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95화
148장 어느 기초의원의 기념회 (4)
농민, 자영업자, 정치인, 기업인 참가자들.
그들은 비록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오늘 행사의 본질을 깨달았다.
"출판기념회가 아니었어?"
"아니, 출판기념회는 맞는데 정치 자금 모집이나 정치적 인지도 향상을 위한 정치적 출판 행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수영 의원이 부활의 이순신 소설화를 맡았다고? 제작비만 댄 게 아니라?"
"두 당 2권씩밖에 못 산대요! 서둘러야 합니다! 오늘 못 사면 새로 찍어내서 배송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책을 오늘 수령하든, 차후에 수령하는 받는 입장에서는 상관없다.
하지만 하수영의 눈도장을 받는 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을 사서 사인까지 받은 정치인, 기업인들이 그래도 더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그래서 뒤늦게 그들은 움직였지만, 이미 상황은 끝이 나 있었다.
"아니, 그 많은 책들이 다 어디 갔어?"
"모, 모르겠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기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호텔로 호출당한 JS그룹 직원들이 모조리 사갔다는 것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먼저 온 드라마 열성팬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인을 받기 위해 하수영 앞에만 줄을 서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오늘 당장 책을 수령하지 못해도 불만이 없었다.
출연진 파티 초청, DVD, 브로마이드는 당일 서적 수령 여부와는 무관했으니.
때문에 JS그룹 직원들은 도장 사인으로 대체한 책들을 모조리 긁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공을 뺏긴 정치인, 기업인들이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하수영이 마침내 사인을 모두 마치고 1층 대형 로비로 나섰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반갑습니다. 하수영입니다."
하수영이 감사 인사를 시작했다.
"부활의 이순신 소설화 작업을 하면서, 정치인으로 살아온 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다.
정치인 행사로 알고 참여한 사람도.
드라마 출연진 파티 초청이 탐나 참여한 사람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몰입하고 있었다.
"예전에 제가 존경하고 밑에서 모셨던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농사는 배부르게 먹을 정도면 충분하지만 문화의 힘만큼은 끝없이 높았으면 좋겠다고요. 제가 부활의 이순신에 투자를 하게 된 것은 제 가슴 한편에 그 말씀이 자리 잡은 바도 큽니다."
강남구의회 부의장 최우석.
하수영의 이웃인 그는 불현듯 주변을 돌아보다가 깨달았다.
어느 한 명 예외 없이 하수영의 말을 경청하고 있음을.
이 많은 군중이 순식간에 자신의 말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정치가로서 정말 큰 재능 아닌가.
"다음 세대의 패권은 식량과 문화입니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갈 것으로 봅니다. 저 역시 자연인 하수영, 정치인 하수영으로서 그 두가지에 힘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끼야아아악!"
"당첨! 제발 당첨되게 해주세요!"
"효주 언니, 지금 만나러 갑니다!"
"제독님 만나러 물 건너 왔어요! 꼭 당첨 주세요!"
한순간에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하수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자연 풍경이 나오던 대형 디스플레이의 재생 영상이 변했다.
카지노 슬롯머신처럼 숫자들이 요란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자, 영광의 첫 번째 당첨자는!"
"00009번입니다! 자, 앞으로 나와 주세요!"
"우와아아!"
한 여학생이 자지러질 듯이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친구들의 축하와 부러움을 한 몸으로 받으며, 여학생이 앞으로 나왔다.
"네 번째 당첨자는! 01839번입니다!"
"꺄아아악!"
그렇게 당첨자들이 차례차례 단상에 올라섰다.
"사전에 미리 공지한 대로 총 서른 명의 당첨자분들을 모셨습니다. 오늘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드라마부활의 이순신 출연 배우들과 꿈같은 추억을 쌓게 됩니다."
서른 명의 당첨자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부러운 감정이 가득했다.
정치인 행사인 줄 알고 왔던 기업인들 눈에는 어리둥절한 감정이 가득했고,
"이것으로 부활의 이순신 하수영출판기념행사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찾아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초의원 참석자들은 하수영의 색다른 면모를 봤다.
그들은 하수영의 구체적인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대 대기업들은 일단 모조리 왔고."
"국회의원만 열 명 넘게 왔던데.
그것도 죄다 2선 이상으로만."
"박청단 의원님 봤어요? 난 하 의원님이 당 대표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그 앞에서 얼마나 깍듯하신지."
나이 든 국회의원이 같은 지역구손주뻘 기초의원 앞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던 모습.
기초의원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만 다 합치면 거의 10만 명이라는데. 가족들까지다 하면 거의 40만 명 되겠고."
"200만 명 넘는 전국의 농민들도 하 의원님 말씀이라면 껌뻑 죽으니."
"어떤 의미로는 '정치인 하수영'의 정치적 존재감을 제대로 확인하긴 했네요. 이번 행사 말이에요."
"근데 국방부 장관은 왜 온 거죠? 뭔가 얽힐 만한 게 없을 거 같은데……."
"의원님이 장병들 가정에 황비버섯하고 쌀이랑 무상으로 매달 보내주시잖아요. 그것만 해도 국방부에서 크게 감사할 일이죠."
"아, 그건 몰랐어요."
"그분은 이리저리 워낙 하시는 게 많아서 다 알지 못하는 게 정상이에요."
기초의원들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하 의원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진짜 지옥이라도 따라가야 하겠어요."
"아, 박조휘 의원이 너무 부러워요. 우리도 그분처럼 선택받았으면 좋겠네."
***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는 부활의 이순신 주연 배우들이 모여 있었다.
촬영 스태프들도 장비를 갖추고 대기 중이었다.
하수영이 들어서자 그들은 다소 긴장한 채 다들 일어났다.
"자, 이제 곧 서른 명의 행운의 당첨자들께서 들어오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연기한 드라마가 너무 좋아서 먼 길을 마다하고 오신 분들입니다. 부디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세요."
"물론입니다, 회장님."
걸걸한 목소리의 중년 남자 배우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이번 행사는 팬미팅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정식 미디어 출연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혹시 저한테 질문하실게 있나요? 아무거나 좋으니 편안히 물어보세요."
"저어, 적토마 스튜디오하고 소송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장수 연기를 했던 젊은 남자 배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소송이 끝까지 갈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뒤로는 합의가 진행 중인가 봐요?"
장효주가 차분히 물었고, 하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제 와서 합의 이야기한다고 해도 제가 받아주지도 않을 거고, 합의를 할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겠죠."
"그럼요?"
"회사가 망할 판에 소송 따위나 질질 매달려 있을 순 없을 겁니다."
"적토마가 망한다고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저녁 뉴스로 확인하시죠. 아무튼 여러분이 걱정하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우리 KI 스튜디오는 매우 튼튼합니다. 곧 새드라마도 들어가요."
하수영이 그렇게 장담하다 비로소 배우들의 안색에 안도의 기색이 깃들었다.
한국 미디어 생태계에 한 획을 그을 제작사가 나타났는데, 괜한 암초에 흔들리지 않을까 다들 업계종사자로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자, 그럼 행운의 30인을 소개합니다! 다들 반갑게 맞이해 주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파티참가 당첨자들이 조심스레 들어섰고, 곧 기뻐하는 함성이 스위트룸을 가득 메웠다.
***
거물 정치인, 기업인들이 참석한 출판기념행사.
하지만 메이저 신문사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중소형 언론사에서 간결하게 쓴 기사가 겨우 몇 개 검색되는 게 전부였다.
병원에 메여 있느라 출판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왕세경 부이사장은 이런 현실이 못마땅했다.
"뭐야? 왜 이렇게 기사가 없어? 다들 우리 이사장이 그렇게 우스운가?"
"하필 이정범 마약 스캔들이 이때 터져서……."
"이정범이가 누구야?"
나름 한국에서 알아주는 톱스타 남배우이지만, 왕세경에게는 무명의 잡것이었다.
"있습니다. 지금 한창 이름 날리고 있는 톱레벨 배우인데요……."
"수천억 들여서 글로벌 대박 대작드라마 찍은 우리 이사장보다 더 잘난 놈이야? 연예계에 더 영향력 있어?"
"그건 아니지만……."
아닌 정도가 아니라 감히 비벼보지도 못한다.
"그런데 우리 이사장이 처음으로 연 출판기념행사가 그런 놈 마약 기사에 묻혀야 돼? 혹시 묻으려고 일부러 터뜨린 건 아니지?"
"그건 아닐 겁니다. 아무튼 4대 일간지에서 이정범이 마약 기사만 헤드라인으로 다루다 보니……."
"창식아."
"네, 회장님."
"병원에서는 부이사장님이라고 부르랬다."
"하지만……."
오랫동안 왕세경을 보필해 온 고창식 전(前) 전무는 머뭇거렸다.
"10대 재벌가에서도 어쨌든 축하인사를 보냈어. 그런데 언론사들이 그걸 전혀 안 다뤘다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냐?"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 이사장이 혹시 신문사들하고 뭐 척진 거 있어?"
"전혀 없습니다."
고창식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이사장님이 언론 관련해서 얽힌 것은 전혀 없습니다. 나쁠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얽힌 게 전혀 없어?"
"네, 전혀……."
무심코 대답하던 고창식은 왕세경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뉘앙스를 느끼고 아차 싶었다.
"그럼 좋을 일도 전혀 없겠네?"
"……."
"중원일보 스타일 알잖냐. 우리 이 사장처럼 잘나가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든 들러붙는 거. 그런데 조용한건 말이 안 되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혹시 서해그룹에서 뭐 손 쓴 게 있는지 그 부분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서진파운드리 때문에 그쪽도 악감정 많이 상했을 테니까."
"네, 라테그룹 쪽도 한 번 파보겠습니다."
"그래야지. 거기도 우리 이사장하고 감정 상한 게 보통은 아니니까. 아, 뉴월드그룹도 돌다리 두드린다 생각하고 알아보고."
뉴월드그룹은 형제싸움 때문에 마트가 그룹에서 뚝 떨어져 나갔다.
가문과 의절하다시피 갈라선 황태진 부회장은 마트를 들고 하수영 진영으로 투항해 버렸다.
뉴월드입장에서는 좋게 보이지만은 않으리라.
"백두그룹은 어떻지?"
"반반입니다. 백화점의 백현진 사장은 수영레스토랑과 친한 편이지만, 다른 형제들은 좋게만은 보지 않습니다."
"가만히 정리해 보니까 우리 수영그룹이 생각보다 적이 많군."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 이사장한테 악감정품은 기업인들 명단 정리해서 가져와."
회장님이 별개로 보복 조치를 생각하시는 걸까?
고창식은 마른침을 삼켰다.
왕세경은 평소 온화한 스타일이지만, 한 번 자신을 적대한 이는 결코 사정 봐주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병원 부 이사장이 되면서 사람이 확 달라지긴 했지만, 과연 그 포식자 본능이 전부 없어졌을까?
"나중에 우리 병원 찾으면 무조건 10인실에 밀어 넣을 거다. VIP 병실은 구경도 못 할 줄 알아."
"……."
"왜, 내가 옛날처럼 짓밟으려고 들줄 알았냐?"
"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