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93화
148장 어느 기초의원의 기념회 (2)
정치인의 출판기념회.
자기 이름으로 낸 정치 서적을 홍보하고, 판매도 하고, 사인회도 하는 행사를 말한다.
후원회 느낌이 강하며, 주로 정치 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열린다.
엄연한 정치활동이다 보니, 당연히 정치선거 일정에 따른 제약이 있다.
무슨무슨 선거 며칠 전부터는 출판 기념행사를 열지 못한다거나 하는 제약 같은 것.
유력 정치인 같은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으기 좋다.
대기업 같은 곳에서 몇천 권씩 한번에 사주기도 하니까.
물론 대부분 책 내용은 별로 볼게 없다.
자기의 정치적 비전을 자랑하듯이 나열하는 게 대부분이고.
복사 붙여넣기가 빈번하며.
무엇보다 이렇게 팔린 책들을 진짜 끝까지 읽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이렇게 정치적 성과를 거뒀고, 이렇게 아름다운 정치적 비전도 갖고 있어!'
라는 자랑으로 도배된 책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대부분은 받아서 기념품처럼 서재에 꽂아두는 용도로 쓴다.
나 이런 정치인하고도 친해, 라는 과시용?
물론 웬만큼 정치적 비중이 높지 않으면 감히 열지 못하는 행사다.
기초의원은커녕 시의원도 엄두를 못 낸다.
재선 이상의 국회의원 정도는 되어야 행사를 열어도 창피하지 않은 수준.
강남구의회에는 하수영이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하지만 의회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초의원이긴 하지만, 하 의원님이야 슬슬 출판기념회 열 때 되셨지."
"웬만한 3선 국회의원보다 무게감있으시니. 적어도 강남에서는 말이야."
"의원님하고 한 번 친해져 보겠다는 기업가들, 정치인들 눈이 벌게져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르주블랑 호텔 그날 통째로 대관해서 행사 연다는데? 일반손님은 아예 안 받기로 했대."
"그 도도한 르주블랑 호텔이? 와, 하 의원님 입지가 대단하긴 하구나."
"몰랐어? 르주블랑 호텔 얼마 전에 팔렸잖아. 이제 하 의원님 거라고."
"뭐? 정말?"
"프라임컴퍼니가 르주블랑 샀잖아.
의원님이 프라임컴퍼니 최대주주니, 결국 의원님 거나 마찬가지지, 뭐."
하수영이 생애 처음으로 여는 정치인 출판기념행사다 보니, 주변의 관심도 남달랐다.
"과연 어디어디에서 올까?"
"일단 10대 재벌기업들은 모두 참석하지 않을까?"
"그거야 당연하고, 대관 담당자가 오는지 아니면 오너 일가에서 오는지 그게 중요하지."
"그러네. 설마 대관 담당자만 툭던지듯이 보내진 않을 거잖아."
"강남구 실세인데 당연한 거 아냐?"
"JS그룹에서는 적어도 부회장급 이상 인물이 올 거 같아."
"프라임오일 덕분에 JS칼텍스가 지금 정유업에서 잘나가고 있으니까."
"JS건설도 지금 굵직한 공사 여러 개 맡아서 진행하고 있잖아. 사장은 무조건 참석해야지."
"JS중공업도 수영농장에서 터진 금맥 채굴권 땄잖아. 거기도 사장단 출석해야지."
"농식품부, 농협, 농협은행, S은행도 당연히 올 거고 말이야."
강남구의회 직원들은 모이기만 했다 하면 그 이야기였다.
"잘하면 제2의 박조휘 의원님이 새로 나오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그거 노리고 눈도장찍으려고 정치인 지망생들이 꽤나 몰려들 걸요."
"서울시의원 한 번 해보겠다고 지금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아예 하수영 의원님을 자기네 당수 받들듯이 떠받드는 분위기던데요."
원래 같은 지역구 기초의원은 국회의원한테 말단 부하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기초의원이 조 단위 자산과 기업체를 갖고 있다면?
전국의 10만 명이 넘는 치킨 등 프랜차이즈 사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전국의 수백만 농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면?
그저 눈길 한 번 받아보겠다고 고개를 넙죽 숙이는 처지가 될 수밖에.
***
정치인 출판기념행사가 다가왔다.
박조휘 기초의원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행사장으로 향할 준비를 갖췄다.
본래 강남구의회 행정직원이었다가 하수영의 권유로 보궐선서 출마, 당선이 된 그는 하수영의 정치적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에서 그를 보는 시선도 이미 달라졌다.
"형님, 행사 잘 하고 오십쇼. 너무 긴장하지 마시구요."
"고맙다. 너도 같이 들어가면 좋을 텐데."
"에이, 저 같은 놈이 가봤자 촌티만 낼 뿐이죠. 의원님도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의원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남들 앞에서 꿀리면 안 된다고, 친한 동생은 일부러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오늘을 위해 ㅎ번호판이 없는 국산세단 차량을 렌트해서 호텔까지 대워줬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오늘은 일반손님을 받지 않다 보니, 입구에서부터 친절하게 확인이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행사 개시는 13:00.
하지만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로비는 많은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정장을 빼입었지만, 어설픈 촌티가 숨겨지지 않는 이들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 자영업자들인가 보군.'
박조휘는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저는 하수영 의원님을 모시는 강남구 기초의원 초선 박조휘라고 합니다."
"아, 박조휘 의원님?"
"이름은 많이 들었네요. 이렇게 훤칠하신 분인 줄은 몰랐네."
"우리는 새벽에 올라왔어요. 저는 수영치킨 가맹점 운영하는데, 회장님이 얼마든지 와도 된다고 하셔서 용기 내서 왔습니다."
"이런 데는 처음이라 기가 팍 죽어서 뭘 해야 할지……. 그래도 의원님이 말 걸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 다그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수영이 나타나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 다들 여기 계셨군요."
"아, 의원니…… 이이임?"
박조휘는 웃으며 돌아보다가 그만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놀랍게도 하수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금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금색 구두, 금색 바지, 금색 재킷, 금색 타이.
심지어 금으로 만들어진 롤렉스 시계에다가 굵은 금테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방에서 올라온 자영업자와 농민들은 옷차림으로 걱정을 했다.
우리 옷차림이 너무 초라한 건 아닌지, 높으신 분들 많이 올 텐데 없어 보이는 건 아닌지.
하지만 그런 걱정 따위, 가볍게 씹어 먹는 패션이었다.
정말 그들은 이 순간 그런 생각이 더 이상 전혀 들지 않았다.
"허미야, 회장님, 옷차림새가 왜 이런대요?"
"이렇게 입고 다니면 촌에서도 촌스럽다고 그래요. 아니, 이런 중요한 행사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입으시면……."
"강남 졸부라는 제 정체성을 잊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 주는 패션이죠. 눈에 잘 띄니까 참석자분들이 절 쉽게 찾을 수도 있을 테고요."
"그, 그냥 차라리 흰색이나 그런걸 입으시지 그럼……."
"이 정도는 되어야 눈에 잘 띄죠. 아무튼 다들 잘 오셨습니다."
"……."
"……."
아무렇지 않은 모습에 괜히 숙연해졌다.
하수영이 자신들을 창피해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던 마음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 우리 농민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
'벼락부자이긴 해도 졸부 근성 같은 것은 전혀 없으시다고.'
'농민회장님이 저렇게 튀게 입어주시니 이제 옷차림이 부담스럽지가 않네.'
'어쩜, 스스로 강남 졸부라고 저렇게 자신감 넘치게 말씀하시는 거 좀 봐.'
***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 치킨 등 자영업자 수는 그래도 대략 수백 명 정도는 되었다.
구의회에서는 현직 기초의원들이 전원 참석했다.
옆동네 구의회에서도 대부분의 기초의원들이 찾아왔다.
시의회에서도 강남구를 지역구로 하는 시의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박청단, 온시연, 구임춘 국회의원도 찾아왔다.
셋 모두 강남을 지역구로 하는 중앙정치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수영의 오른팔로 알려진 박조휘를 중심으로 모인 구의원들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역시 하수영 의원님이십니다. 제 광경을 보고 구의원 출판기념행사라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어요?"
"구의원이 이런 행사를 여는 것부터가 다른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자기 호텔에서 여는 출판기념행사……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그들은 행사 직원들처럼 행동했다.
하수영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분위기를 샅샅이 살피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참가자들의 명단도 면밀히 확인했다.
"라테그룹에서는 김진명 부사장이 왔군요."
"오너 일가는 한 명도 안 왔네요."
김진명은 오너 일가와 피 한 방울안 섞인, 월급사장이었다.
"청담 라테마트부지도 팔고, 수영레스토랑이 라테백화점에도 입점하면서 화해한 줄 알았는데."
"장손이 불구가 된 게 의원님과 얽혀 있죠. 그 원한이 쉽게 풀어지지 않나 봅니다."
"정확히는 그 장손이라는 어린 친구가 술 취해서 의원님 차량에 들이 박고 지 혼자 불구가 된 거지."
"수영병원 요양시설 입원이 거절된 것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는 말을 들은 거 같습니다."
라테그룹과 하수영의 관계.
세간에서 호기심을 품고 바라보는 구도다.
라테그룹은 하수영과 얽히면서 이런저런 손해를 크게 봤지만, 그래도 몇몇 사업에서는 또 얽혀 있는 사이다.
출판기념행사에 오너 일가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게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임탁정 검사님 오셨습니다."
"음, 가서 인사해야겠어요."
혼자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띈다.
박조휘가 인사하러 간 사이, 남은 구의원들끼리 수군거렸다.
"라테그룹 딸을 마약범죄로 골로 보낸 게 임탁정 검사고, 임 검사가 우리 의원님하고 친분이 있으니까……."
"라테입장에서는 그게 결정적 트리거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진선주는 대한민국에서 멀쩡히 얼굴 들고 다니기는 글렀지. 쇼핑 같은 것도 함부로 못 한다는데. 창피해서."
"왜 해외로 나가지 않고?"
"진철진 회장이 절대 서울을 벗어나지 말고 자기 눈 안에 있으라고 엄명했답니다. 한국 벗어나면 또 마약 사고 친다고 24시간 감시한대요."
"50줄에 접어든 딸 때문에 진 회장도 마음고생이 심하겠어요."
한국에서는 얼굴, 이름, 범죄 내역이 다 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그런데 서울을 벗어나지도 못한다.
진세주는 아마 하루하루가 감옥살이 같을 것이다.
"농협 사람들입니다."
"김산 회장이 직접 왔군요. 아, 저기 농협은행장도 있어요."
"S은행장 모습도 보이네요. 이제 슬슬 거물들이 들어오나 봅니다."
"JS그룹 허재우 부회장입니다! 현총수 친동생이 직접 오다니."
"JS그룹은 수영그룹하고 제휴해서 이득 본 게 엄청나니까요. 정유에, 건설에, 중공업에, 어휴. 제가 회장이었으면 어떻게든 가족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을 겁니다."
"후원회 어르신들도 오셨습니다."
"매일 소탈하게 입고 다니시는 분들이 격식 있는 복장 갖추시니까 신수가 다르네요."
수백 명이 넘어가는 하수영후원회 회원들이 로비에 들어섰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2인승슈퍼카 조수석에서 내리고 있었다.
수백 대가 넘어가는 다양한 색상의 슈퍼카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모습이 장관이다.
후원회장이 구의원들을 알아보고 환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의원님들도 여기 있었군요. 반가워요."
"영광입니다, 회장님."
"우리 하 의원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조금 전까지 로비에 계셨는데……. 아, 지금 3번 그랜드볼룸에 있으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테그룹은 진짜 회장 일가는 전혀 안 왔나 봅니다."
"……."
"그렇게 속 좁게 회사를 운영하니 사업이 잘될 리가 있나. 저러다가 조만간 제과 시장도 죄다 털털 털리겠지. 쯧쯧."
후원회 노인들은 혀를 차며 하수영을 찾으러 로비를 벗어났다.
실비아컴퍼니 총수 박덕준, 대표이사 오철현의 모습도 보였다.
감탄이 나오는 사회적 거물 인사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내며, 구의원들의 가슴에도 뿌듯한 자부심이 새겨졌다.
이런 행사의 주인공이 자신들의 현직 동료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응? 단체 손님들?"
"뭐지? 뭐야? 뭐예요?"
대형 관광버스가 줄줄이 호텔 정문앞에 정차하며 승객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딱 봐도 외국 관광객으로 보이는, 40대 이상의 여성들이 활기찬 얼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 일반손님은 안 받는 날 아니었어요?"
"로비 직원들이 그냥 들여보내는데요?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