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19화
154장 농사와 선박 사이 (3)
늦지 않게 성북동 본가를 찾은 백진택은 과연 큰형 백동원을 볼 수 있었다.
"너도 왔냐?"
분명히 본인이 이 자리를 만들었을 텐데, 모르는 척 능청을 떤다.
백진택은 비웃음을 속으로만 삼켰다.
"큰형도 아버지가 불렀소?"
"그래, 갑자기 오라고 하셔서 조금 의아했다.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냐?"
"큰형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근데 작은형은 안 부른 모양이오?"
"그러게 말이다."
"하긴, 작은형 불러서 야단칠 게 뭐 있나. 현진이 덕분에 백화점 요즘 아주 잘나가는데."
"조선소도 요즘 잘나간다는 이야기 언뜻 들었는데."
"잘나가긴 무슨. 지금 도크 몇 개가 놀고 있는데, 절반 이상의 직원들이 놀고 있수다."
서로 속마음을 감춘 채 탐색하고 있는데, 백영호가 서재에서 나왔다.
상석에 앉은 백영호는 조금 못마땅한 눈으로 장남과 삼남을 번갈아 응시했다.
"길게 말하지 않으마. 셋째야."
"네, 아버지."
"큰형한테 칼을 들이밀 셈이냐?"
"무슨 말씀이세요?"
"시치미 떼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 수영그룹에서 자동차 운반선 수주했느냐?"
"전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당돌한 셋째의 반문.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백영호는 지그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하수영이 그 친구가 그냥 견학이나 하려고 울산 조선소를 찾은 게냐?"
"아, 못 들으셨군요. 부산에 영화촬영하러 온 김에 생각나서 한 번 들른 거랍니다."
"영화 촬영?"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백영호가 의아해하자, 백진택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해운대 동해에서 미 함대 협찬까지 받아서 뭐 촬영했다네요. 이미 우리나라 영화판에는 소문 쫙 퍼졌습니다."
"첫째야, 이게 사실이냐?"
백영호가 돌아보며 묻자 백동원은 조금 당황했지만 표정을 관리했다.
"저도 그렇게 들은 거 같습니다. 아버지."
"그러니까 영화 때문에 부산을 찾았다가 온 김에 조선소 구경도 한번 했다?"
"네, 아버지."
"정말 선박 발주 의도는 없었던 거고?"
백진택은 형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반격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온 김에 선박 발주 이야기를 하긴 했습니다만, 그냥 충동구매 같은 느낌이었어요. 우리도 백화점 가서 아이쇼핑하다가 원래 살 생각 없었는 데, 나도 모르게 사들고 나오곤 하잖아요?"
"선박이라는 게 그렇게 충동구매가 이뤄지는 물품이더냐?"
"제 느낌은 그랬습니다. 아무튼 자동차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어요."
"선박을 발주하긴 했다는 뜻이구나."
"네, 아버지."
"어떤 선박을?"
"저희가 뭐 대형화물선 말고 내세울 만한 게 있겠어요? 자동차 운반선은 아닙니다. 자세한 건 아무래도……."
백진택이 은근히 형을 의식하는 티를 내자, 백영호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첫째야. 아니라는구나."
"아버지."
"셋째가 내 앞에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놈은 아니다."
백동원은 분한 눈으로 동생을 주시했다.
백진택은 일부러 모른 척 부친한테 시선을 집중했다.
"아버지, 그거 물어보시려고 오늘 급히 오라고 하신 겁니까? 전 또 뭐 제가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가슴 쓸어내렸네요."
"금액은 얼마나 되느냐? 그것도 형앞이라 말하기 부담스러우냐?"
"약 16조 원 정도 됩니다."
그 말에 백동원은 물론이고 백영호도 놀란 표정을 보였다.
선박 발주 거래가 16조 원이라면, 여간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적어도 조선소 2, 3년 치 매출이 단 한 건으로 발생한 것이니, 놀랄 수밖에.
"대체 무슨 배를, 몇 척이나 주문했는데?"
"일단은 회사 기밀이라서. 형, 나중에 기사 보면 알게 될 거요."
"야, 아버지 앞에서 그게 무슨……."
"그만."
백영호가 말을 잘랐고, 백동원은 주춤거렸다.
"친형제이긴 해도 어쨌든 서로 다른 기업을 운영하는 사이다. 공과 사는 구분해라."
"……."
"동원이 넌 이만 가보고."
"아, 아버지."
"어서."
백영호가 냉담하게 말하자 백동원은 분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형이 사라지자마자 백진택은 부친에게 냉큼 말했다.
"22,000TEU짜리 초대형 컨테이너 선 100척 수주입니다, 아버지."
"컨테이너선? 100척이나?"
"네, 아무래도 해운업 진출을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좋죠. 그런 초대형 해운사가 국내에 생기면 꾸준히 발주가 있을 거 아닙니까."
식량 운반 이야기를 언급한 것은 일부러 뺐다.
부친이라 해도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줄 필요는 없었다.
백영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전에 한 번 만났던 하수영의 모습을 기억했다.
특이하게 강한 인상을 남긴 그가, 해운업 진출을 준비하다니.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셋째야."
"네, 아버지."
"내가 서로 겹치지 않는 업종으로 너희들에게 완전히 사업을 나눠준 이유를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이죠. 남들처럼 재산 가지고 원수 사이 되지 말고, 형제의 우애를 지키라는 뜻 아닙니까."
"가끔 다툴 수는 있다. 하지만 가족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부친과 이야기를 좀 더 나눈 후, 저녁까지 먹은 뒤 백진택은 본가를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백진택은 큰형의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이 좀 더 찡그려지는 걸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3조 원.'
백진택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동산도, 주식도 아닌 순수 현금 3조 원.
그것이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온다면?
'백두자동차 경영권을 노릴 수 있어.'
당연히 시가총액 60조 원에 달하는 백두자동차를 송두리째는 못 산다.
하지만 부친 사후, 큰형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기에는 충분하다.
우호세력들에게 자신의 힘을 각인 시키고, 형에서 자신으로 갈아타게 만드는 것이다.
'자동차와 중공업을 다시 합치면…….'
자동차와 중공업.
부친 사후에 그 둘을 다시 하나로 합치고, 자신이 회장에 앉는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18개월 안에 100척을 건조해야만 했다.
'불가능은 없다.'
***
경기도 수영농장.
화물차들이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국내 배합사료 업체에서 보낸 화물차들이었다.
오늘은 바로 정기적으로 있는, 곡물 반출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수와 대동한 신참 직원이 궁금증에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벼를 일주일에 한번씩 반출하는 거예요? 설마 벼가 일주일 만에 자라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럴 리가 있겠냐? 당연히 일주일간격으로 단위경작을 했으니까 주 1회로 반출을 하는 거지."
"아, 그렇군요."
"여러 작물을 동시에 키우는 농장이라서 아마 경작 단위마다 순번을 돌릴 거라고."
"그런데 농장이 그렇게 큰 거 같진 않은데, 이렇게 많은 작물이 나오는 게 신기해요."
"기적의 비료를 쓴다는 말이 있긴한데, 나도 잘은 모르겠다."
도정하지 않은 벼알을 담은 1톤포대가 땅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쌓여 있었다.
국내 모든 가축들이 먹어치울 양을 공급하다 보니, 수영농장이 쏟아내는 쌀의 양은 엄청났다.
쌀만 있는 게 아니라, 대두를 담은 포대도 굉장히 많았다.
배합사료의 99%를 담당하는 원료다.
신참은 내부가 보이지 않는 콘크리 트 무인 농장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마법의 맷돌 같은 거라도 있나? 어떻게 저 정도 면적에서 이렇게 많은 작물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수영농장의 벼는 엘릭서로 키운다.
파종을 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성장을 마치고 알곡을 맺는다.
성장 속도가 빠른 것은 물론이요, 다른 벼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알곡을 맺기에, 말도 안 되는 수확량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비밀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의심의 눈초리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농장 규모에 비해서 말도 안 되는 생산량을 보이고 있으니.
농식품부와 식약처에서 불시 점검을 나온 적도 있었다.
인체에 해롭지는 않은지, 농장 내부를 실사한 것이다.
하지만 흙과 물을 채취하고, 샘플을 뽑아가서 면밀히 검사해도, 인체에 유해한 성분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정상적으로 성장한 작물일 뿐이다.
그들은 벼알을 뿌리자마자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성장하고 알곡을 맺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진짜 씨 뿌리자마자 바로 열매 맺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는 말도 안 되는 생산력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바보도 아니고 저 손바닥만 한 땅에서 그만한 작물이 나온다는 게 말이 되냐고."
"황비버섯, 송이버섯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그 엄청난 쌀은 대체 뭐냐고."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불시 검사에서도 작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때문에 더는 강경하게 밀어붙일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히 거 뒤지지 않은 상태지만, 이제는 누구도 수영농장을 건드리지 않는 상태다.
확실한 물증 없이 선을 넘는 조사를 하기에, 수영농장이 지닌 힘은 너무 커져 버린 것도 있었다.
"이제 수영농장 없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영양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
"더 이상 수영농장을 건드리지 마라. 그러다가 농사에 타격이라도 입으면 당장 치킨 가격이 폭증한다고."
"아, 쫌! 수영농장은 이제 그만 놔두라니까! 막말로 거기서 중금속이 나오길 했어, 방사능이 나오길 했어, 아니면 살충제가 나오길 했어?"
"완전 건강에 무해한 깨끗한 농작물인 걸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더 파고들어서 뭐하게?"
불시 점검에서 아무 문제 없는 작물들이 생생하게 자라는 걸 몇 번이나 확인했고,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로봇들이 일일이 벌레를 잡는 것도 확인했다.
또 그 어떤 성분 검사에서도 인체 유해물질은 기준치보다 아득히 아래를 기록했다.
과다한 생산량이 의심스러워도, 문제 삼을 게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수영농장의 농업 생태는 정부에서 건드리지 않는 역린이자, 언터쳐블이 된 지 오래였다.
***
끝도 없는 화물차 행렬이 이어진다.
모두 곡물을 전국의 배합사료 제조공장으로 실어 나르는 차들이다.
멀찍이서 물끄러미 구경하는 하수영에게, 프리덤이 말을 걸었다.
-마스터, 지금은 괜찮지만 목장 소 100만 두를 갖추기도 전에 배합사료 업체가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벼알이 남아돌게 됩니다.
수영목장에서는 소들에게 볏짚만 먹이고, 볍씨는 먹이지 않는다.
고기 질을 좋게 하는 엘릭서 효능은 알곡이 아닌, 볏짚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볍씨까지 먹이면 그만큼 볏짚의 섭취량이 줄어들게 되고, 고기 질의 향상을 완전히 꾀할 수 없으므로.
-목장 소 40만 두를 갖추기도 전에 그 균형은 깨질 겁니다.
"그 전까지 컨테이너선이 뚝딱 만들어질 리는 없겠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역시 농사는 너무 잘돼도 문제야. 지구 반대편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데, 볍씨를 전부 바다에 버릴 수도 없고."
소여물 만드느라 처치 곤란한 벼알곡을 다 어떻게 처리한다?
"쌀빵이나 잔뜩 만들어서 기아국가 하늘에서 융단폭격하는 건 어때? 옛날에도 자주 해봤는데 생각보다 좋더라고."
처치 곤란한 쌀 걱정을 하는 중에, 농식품부 차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하수영입니다."
- 회장님, 윤홍식 차관입니다. 다른게 아니라 동남아에서 효원식품 통해 황비라면 밀수해 가던 중국 업자 이야기입니다만…….
"왜요?
-회장님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그게, 일반 밀수업자라면 당연히 커트하겠지만 알고 보니 중국에서 알아주는…….
"쌀 천만 톤만 사주면 시간 내주겠다고 전해주실래요?"
-네? 쌀 천만 톤이요?
"네, 천만 톤당 1시간씩 시간 내준다고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