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23화
155장 누가 내 앞에 치즈를 놓았을까? (4)
엘릭서의 기운이 남은 골든 트러플토양을 연구하면서, 안살린은 여러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차세대 비료였다.
기존의 비료보다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높은 생산량 증대를 기대할 수 있는.
오리지널 엘릭서 비료에는 당연히 비할 바가 못 된다.
엘릭서의 기운은 전혀 깃들지 않았으니, 하지만 기존의 비료 제품에 비해서는 사기 소리가 나올 만한 제품이다.
비료 이름은 '구루마'로 지었다.
"아직도 수영리 토양의 비밀을 다 풀지 못했습니다. 아마 내 평생을 바쳐도 부족할지 싶은데, 그래서 난 오히려 기쁩니다."
"무한한 권태로움이 끝나서군요."
"맞아요. 지금까지 인생의 모든 게 너무 쉽고, 그래서 권태로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아요."
안살린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나의 열정을 불태울 만한 대상을 찾아서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 있다는 걸 또렷이 느끼고 있지요."
"그럼 다저스 성적에도 조금 신경을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단장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요즘 다저스 성적이 좋지 않은 터라, 안살린은 살짝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실은 저도 다저스 광팬입니다."
안살린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 그래요? 언제부터?"
"교수님을 처음 뵌 순간부터 팬이 되었죠."
"아부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은 수영 사장이 처음이에요."
"최근에 양키스 인수를 생각했습니다."
"오, 나와 붙으면 재미있겠군요."
"바로 그런 생각에서 인수를 고려 했죠. 근데 쉽지가 않더군요."
"메이저리그 구단 인수는 돈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구단주총회의 승인을 받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교수님의 다저스와 제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서로 맞붙으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요."
"다른 팀 팬들은 고래들의 잔치라며 비난할 수도 있어요. 흥행은 떨어지겠네요."
"흥행이 문제라면 제가 선수로 뛰어도 되지요. 시청률 괜찮게 나올거라 장담합니다."
"오, 수영 사장. 야구도 할 줄 압니까?"
"언제 한 번 배트 잡을까요?"
안살린은 점잖게 웃고 난 뒤 진지하게 말했다.
"양키스 인수 결심 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반드시 구단주 총회통과 되도록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아참,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샀지 않았어요? 그럼 더 쉽겠군요. 뉴욕의 심벌을 소유한 이가 구단을 인수하겠다고 하면 팬들도 쉽게 수긍할 겁니다."
스포츠 이야기 외에 수영리 연구소근황도 주제에 올렸다.
"보니까 연구시설동이 저번보다 몇 배 이상으로 늘어난 거 같습니다."
"이번에 해외에서 원생들을 좀 잡아오느라고 시설을 보강했어요."
"대학원생들이요?"
"그래요. 내가 지도하거나 후원하던 친구들을 좀 데려왔죠."
"전부 지질학자들인가요?"
"다양합니다. 지질학, 화학, 물리 학, 생물학, 의학, 여러 가지 분야에서 잡아 왔죠."
최측근인 지하크가 옆에서 설명했다.
"왕자님은 하버드, MIT, 스탠포드, 보스턴, 칼텍의 종신교수이자 후원자이기도 하십니다."
"오히려 왕자님이 그 대학의 종신을 보장해 주는 거 아닌가요?"
"준다고 하니 그냥 받아둔 겁니다. 교수 직함이 있으면 학회에서 활동하기가 편해서요."
"그렇죠. 확실히 편하죠. 저도 그래서 한국대에서 교수 따려고 하는 겁니다."
"역시 수영 사장과는 통하는군요. 다른 사람들은 자꾸 돈 많으니 상관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만 합니다."
"학회에서 지갑이 힘을 발휘하는 분야와 직함이 힘을 발휘하는 영역은 엄밀히 다른데요."
"맞아요, 맞아.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안살린은 모처럼 말이 통해서 신이 났는지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그럼 대학원생들을 몇 명이나 잡아 오셨습니까?"
"일단 1만 명 정도 추가로 데려왔습니다."
그전에 있던 연구, 보조, 행정, 경비 인력 등을 제외하고, 추가로 대학원생 1만 명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다.
"그럼 상주 인원이 얼마나 되는 거죠?"
"지하크, 몇 명이나 되지?"
"현재 '안살린 연구소'에 정식 등 재된 인원은 2만 8천 명 정도입니다."
여기는 군도 아니고 면도 아니고, '리'다.
원래 주민들 머릿수는 겨우 두 자릿수였다.
그런데 안살린이 데리고 온 인원만 2만 8,000명이다.
"그들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인들이 외부에서 들어와서 눌러앉았습니다. 귀농인들도 있고요. 그래서 도시 인구가 꽤 늘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는 행정상 도시가 아니라 '리' 단위 행정지역이다.
소위 말하는 '이장님'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아하, 그래서 왕자님이 상수도 시설과 가스관도 설치를 해주셨군요."
"나 때문에 타지살이 하는 사람들이니 생활에 불편함은 없도록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무선 인터넷도 잘 터지던데요. 와이파이존 빵빵하게 설치한 거 같더군요."
"지하크 사장이 고생 좀 했습니다."
지하크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전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전진기지 연구소를 세운 경험 덕분이지요. 우리 국제자원투자회사 공병대는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합니다."
"공병대?"
"건설과 전투를 동시에 수행 가능한 친구들입니다. 오지나 분쟁지역에 연구도시 세우다 보면 피가 튀기는 경우도 많지요."
"굴삭기 조종도, RPG 사용도 능숙한 친구들이겠군요."
"그렇습니다. 한국은 평화지역이라서 무기를 가져올 필요가 없었지요. 덕분에 공사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정도면 수영리는 작은 도시 수준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안살린 연구소가 지자체에 납부하는 세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소 상주 인원들로부터 발생하는 경제효과가 있다.
그들도 밥을 먹고, 생필품을 구매하고, 여가활동을 즐길 테니.
외지 상인들은 바로 그런 시장을 노리고 이곳에 눌러앉은 것이다.
지하크가 잠시 연락을 확인하고 말했다.
"왕자님, 커맨더가 찾아왔습니다."
"커맨더?"
"전진기지 연구소가 새로 자리를 잡을 때마다 그 구역의 통치권자를 커맨더라고 부르는 게 우리 관행입니다."
별의별 신분, 직위를 가진 사람들을 다 상대해야 했을 테니, 호칭이 하나로 굳어진 것이리라.
"하수영 회장님 방문 소식을 듣고 왔다는데요? 인사를 하고 싶답니다."
"저를요?"
"괜찮겠어요, 수영 사장?"
"네, 저야 괜찮습니다. 불러 주세요."
잠시 후, 낡은 고무장화에 흙투성이 옷을 입은 70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연신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우리 하 회장님 오셨다는 이야기 듣고 내 부리나케 달려왔네 그려."
하수영은 노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장님? 언제부터 우리 수영리 커맨더가 되신 거예요?"
"커맨던지 카메라인지 이분들이 날 그렇게 부르시니 나도 그러려니 하고 있네. 오랜만에 고향 왔는데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어서. 하원석사장은 잘 지내는가?"
"네, 세상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지셔서 엽서 한 장도 없으시네요."
하수영은 수영리 이장과 얼굴만 아는 사이다.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
오히려 첫 농장을 차렸던 서락산박충원 (전) 이장을 더 잘 알지 않을까?
"자네 왔다는 이야기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목을 빼놓고 기다리고 있어. 도시 출신 새주민 청년들도 그렇고, 한 번 와서 얼굴이나 비추고 가시는 게 어떻겠는가?"
"음, 안 그래도 아까 면장님을 잠깐 만났습니다. 근처에서 기다리실 텐데."
"철재 놈은 내가 먼저 가 있으라고 일러뒀어."
면장이 이장보다 높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직급은 높은 게 맞지만,면장이기 전에 친구 아들이다. 당연히 이놈 저놈 해도 된다.
"가보세요. 오랜만에 고향 사람들과 회포도 푸시고."
아버지 본가가 수영리에 있을 뿐, 고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하수영은 피식거리며 일어났다.
"그럼 교수님, 다음에 또 뵙죠."
"그래요. 혹시 재배 특허로 중국과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요."
"제 힘으로는 상대 못 할 거라고 생각되시나요?"
"아니, 그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놓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안살린은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수영은 솔직히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채셨습니까?"
"내가 개발한 비료가 좋긴 하지만 수영 사장한텐 필요 없을 텐데, 굳이 중국에 갖고 들어간다고 해서 한번 추정을 해본 겁니다."
"역시 교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요."
"우주정거장에서 보는 화산폭발이 재미있는 구경거리죠. 개인적으로 흥미롭네요. 과연 나도 못 푼 비밀을 중국이 풀 수 있을까요?"
안살린은 토양에 남은 엘릭서 비료의 흔적을 이용해서 차세대 비료를 개발했다.
그마저도 하수영이 일부러 토양질을 바꾸기 위해 팍팍 뿌렸기에 가능했던 것.
중국이 엘릭서 비료를 분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내 비료 특허등록은 애초에 다 끝난 거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권리침해 한 번 해주면 나야 좋지."
지하크가 조용히 거들었다.
"안 그래도 원유 가격 조정 문제로 중국을 한 번 눌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수영도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교수님 비료는 정식으로 신고등록하고 가져갈 계획이었습니다. 설마 나중에 문제가 될 빌미를 만들겠어요?"
"아무튼 지켜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수영은 돌아서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아부다비의 혈통은 시대와 차원을 뛰어넘는 플렉스가 있단 말이지. 오늘따라 내 옛 친구가 너무 그립네."
한낱 졸부였던 자신을 '경제 그 자체'로 성장시켜 준, 아주 오랜 옛 친구.
'안슐…….'
그도 아부다비의 왕자였었다.
무한한 전생의 반복 속에서도 친구의 혈통이 가진 위엄은 퇴색되지 않는 듯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
수영리 신축 마을회관.
수영리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30대 귀농청년 윤정원은 급히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장이 돌린 공지사항을 받고, 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차를 몰고 달렸다.
[이장 공지입니다.]
[오늘 하수영 농민회장께서 수영리를 찾으셨습니다. 지금 마을회관으로 이동 중이십니다.]
[즉석 간담회가 열릴 예정이니 수영리 주민들은 열외 없이 반드시 참석하라는 내용입니다.]
참석을 못 하게 온갖 방해를 놓는다 해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올 건데, 열외는 허용하지 않는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물론 귀농 생활은 생각보다 편해서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여기 토착 주민들은 생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귀농민은 10년 넘게 살아도 외지인 취급을 받는다는데, 적어도 겉으로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마을 행사가 있으면 항상 참여 의사를 물었고, 강요를 하지도 않았다.
불참을 해도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정하면서도, 귀농인 개개인의 자유의사를 매우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마을 행사 등 공공정보가 프리덤을 통해서 실시간 공유되는 것도 한몫했다.
오히려 토착주민 노인들이 더 프리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프리덤, 근데 이 방향은 마을회관이 아닌데?"
-신축 건물로 이관했습니다. 구 회관은 마을의 전통보호시설로 지정해서 영구적으로 보존할 계획입니다.
"신축회관을 지었어? 이야, 역시 우리 마을 돈 많다니까."
-안살린 연구소 시티에서 무상으로 지어준 겁니다. 항상 안살린 교수님을 향해 감사하십시오.
"알아, 그분 덕분에 우리 수영리가 엄청 커졌고 나도 정착할 수 있었잖아. 지금도 아침마다 그분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고."
저기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신축 마을회관인 거 같다.
"왜 이렇게 불빛이 안 가까워져? 거리가 꽤 남았나 보네?"
마침내 마을회관 앞에 도착한 윤정원은 차에서 내릴 생각도 못 한 채 굳어버렸다.
"이, 이게 신축 마을회관이라고?"
[수영리 마을회관.]
큼지막한 간판을 보면 마을회관이 맞는 거 같은데, 건물 외관은 자신이 상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건 그냥 호텔이잖아?"
-그냥 호텔이 아닙니다. 안살린 교수님 고향에 있는 7성급 호텔 본동을 현지 사정에 맞게 축소화한 건축디자인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윤정원은 저도 모르게 생각났다.
예전에 청담동을 갔을 때 봤던 수영마트.
마트 간판을 보기 전까지는 마트가 아니라 청담동 명품 브랜드 갤러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딱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