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94화
148장 어느 기초의원의 기념회 (3)
관광버스 집단은 시작이었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떼를 이루어 호텔에 들어섰다.
특이한 점은 하나같이 어려 보였다.
는 것이다.
"여중생? 여고생?"
"아니, 학생들이 이 시간에 학교는 안 가고 여기는 왜 온 거야?"
"오늘 학교 쉬는 날입니다."
"아, 아무튼 간에요!"
구의원들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 자영업자들, 시의원 및 국회의원 정치인들, 후원회 노인들, 기업가들 역시 당황했다.
외국인 중년 여성들 관광객에 이어, 국내 여중여고생들 단체방문이라니.
JS건설 사장 조진웅이 얼른 로비직원을 향해 다가가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들어온 저 사람들은 일반손님 같습니다만?"
호텔 전체 대관이기에, 오늘은 일반객 출입은 제한되어 있었으니.
하지만 로비 직원의 대답이 의외였다.
"일반손님은 아니고, 참석자 명단에 이름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라고요?"
"네, 온라인으로 오늘 사인회 예약하시고 멀리서 오신 분들입니다."
"사인회?"
조진웅은 순간 멈칫했다.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을 걸리게 했다.
오늘이 하수영의 정치인 출판기념 행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
당연히 책에 사인을 해주는 행사도 있을 것이다.
순간 퍼뜩 든 생각에 그는 황급히 물었다.
"책은, 그런데 책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3번 그랜드볼룸에 일단 있습니다.
오늘 행사에서는 일단 2천 명까지만 현장 사인을 해드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조진웅은 뛰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3번 그랜드볼룸을 찾은 그는 밖에서부터 줄을 지어 선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아까 관광버스를 타고 온 외국 중년 여성 관광객들이다.
황급히 그들을 제치고 안에 들어서 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이 보인다.
중앙에는 하수영이 당당하게 앉아서 책에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로 서 있는 큼지막한 세로 플래카드의 모습이…….
[부활의 이순신! 50개 언어로 완벽 번역!]
[한산도 대첩의 통쾌함을 이제 귀하의 서재에 꽂아 넣다!]
[정치인 하수영의 첫 출판기념사인회! 경축!]
"……."
조진웅 사장은 순간 발에 힘이 빠질 뻔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은 덕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꼴불견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아득한 정신 너머로, 재잘거리는 여중여고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짜야? 진짜 오늘 여기서 책 사면 이순신 출연진들 파티 초대에 추첨되는 거지?"
"그렇다니까. 양장본 초판 패키지 한정 파티 초대라고, 오늘 저녁에 당장 추첨하고 파티 연대. 바로 이 호텔에서!"
"솔직히 출연진 파티 초대는 너무 경쟁 치열해서 꿈같은 일이고, 브로마이드 당첨이나 됐으면 좋겠어."
"아, 몰랐어? 브로마이드는 패키지구입하면 누구나 다 준대."
"어, 그게 정말이야?"
"이순신 시즌 1 DVD패키지가 추첨으로 주는 거고, 브로마이드는 전부 주는 거래."
"와, 대박. 이러니까 욕심나잖아. DVD 패키지도 받고 싶은데."
조진웅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계우 붙잡고 일어났다.
그가 비틀거리면서 다가오자 여중생들이 입을 다물고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뭐예요, 아저씨? 새치기 안 돼요. 저리 가요."
"뒤로 가서 줄 서세요. 우리는 어제 오후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단 말이에요."
"이 아저씨 어제 여기 앉아 있었나? 혹시 누구 본 사람?"
여중생 한 명이 날카롭게 돌아보며 묻자, 다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저씨, 뒤로 가세요. 안 가시면 경비원 부릅니다?"
"……저기,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너희들은 그럼 부활의 이순신 소설책 받으려고 여기 행사 온건가?"
"네, 양장본 초판에 이것저것 끼워주는 게 많아서요. 그래서 어제 오후부터 여기에서 돗자리 깔고 있었는데."
"……."
"그럼 아저씨는 뭐하러 여기 오셨는데요?"
"하수영…… 이란 이름은 알지?"
"그럼요. 부활의 이순신 원작 작가잖아요."
"드라마가 원작이고 하수영 작가는 원작을 소설로 옮긴 거 아니었어?"
"아, 그랬나? 솔직히 소설판은 별로 관심 없어서."
"브로마이드, DVD, 출연진 파티 초대 추첨권이 중요하죠."
딱 봐도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
이들은 정치인 하수영의 출판기념 행사로 알고 찾아온 게 아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도 아마…….'
이들과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드라마 부활의 이순신이 전 세계에서 초대박을 쳤으니, 출연진을 만나볼 기회에 신이 나서 온 것일 수도.
"소설화 작업을 의원님이 하셨구나……."
오늘 이 행사는 정치인 행사인가, 아닌가?
정의하기가 애매하다.
어쩌다 보니 조진웅도 줄을 섰다.
사인을 받는 줄이 아니라 그냥 서적만 구입하는 줄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학생들은 사인본을 받아야 추첨 확률이 높아간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수영 앞의 줄에만 다들 몰려 있는 걸 보니.
그래서 사인 없이 책만 파는 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뒤늦게 줄을 선 여학생들은 지방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19,000원입니다."
양장본 패키지라 그런지 제법 비쌌다.
호텔 직원은 흰 속지에 따로 도장사인을 찍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수영]
[202X년, X월 XX일]
[넘버링 0087]
"이거 근데 도장 사인은 추첨권이 전혀 없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부 공평한 조건하에 추첨이 이뤄집니다. 저녁에 발표가 날 테니까 기다리셔도 되고, 아니면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주셔서 확인하셔도 됩니다."
"……."
일단 책을 받아들고, 그랜드볼룸을 나섰다.
로비 분위기는 한창 뜨거웠다.
각종 정치인, 기업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하수영의 첫 정치인 행사가 가져올 파급효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원님이 더 이상 구의원에 안주하지 않으실 모양이야."
"아마 오늘 행사에서 각오를 밝히시겠지."
"당장 여의도 진출을 선언하시지 않을까?"
"그보다는 시장 선거를 노리실 거 같은데요? 의원님을 오래 지켜봐 와서 잘 아는데, 행정가로서의 감각과 실력이 정말 탁월하십니다."
"20대 최연소 시장이라……."
"만25세 제한이 없어진 게 마치 의원님을 준비한 운명의 결정 같기도 하군요."
조진웅 사장은 그들을 향해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들 착각하고 있다고.
오늘 행사 그런 자리 아니라고, 출판기념행사는 맞는데 그 출판 서적이 당신들이 생각하는 자기자랑 가득한 정치인 자서전이 아니라고.
그때 허재우 부회장이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 사장, 의원님은 뵈었나?"
"먼발치에서 얼굴만 뵙고 왔습니다. 지금 손님들 상대하느라 한창 바쁘시더라고요."
"음, 그렇겠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줄은 나도 몰랐어."
"대충 1만 권 정도만 성의를 보일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는 성에도 안 차겠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
"10만 권 정도는 주문을 해야 그래도 우리 그룹이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정치인의 출판기념행사는 합법적으로 후원금을 모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후원을 받은 게 아니라 엄연히 책을 팔아서 얻은 수입이니까.
당연히 JS그룹도 다른 기업들처럼 공식 합법적 후원금을 주기 위해 왔다.
"10만 권이면 19억 원 정도 되겠군요."
"너무 작지만 어쩔 수 없지. 책 구매에 그 이상 썼다가는 정치자금이냐고 조사가 들어올 판이니."
"10만 권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구매할 수 있을지가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보시면 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허재우 부회장은 3번 그랜드볼룸에 들어서서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부활의 이순신? 의원님이 소설화를 담당하셨다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제작자라고 하지만 원작 드라마를 글로 망치려고……."
허재우는 부활의 이순신의 열성팬이었다.
소설판이 나왔다는 것은 들었지만, 원작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작자가 직접 소설화를 했다고?
'원작 소설화 망치는 대표적인 루트인데…….'
10만 권 주문은 애초에 어림도 없었다.
"내국인은 1인당 2권까지만 주문이 가능합니다. 외국인은 10권까지 가능하고요. 추첨 확률은 구매한 권수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멀리서 비행기 타고 왔으니 외국인한테는 그런 특혜를 베풀어주는 것.
그렇다고 10권을 산다고 2권 산 사람보다 당첨 확률이 5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님, 질문이 있어요! 김아연이 드라마에서는 넘치는 애국심과 끓는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련의 여인 이미지로 나오잖아요?"
"그랬었나요?"
"그런데 소설판에서는 냉정하게 왜구를 때려잡는, 무슨 기계여전사 같은 느낌으로 묘사되는데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거죠?"
"김아연이 장효주 배역의 캐릭터였나요? 맞죠?"
"작가님이 쓰신 글인데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제가 첫 작품에 너무 기운을 쏟아내서 그런지 집필을 끝내고 나니 머리가 백지가 되더라고요. 잠시만요."
하수영은 메시지 기능으로 프리덤한테 질문했고, 프리덤은 귀에 낀 이어폰을 통해 대답했다.
-프리덤, 김아연이 소설에서 정말 그렇게 묘사되냐?
-그러게 한 번 정독은 하시고 행사에 나오셨으면 됐을 거 아닙니까.
-설마 소설 내용 물어볼 줄 누가 알았냐. 그리고 네가 이렇게 말해주면 되는 거지. 왜 김아연을 그렇게 기계전사로 그려놨어?
-생과 사가 오가는 가운데 사랑 같은 호르몬 작용이 강하게 발발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생리현상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소설판에서는 전쟁의 비정함을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의 감정선을 다르게 잡았지요."
-정독 한 번만 했어도 구매자들이 의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러다가 마스터가 저작한 게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떡합니까?
-누가 너의 인격을 만들었지?
-마스터이십니다.
-너의 코딩을 비롯한 모든 창작활동은 내게 권리가 있는 거야. 그러니 부활의 이순신 저작권자는 내가 맞지.
"작가님, 근데 여기 보면 '하수영, F1 공저'라고 되어 있는데, F1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집필에 사용한 개인컴퓨터예요. 가장 아끼는 시스템 도구죠. 그래서 공저란에 이름을 넣어줬습니다."
"이야…… 창작하시는 분들은 역시 생각하시는 게 뭔가 달라요. 그냥 자기 도구를 같은 공저자라고 생각해서 이름을 넣으시다니……."
서해그룹에서도 행사에 참석했다.
이현덕 부회장은 오지 않았고, 대신 서해전자 반도체사업부 사장 이문석이 참석했다.
"부회장님이 직접 오시는 게 나을 거 같지만…… 아무래도 껄끄러우시겠지."
서해그룹은 하수영과 마냥 좋다고 할 수만은 없는 사이였으니.
직접 부딪치거나 얽힌 것은 없다지만, 간접적으로 섞인 게 한둘이 아니다.
당장 하수영이 투자한 서진파운드리 덕분에 서해전자가 본 손해가 얼마인데.
"그나저나 그게 정말일까? 프리덤개발자가 하수영 의원이라는 게?"
"실리콘밸리에서 그런 말이 심심찮게 나돌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봅니다. 하수영 의원은 그저 농민입니다. 개발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지……."
"그 말도 안 되는 농작물 생산량도 그렇고, 2년 만에 그런 부를 쌓은 것도 그렇고, 하여튼 의문투성이야."
로비에 바글거리는 낯익은 인사들을 보며, 이문석 사장은 새삼 정치인 하수영의 위세를 실감했다.
"우리도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지. 5만 권 정도 주문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JS그룹 허재우 부회장이 특단의 지시를 내렸다.
"그룹 직원들, 당장 전부 여기로 출근하라고 해."
현장 재고량은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초기에 싹쓸이를 하는 쪽이 승리한다.
"우리 그룹이 가장 큰 성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