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610화
153장 맨 프롬 콜롬비아 (1)
CR필름.
충무로에서 나름 알아주는 영화 제작사.
오늘 아침부터 회사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바짝 긴장돼 있었다.
하수영이 회사를 찾는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투자 때문에 찾아오는 거 맞지?"
"그거 말고 그분이 영화 제작사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
"듣기로는 우리 가진 시나리오 중에 마음에 든 배역이 있어서, 그거 출연하고 싶어서 오는 거라고 하던데요."
"그분이 원하면 남주연이라도 당연히 공손하게 내드려야지, 안 그래?"
"연기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인데, 그러다가 영화 망하면 어떡해요?"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분도 자기 돈으로 제작하려고 하실 텐데.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아, 그런가?"
"그분은 취미 활동해서 좋고, 우리는 손해 걱정 없이 작품 하나 만들어서 좋고, 스태프들은 일거리 생겨서 좋고, 모두가 윈윈 아닌가?"
"그래도 너무 망하면 그분이 실망하실 텐데."
"너무 어려운 배역만 아니면 될 거야."
그렇게 모든 직원과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CR필름 형우철 대표는 하수영 오디션 면접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생수와 다과 세팅 저게 뭐냐! 지금 접시 각이 비뚤어졌잖아, 각이!"
"아니, 누가 이런 플라스틱 의자 갖다 놓으랬어? 빨리 크고 푹신한 걸로 안 가져와?"
"여기여기! 조명이 너무 눈을 아프게 하잖아! 하수영 제작자님한테 눈뽕이라도 쓸 일 있어?"
형우철 대표는 직접 뛰어다니면서 오디션 무대를 신경 쓰고 있었다.
총감독과 카메라 감독은 함께 자리에 앉아,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준조연 오디션이 아니라 투자자 접대장인 줄 알겠네."
"감독님, 투자자 접대장은 맞지 않습니까?"
"그건 모르지. 투자한다는 이야기는 일절 없었잖아. 배역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연기하고 싶다는 말이 끝이었고."
"우리 대표님만 불쌍하네요. 혹시 어떻게든 눈에 들지 않을까 저렇게 고생하시는 꼴이라니."
"하수영 제작자님이 우리 조은후 배우 역할에 안 꽂힌 게 천만다행이지, 안 그래?"
동석한 남주연 조은후는 화들짝 놀라서 반문했다.
"왜 갑자기 저는 끌어들이십니까?"
"사실 내가 제작자라면 준조연 마약상보다는 주연 전직 첩보 요원을 탐낼 거 같아서."
"제 배역은 절대 안 뺏깁니다."
"그러니 주연에 눈 안 돌아가도록 우리가 최대한 커버치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두 분 감독님."
조은후 배우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김주환 마약상, 등장 씬 자체는 적어도 영화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주여 배역인데, 초짜한테 역할을 주는 건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렇지. 영화 망하기 딱 좋지."
"이 영화 무조건 잘돼야 합니다. 저와 소속사도 여기에 모든 걸 걸었다고요."
"장효주가 출연하니까 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러고 보니 장효주는 왜 안 오지? 아, 제작자님하고 같이 오려나?"
"그렇겠지. 두 사람 친하잖아."
"스캔들 기사가 날 만도 해. 근데 그 정도면 둘이 사귀어도 문제 될 거 없지 않나? 오히려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조은후 배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형우철 대표는 오디션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모든 것을 세세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마치 대통령의 부대 방문을 앞둔 투스타 사단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왔습니다!"
"드, 드디어!"
직원 한 명이 헐레벌떡 들어와서 보고했다.
형우철 대표는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고, 오디션장 분위기는 바짝 조여졌다.
총감독과 조감독도 얼른 형우철 옆에 섰다.
조은후 배우는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에 엉거주춤 섰다.
잠시 후 하수영과 장효주가 나란히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왔다.
CR 필름으로서는 하수영을 처음 만나는 것.
형우철 대표는 하수영 앞에서 허리를 크게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작자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수영입니다. 오늘 오디션 잘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편안하게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조은후는 자기 옆에 선 매니저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형, 지금 내가 보는 게 준조연 오디션 맞는 거지요?"
"양키스 구단주가 KBO 프로팀에 입단테스트 하러 왔어. 감독이 어떻게 대할 거 같아?"
"와씨, 나 지금 한 방에 이해해 버렸어."
"준조연이라고 다 같은 준조연이 아니야. 준조연 겸 투자자가 될 수 있는 분이라고, 너도 그러니까 툴툴대지 말고 잘 보여."
"나야 내 배역 뺏길까 봐 긴장돼서 끙끙댄 거고."
"네 배역 뺏을 거였으면 처음부터 말했지, 굳이 돌려서 다른 배역 오디션 볼 필요가 있겠냐? 내가 보기에는 진짜 순수하게 그 마약상 배역에 꽂혀서 저러시는 거야."
형우철 대표는 어쨌거나 애지중지 하수영을 에스코트하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누가 보면 그가 하수영의 로드매니 저로 오해했을 정도로 극진했다.
오디션을 거드는 스태프들도 하나 같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잘 보여야 한다.'
'마음에 들면 우리 영화에 투자라도 하실지 어떻게 알아?'
'부활의 이순신 스태프들 대우가 그렇게 좋다던데. 그게 다 저분 의지로 그렇게 해주는 거라던데.'
'차라리 KI스튜디오처럼 우리 회사도 인수해 주셨으면 좋겠다.'
저마다 그렇게 장밋빛 꿈에 젖어 있었다.
장효주는 오디션 면접관 자리에 돌아갔고, 하수영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디션 응모자가 앉은 의자가 제작사 대표 의자보다 훨씬 크고 부드러웠지만, 전혀 위화감이 없다.
면접관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다들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다.
"음, 다들 제 연기를 볼 준비는 되셨나요?"
하수영이 먼저 말을 꺼냈고, 형우철 대표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준비됐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시작하시면 됩니다!"
조은후와 매니저는 그걸 보고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오디션을 보는 거야?'
'대표님, 열일 하시네.'
"그전에 먼저 제가 캐릭터 분석을 좀 해봤는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묻기도 전에 캐릭터 분석을 먼저 떠들어대는 준조연 오디션 응시생은 없다.
"한 전직 국정원 요원이 상류층의 부패함을 추적하고 복수한다는 스토리, 제 마약상 배역은 중간보스 정도 역할."
하수영은 대본을 휘리릭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어느새 다리까지 태연하게 꼬고 있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없다.
"개연성 오류가 좀 있네요. 이러면 관객들이 어처구니없을 거 같아요."
"무엇인지 경청하겠습니다."
형우철은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개연성 오류라니?
총감독과 카메라 감독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미국에서 마약 제조해서 팔다가 건강악화 된 고령의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한국에 들어온 김에 국내 최대마약상이 된다는 설정인데……."
"그것은 마약상이라고 해도 자기 부모에 대한 효심은 남다르지 않다는 점에서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왜 미국이냐는 겁니다."
"네?"
"마약상 경력 설정 대충 보니까, 미국이 아니라 콜롬비아에서 넘어왔다고 해야 자연스러워요. 원래 거기가 최대 마약 생산국이잖아요. 미국은 그냥 소비시장입니다."
"……."
"……"
"보니까 마약 소매 유통도 아니고 B2B로 영업, 그것도 자기 생산소도 있는 놈인데 미국 출신이라고 하면 어색하죠. 콜롬비아 마약상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마침 제가 스페인어 할 줄 아니까 발음은 문제없을 겁니다."
대표는 열심히 끄덕였고, 다른 이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고? 발음문제는 없어?
"스케일도 너무 작아요. 콜롬비아 마약상이면 전용기는 기본입니다. 보험 겸 곁다리 겸해서 양지 사업도 꽤 크게 벌이고 있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가난하게 나오죠?"
"설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적어도 걸프스트림 전용기급은 타고 다녀야지, 무슨 벤츠를 타고 다닙니까? 걔들 총격 위험 있다고 자동차는 잘 안 타요."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촬영 예산 문제로……."
"예산 잡아놓은 거 있으면 한 번 봅시다. 지금 줘봐요."
형우철 대표는 얼른 달려가듯이 하수영 옆에 서서 노트북을 펼쳤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조은후는 카메라 감독을 돌아보며 작게 물었다.
"지금 김주환 마약상 배역 오디션보는 거 맞죠?"
"……맞을걸?"
"아무리 봐도 우리 영화 시나리오가 오디션을 보는 거 같은데요?"
그들이 할 말을 잃거나 말거나, 하수영과 형우철은 진지하게 대화 중이었다.
어느새 총감독도 거기에 합류한 상태였다.
오디션용 크고 푹신한 의자에 앉은하수영과, 좌우에 시립한 대표와 총 감독,
"80억? 아니, 요즘 저예산 독립영화도 이런 돈으로는 영화 안 찍어요."
조은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찍는 게 아니라 못 찍는 거라고, 엄두도 못 낼 돈이라서.
"스태프들 식대 주고 나면 남는 거 없겠는데, 무슨 돈이 남아서 영화를 찍겠어요? 카메라는 빌릴 수 있겠어요?"
스태프들도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부활의 이순신 스태프들은 뭘 먹고 다니고 있는 거지, 하고,
"아니, 카메라가 아이맥스 필름이 아니라고요?"
"아, 네. 저희 영화는 기본 디지털카메라로 제작을 할 예정이라……."
"70mm 아이맥스로 갑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약상이 무슨 아파트에 살아요? 공동주택은 쳐다도 안 보는 애들입니다. 활주로 딸린 단독 주택 하나 섭외하세요."
"서, 서울에서는 그런 배경무대를 구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럼 제 집을 촬영지로 쓰고, 활주로는…… 일단 CG로 처리하죠."
"아,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형우철 대표의 안색이 밝아졌다.
천억이 넘어가는 청담동 한복판 대저택.
"여기 대본 보니까 마약상 경비원이 겨우 15명 정도네요. 말도 안 됩니다. 적어도 20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개연성 오류라서 지적할 게 한두 군데가 아니네. 마약상 걔들 벌이가 얼만데, 이렇게 검소하게 안 살아요. 아니, 못 살아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자료조사가 부족했습니다."
"위장 신분으로 양지용 사업체도 꾸려야 하니까…… 역시 의료제약사업이 가장 좋겠네요."
"의, 의료제약 사업이요?"
무조건 오케이만 남발하던 형우철대표도 이 말에는 당황했는지 주춤거렸다.
"제약회사는 마약상이 가지기에 좋은 위장용 양지 사업이죠. 제약 연구를 통해서 마약 정제 효율도 높이고 안정성도 꾀할 수 있고요. 마약사업도 수익성 중요합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신상품 나오면 클로즈베타 테스트도 해야 하니까, 종합병원도 하나 갖고 있는 게 좋습니다. 마침 제가 병원 하나 갖고 있으니 촬영지로 쓰기에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 배역은 정말이지 제작자님을 위해서 탄생한 배역입니다!"
"제약회사가 중요한데…… 잠시만요. 우리 병원에 납품하는 회사들한테 알아볼게요."
그리고 하수영은 바로 전화기를 꺼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장님! 동현제약 박상신 사장입니다!
"영화 촬영에 제약회사 배경이 필요한데 혹시 협찬 가능할까요?"
-물론이지요!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동현제약은 국내 모든 2차, 3차 종합병원을 다 합친 것보다 돈 많은 수영병원 이사장의 부탁을 거역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CR필름 형우철 대표님이 연락 갈 건데, 협조 잘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자, 그럼. 제약회사는 해결됐고…… 아니, 왜 한강 유람선에서 상류층 고객들과 비밀미팅을 가지는 거죠?"
"그것은 마약상이 가진 부와 사치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서……."
"걔들 크루즈는 한강에 들어올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에요. 이 개연성 진짜 어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느새 촬영감독마저 저기에 합류했다.
덩그러니 앉아 바라보던 조은후가 매니저에게 조용히 말했다.
"형."
"왜."
"어쩌면 진짜 찰떡 배역일 수도 있겠어요. 영화 망할 일 없겠네."
"넌 지금 망할 일 없겠다고 생각하냐?"
"그럼?"
"난 지금 이 영화가 영화판 부활의 이순신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
"뭐하냐? 너도 빨리 합류해야지,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