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17화
154장 농사와 선박 사이 (1)
소소한 이벤트가 있었다.
하수영과 장효주가 첫 키스를 한 것이다.
둘이 서로 눈이 맞아서 한 키스는 아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카메라에 생생하게 찍히는, 두고두고 기록으로 남을 키스였다.
바로 키스씬 촬영이었다.
얼굴 가리고 하는 척만 하는 키스가 아니라, 서로 입술을 정확히 포개는 진짜 키스였다.
그날 촬영이 끝나고, 장효주가 하수영한테 조용히 다가와서 말했다.
"어떻게 우리 첫 키스가 그렇게 우악스러울 수가 있지요?"
실제로도 둘이 처음 나눈 키스였다.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본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NG 좀 여러 번 내지, 어떻게 한번에 그렇게 노컷으로 갈 수 있죠?"
"제가 몰입을 아주 잘했나 봅니다. 그래서 NG가 안 났네요."
"첫날에는 그렇게 NG를 내셨으면서."
"그때도 몰입을 너무 과도하게 하는 바람에 NG가 났던 거죠."
키스씬이라고 하지만, 애정이 달콤하게 엮인 키스는 아니었다.
둘은 배역상 서로 적이었으니까.
마약상이 미모의 첩보요원을 상대로 우악스럽고 강제로 입술을 빼앗는 씬이었다.
"다시 해줘요. 이번에는 부드럽게."
"오늘 촬영은 끝났어요."
"나 이대로는 억울해서 안 돼요. 우리 첫 키스가 그렇게 덮치듯이 강제로라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지도 몰라요."
"덮치듯이가 아니라 진짜로 덮친건 맞죠. 대본이 그랬으니까요."
"아니, 그래서 부드럽게 리셋 안해줄 거예요? 진짜 '당분간' 이 기억으로 안고 살라고요?"
당분간이란 단어에 강한 억양이 실렸다.
"연기라면 몰라도, 진짜 키스는 위험해서 안 됩니다."
"뭐가 위험해요?"
"키스 잘못하다가 정신 차리고 나면 애 생겨요. 그것도 혈기왕성한 아들 세쌍둥이로."
"……."
"대본상 포악한 키스였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장효주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두고 봐요. 다음에는 달달한 로맨스 대본으로 들고 올 거니까."
"그런 배역은 제가 안 끌릴 거 같은데요."
"수영 씨가 끌릴 만한 배역, 꼭 찾아낼 거니까 두고 봐요. 그때까지 다른 여배우랑 키스씬 찍으면, 절대 안 돼요."
"글쎄요. 제가 영화를 또 찍을 일이 있으려나. 이미 벌써 포만감이 충분해서 말입니다. 벌써 연기자로 90세 은퇴까지 한 기분이에요."
마약상은 애초에 등장씬도 많지 않아서, 하수영이 촬영장을 나올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사실 마약상 배역, 제 배역하고 키스씬이 있어서 제가 가져온 거예요."
"설마 강제로 당하는 걸……."
"그나마 이거밖에 없었으니까 그랬죠!"
하수영은 장효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효주 씨는 진짜 화낼 때……."
"죽은 전 여자 친구 닮았다고요?"
"아니, 제 머릿속에 도청기 넣었어요?"
"아까 그 입으로 밀어넣었죠."
하수영은 피식피식 웃고, 장효주가 팔짱을 낀 채 쿡쿡 웃었다.
"혼자가 편하다고 그랬었죠?"
"네. 진심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 말고 다른 여자한테 가기만 해봐요. 평생 저주할 거예요. 그러니까 기왕 잡힐 거면 나한테 잡혀요."
"생각해 볼게요. 자, 어서 가보세요. 다들 효주 씨 기다릴 텐데."
오늘 하수영의 촬영 일정은 모두 끝났지만, 촬영 자체가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하수영이 나오지 않는 다른 씬을 촬영해야 한다.
장효주는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멀어졌다.
날씬한 뒤태를 조용히 감상하던 하수영은 입술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진짜 감촉도 완전 똑같구나."
***
촬영장에 남아서 마저 지켜보는데, 정서희가 촬영장을 찾아왔다.
그녀가 하수영의 옆에 앉자, 대기 중인 스태프와 출연자들이 놀란 눈으로 수군거렸다.
장효주 못지않은 미모를 지닌 여자가 느닷없이 하수영 옆에 앉아 있으니, 다들 상상력이 한껏 증폭된 것이다.
"울산 백두중공업 조선소 다녀오셨다면서요? 화물선 발주하시게요?"
""네."
"어떤 화물선인데요? 자동차 운반선인가요? 아니면 유조선?"
정서희는 분명 그 둘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했다.
"식량 운반용 컨테이너선을 발주하려고요. 일단 30척 정도 주문한다고 구두로 말해놨습니다."
"식량 운반선이요?"
"어째 실망한 목소리입니다?"
"그런 건 그냥 중고 컨테이너선 사서 써도 되지 않아요? 자동차 운반선이나 유조선이 급한 거 같은데요."
"그거야 제 사업은 아니니까요."
정유와 자동차 사업은 하수영이 직접 손대지 않는다.
그저 회사를 소유만 할 뿐, 경영은 타인에게 맡겨둔 상태다.
"근데 식량 운반선이 그렇게나 많이 필요한가요?"
"테라리움 2.0이 가동되고 수영목장이 목표 머릿수를 채우면, 처치 곤란한 곡물이 늘어납니다."
현재도 남아도는 벼를 가축 배합사료 원료로 제공하고 있다.
수영목장 한우 100만 두를 갖추고 볏짚을 먹이기 시작하면, 엄청난 양의 볍씨가 쏟아져 나온다.
정말 어디 땅에 파묻어야 하나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남아돌 것이다.
"그래서 해외에 돌려야죠. 겸사겸사 전 세계 대기근 같은 상황을 대비하자는 의도도 있고요. 요즘 날씨가 영 이상해서."
"곡물은 수출을 할 만한 데가 마땅치 않을 텐데요. 전 세계적으로 남아돌잖아요."
"뭐, 정 안 되면 가난한 제3세계 나라에 구황물자로 갖다 줘도 되고요."
"쌀 수출로 돈 벌 생각은 아니었군요."
"그냥 바다에 버리는 것보단 굶은 사람들한테 나눠 주는 게 훨씬 낫잖아요."
"모든 자본가가 수영 씨 같았으면 수정자본주의 같은 건 등장할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정서희는 배시시 웃고는, 한창 열연 중인 장효주에게로 눈을 돌렸다.
"톱 여배우와 키스씬 찍으니 어땠어요?"
"그걸 보셨군요."
"모르고 있다가 영화관에서 갑자기보는 것보단 낫잖아요. 격렬하게 잘하시던데."
"배역에 충실했을 뿐이죠."
"그래서 대답 안 했잖아요. 어땠어요?"
"부드럽더군요."
"……그게 끝?"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
정서희는 잔잔한 눈으로 하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끔 수영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가 있어요."
"가끔이 아니라 거의 항상일 텐데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딱 지금 같은 순간이 그래요.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뭘 원하는 걸까, 누굴 원하는 걸까…… 그런 궁금증?"
"손수 기른 작물로 만든 음식을 내 명의의 빌딩 가게에서 가능한 많은 손님들에게 파는 거죠."
"혼자서요? 언제까지?"
"사별한 전 여친이 제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요."
"와, 치사해. 곧바로 그렇게 이지스방어벽 켜기 있다고요?"
하수영은 조용히 키득거렸고, 정서 희의 눈가도 살짝 가늘어졌다.
"백두중공업 가셨단 말 듣고 설렜어요. 이제 정유 같은 다른 사업에도 신경을 쓰려고 하나 보다, 하고요."
"식량용 화물선이라고 해서 실망하셨겠네요."
"수영 씨가 필요해서 사놓는 거면 언젠가는 크게 대박이 날 거예요. 지금까지 그랬잖아요. 진짜 국제 대기근 같은 거라도 들지 모르죠."
"요즘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아서 대비는 해둬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영 씨가 그렇게 말하면 저희도 안심을 할 수가 없는데. 안 되겠다. 우리도 유조선 중고라도 잔뜩 사놔야겠어요. 나중에 정작 배 없어서 기름 못 들여오면 어떡해요?"
어느덧 장효주의 촬영이 끝났다.
땀을 닦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서희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 쉽게 안 져요. 알아두세요."
"저 기억력 좋습니다. 걱정 마세요."
"전 여자 친구 절대 못 잊는다는 말을 지금 돌려서 한 거죠?"
하수영은 조용히 대답을 피했다.
***
백두중공업 사장 백진택.
백영호 회장의 3남인 그는 청담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옆좌석에서는 한두철 상무가 연신 설명하는 중이었다.
"척당 1,580억 원까지는 코스트다운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식량 컨테이너선으로 쓸 생각이라…… 나중에 곡물 수출을 본격적으로 할 셈인가?"
"그 이상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음."
메가 컨테이너선.
대량의 단일 품종 화물을 운송하기에 적격이다.
주로 식량이나 원자재 같은 것을 운송하기에 좋다.
'아무리 통이 크다지만, 30척을 한번에 발주하겠다니.'
이 정도면 가뭄에 단비 수준이 아니었다.
조선소 재정 근심을 단숨에 날려줄 구원투수였다.
다만 큰형의 눈치가 조금 보였다.
'백두자동차는 프리덤 도입 실패 때문에 사이가 안 좋단 말이지.'
자율주행 계약은 실비아컴퍼니에서 실행한 것.
하지만 프리덤의 소유권이 하수영개인회사에 있다 보니, 큰형의 원망은 그쪽으로 흘러갔다.
실비아컴퍼니가 감히 백두자동차의 제안을 거절할 리는 없을 테고, 하수영이 소유권자로서 개입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리라.
'그래도 이 계약은 반드시 따내야 해.'
구두약속을 했으니 이미 9부 능선을 넘은 것이지만, 만약 부친이 나서면 판이 엎어질 수도 있다.
백진택은 확실한 마무리를 원했다.
차는 어느덧 청담동 휴민트타워에 도착했다.
"하수영입니다."
"음, 백진택입니다."
아들뻘의 젊은이.
하지만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사교 미소를 능숙하게 지으면서 악수를 받는다.
백진택은 불현듯 하수영이 자신의 친아들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망상을 해보았다.
"30척을 발주하신다면 척당 1,580억 원까지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최대한의 가격 편의를 봐드린 겁니다."
"사실 제가 그동안 마음이 살짝 변했습니다."
순간 한두철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고, 백진택도 안색이 굳어졌다.
사람 여기까지 불러놓고 장난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00척 발주로 하고 싶은데요. 가능합니까?"
"배, 백 척이요?"
당황하던 백진택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물론 가능합니다. 가격, 가격은……."
발주량이 늘어났으니 더 깎아줘야 할 텐데, 얼마를 더 깎아줘야 하는지 바로 계산이 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1,580억 그대로 가시죠. 그럼 15조 8,000억 원이 되겠군요."
백진택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쥐었다.
벌써부터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조선소의 뜨거운 열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옵션이 있는데요."
"옵션이라니요?"
뜬금없이 무슨 옵션? 백진택과 한두철은 어안이 벙벙했다.
"100척을 전부 인도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음……."
백진택 사장이 눈짓을 했고, 한두철 상무가 얼른 계산을 마쳤다.
"적어도 9년은 걸립니다."
"9년이나요?"
다른 회사들이 들었다면 '9년이나?'가 아니라 '9년밖에!'라며 경악을 할 기간이었다.
"신 공법 기술을 도입한 저희 회사는 12개월 사이클로 건조를 완료할 수 있습니다. 현재 회사 사정으로 한 번에 12척의 배를 동시 착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최대한 앞당겨도 9년 정도는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옵션을 걸려고 합니다."
대체 옵션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설마 건조 기간에 따른 페널티라도 부과하겠다는 뜻일까?
"100척 모두 인도에 9년이라고 하셨죠? 1년 단축할 때마다 500억을 포상금으로 드리겠습니다."
"……!"
"만약 1년…… 아니, 준비 기간도 필요하니 6개월 더 드리죠. 계약 체결 이후 18개월 안에 100척을 모두 인도하신다면, 2조 원의 포상금을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