 않고 대뜸 물어온다.
황정호는 왕세경이 처음부터 이것을 원했음을 깨닫고 조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굳이 숨기지 않으시는군요, 부이 사장님."
"이 나이 먹고서도 복잡하게 소통해서야 되겠소?"
"알겠습니다. 사회 전체를 위한 대의이니만큼 저도 두 팔 걷고 나서서 돕겠습니다."
"황 의원, 이것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주시오."
왕세경은 웃음을 지우고, 근엄한 눈빛으로 직시하며 말했다.
"우리 재단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쓰기 위해서 만들어졌소."
"하하,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 재단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끔 밀어주는 게, 모든 국민 건보료를 2배 이상 올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요. 국가적 의료서비스 증진에서 말이오."
왕세경은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정치인 가족들을 차근차근 만나면서 밑바닥을 다졌다.
세경그룹 창업주이자, 수영재단 부이사장.
그리고 사회를 위한다는 대의.
그 세 가지 무기 앞에서 웬만한 정치인들은 반대급부를 제시할 엄두조차도 못 냈다.
"난 지금 한 국민으로서 사회를 위한 정책을 도입해 달라고 당당히 요청하는 겁니다. 그걸 알아두길 바라오."
자신감과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에서, 웬만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쉽게 넘어갔다.
"나라의 재정 지원 따위는 전혀 필요 없소.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만 해달라는 거요. 시장에 해를 끼칠 일도 없을 테니."
물론 웬만한 정치인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부이사장님, 수도권은 지금 인구포화 상태입니다. 수도권에 새로운 대학 설립, 그것도 의대라니…… 그것은 인구포화 체제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단 캠퍼스 부지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초고층 빌딩을 매입해서 빌딩 캠퍼스를 활용할 거니까."
"너도 나도 대학 설립 허가를 내달라고 사방이 시끄러워질 겁니다."
"그런 요구가 나오지 않게끔 하면 될 거 아니오?"
"그게 어떻게……."
"간단하오. 우리 의대에 금전적 페널티를 부여하시오."
"……!"
"누가 봐도 손해만 보는 사학 사업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면 될 거 아니 오?"
왕세경은 맨손에서 재벌 기업을 일궈낸 인물이니만큼, 돈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도 하게 해달라고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의 목적은 간단하오. 결국 돈이지."
"……."
"우리에게 의대는 의료활동을 위한 수단이지, 돈벌이 목적은 전혀 없소. 그걸 부각하면 간단히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금전적 페널티라고 하시면……."
"부자 스포츠 구단들은 사치세를 내면서 선수단을 운영한다지요? 대충 그런 느낌으로 추진해 보시오."
물론 스포츠 구단 역시 결국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사치세를 감수하는 것이다.
사치세를 감수하면서까지 비싼 선수들을 쓰는 것은 결국 승리를 위해 서이고, 승리는 돈과 연결되니까.
하지만 수영병원의 승리에는 명예와 '적자'만이 따를 뿐이다.
왕세경은 기재부장관 남항순 부총리도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우리 재단이 의대를 운영함으로써 일으킬 경제효과를 한 번 생각해 보시게."
"회장님, 저 역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재단의 의대 허가가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회장이 아니라 부이사장이라고 불러주게."
"네, 부이사장님."
"혹시 청담스코프 양산사업 때문에 아직도 가슴에 안 좋은 마음을 담아두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청담스코프 국가투자는 확정된 상태.
정부는 지금까지 420억 달러를 뜯긴 상황이었다.
"너무 안 좋게만 보지 마시게. 청담스코프가 양산되면 우리나라는 의료기술최강국으로 당당히 인정받을 수 있네."
"알고 있습니다."
왕세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청담스코프 투자를 막기 위해 기재부가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고, 언론플레이를 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양산화는 우리가 밀어붙인게 아니었네. 정부의 방침이었고, 우리 역시 거기에 휘말렸을 뿐이지."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나. 오늘은 의대 이야기만 해보도록 하지."
"국가의 재정적 지원은 어렵습니다. 청담스코프만 해도 이미 대단한 특혜입니다."
"내 그 이야기 나올 줄 알았네. 하지만 국가에 재정적 지원을 바라는 건 없네. 오히려 그 반대일세."
남항순 부총리의 눈빛이 빛났다.
"그 반대라고 하시면?"
"간단하게 말하지. 의대를 갖게 해주면 나라에 돈을 내겠네."
남항순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번쩍 튀는 듯했다.
돈을 내겠다는 저 거침없는 말투.
결코 수십억, 수백억 따위의 소액'을 말하는 것이 아니리라.
"어떤 방식으로 나라에 돈을 내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정당한 법률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거야 돈 받을 쪽이 알아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아무튼 의대를 갖게 해주면 우리는 돈을 내겠네. 방법이나 명분, 절차는 알아서 만들어주시게."
"얼마의 금액을 부담하시겠다는 건지……."
"글쎄, 얼마면 되겠나?"
"……!"
"얼마나 필요한가?"
거침없는 웃음에서, 남항순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세경그룹 창업주이긴 하지만, 국가를 상대로 이렇게 백지수표를 내밀어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서 말이야. 나도 떨리는군."
백지수표.
그 찬란한 네 글자가 남항순의 머릿속에서 뜨거운 불꽃을 일으켰다.
"남 부총리. 날 한 번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해 보게."
"네, 부이사장님."
"클라이언트가 돈을 주겠다고 하네. 얼마든 필요한 만큼, 그러니 자네는 돈을 받을 절차와 명분, 그리고 금액만 확정하면 되는 거야."
왕세경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지그시 그를 훑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
"……."
"자네 돈 만지는 사람이잖나."
기재부는 서울 내 의대 설립에는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애초에 관할이 아니니까.
하지만 돈이 얽힌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나선다.
그리고 찾아보면 기재부가 활약을 펼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으리라.
***
남항순 부총리는 병원을 나섰다.
병원 외관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애증이 교차돼 있었다.
청담스코프 투자사업 때문에 국고를 바닥내고 있는 병원.
물론 청담스코프가 결실을 맺는다면, 투자한 것 이상의 어마어마한 이익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은 안다.
다만 그때까지의 출혈을 감당하기 버거울 뿐.
그때였다.
-현욱이 아버지! 아이고, 우리 현욱이가 큰일났어요!
아내로부터 온 전화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욱이가 왜?"
남현욱은 그의 귀여운 막내아들.
벌써 장가까지 간 어른이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귀염둥이 아들일 뿐이었다.
-지금 골프장에서 머리에 골프공맞고 쓰러졌어요! 피가 철철 나고 정신도 없는데, 아이고!
-어머니,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버님, 저 현욱이 친구 기태입니다.
"어, 기태야. 그래, 네가 설명 좀 해봐라. 우리 현욱이 어떻게 된 거냐?"
-머리에 골프공 맞고 크게 다쳤고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5분도 안 돼서 바로 응급수술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응급수술?"
-네! 119에 신고하니 수영병원 닥터헬기가 몇 분 만에 바로 날아왔습니다! 응급상황이라고 헬기 안에서 지금 수술 중입니다!
"괜찮은 거냐?"
-네, 헬기 내부 수술실이 웬만한 대학병원 수술실 수준이라 현장에서 바로 수술하는 게 낫다고, 교수가 직접 헬기 타고 왔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나도 지금 바로 거기로 갈 테니까, 너도 옆에서 지켜봐다오."
-네, 아버님.
남항순은 급히 골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 다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가는 도중에 수술을 마치고, 헬기가 청담수영병원으로 복귀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친한 의대 교수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교수가 자세히 알아보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닥터헬기 아니었으면 아마 현욱이 죽었거나, 살았어도 장애인 신세됐을 거다.
"그 정도야?"
-사고 나고 5분 안에 응급수술 들어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이건 정말이지 병원 정문 앞에서 다쳐야 가능한 수준이야.
"……그래, 고맙다."
다행히 막내아들은 좋은 회복세를 보였다.
이대로면 정상 생활로 복귀하는 데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는 소견도 들었다.
두두두두!
병원 야외 벤치에서 한숨을 돌리던 남항순은 또 병원 옥상에 내려앉는 닥터헬기를 가라앉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수영재단 의대라…….'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