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68화
142장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 (1)
형원호 보좌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6조 달러가 필요하다니.
6,000조 원, 자그마치 대한민국의 10년 치 국가 예산이 넘는다.
말도 안 되는 숫자다.
형원호는 퍼뜩 생각이 들었다.
'지금 국가를 상대로 블러핑하는 건가?'
자기들 이익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배짱을 부린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이사장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요?"
"이상을 위해 건설적인 논의를 해도 부족할 판에, 무리한 요구를 하시면 안 됩니다. 6조 달러라니요. 대한민국 10년 치 예산이 넘는 돈입니다."
"맞소. 그쯤 될 거요."
"청담 스코프 공급 현실화를 위해서 그런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시겠지."
"의원님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국회나 정부도 설득할 수 없을 테고요.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다."
"무리한 요구라……."
왕세경은 팔짱을 낀 채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숫자를 말했을 뿐이오."
"……."
"그걸 가지고 무리한 요구라고 치부해 버리면, 더 이상 건설적인 논의는 불가능하겠지."
"부이사장님. 제 말은……."
"형 보좌관, 태도가 글러먹었소. 태도가."
순간 형원호는 발끈했다.
지금 중진 의원의 보좌관인 자신을 향해 '태도가 글러먹었다'라고 말을 한 것인가?
"부이사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글쎄, 지나친 건 형 보좌관의 태도 같은데. 그거 아시나? 왕년에는 당 대표도 내 앞에서는 이마가 안보일 만큼 굽실거렸다는 거?"
"예?"
"쯧쯧, 아무리 내가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었다지만……."
형원호 보좌관은 왕세경을 그저 재단 부이사장으로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수영도 아니니 그리 어렵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멋대로 판단한 모양이다.
'당 대표님도 굽실거렸다고?'
형원호의 안색이 변했다.
아무래도 상대는 부이사장 말고 다른 대단한 직함이 있는 모양이었다.
'왕세경? 왕세경?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긴 한데…….'
형원호는 세경그룹 창업주 근황은 잘 몰랐다.
건강 문제로 오래 전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세경그룹 창업주 왕세경이라고 하면 바로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직함은 병원 부이사장일 뿐이었다.
재계 10대 그룹 창업주가 이런 병원에서 부이사장 타이틀 달고 일한다는 생각에 미치기에는, 그의 상상력이 모자랐다.
"됐고, 아무튼 내 차근차근 설명해줄 터이니 글러먹은 태도는 잠시 치워두고 머릿속에 잘 집어넣으시오."
형원호는 움찔했지만, 공격적인 언사에 이번에는 전혀 발끈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청담 스코프를 만드는 데에는 천가지가 넘는 부품들이 필요하오. 그리고 대부분 보급화가 잘 안 된 것들이지. 양산 체제를 갖춘 것들이 거의 없다 이 말이오."
형원호는 여전히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 있지만, 듣고 있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양산 체제를 갖춰야 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서해전자가 최근에 지은 반도체 신공장 같은 걸 수십 개 이상은 지어야 하오."
들어가는 부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그 모든 것을 양산하려고 하면 당연히 공장의 개수도 엄청나게 많아진다.
"이것도 특허를 사오는 게 아니라 라이선스 발급받아서 로열티 주고 생산한다는 전제하에 6조 달러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예 특허를 사오려고 하면 6조달러로는 어림도 없다.
뒤에 0을 하나나 두 개 정도는 더 붙여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가능하다.
그 많은 특허를 무슨 재주로 다 산단 말인가?
생산할 때마다 로열티 지불하는 게 낫지.
"그리고 공장 짓고 설비라인만 깔면 끝인가? 관리하는 인력이 있어야 할 거 아니겠소? 몇천 명 정도로는 어림도 없소. 복합산업단지 하나를 새로 통째로 짓는 스케일이니까."
한국에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초대형 산업단지 규모가 될 것이다.
"경제는 까막눈인 듯하지만, 그래도 규모의 경제라는 말은 아시겠지?"
"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형원호는 여전히 끊임없이 생각했다.
대체 왕세경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더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투입 규모가 커질수록 생산단가가 싸진다 이 소리요. 1,520억짜리를 1/1000 미만으로 떨어뜨리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기초자본이 투입되어야 할지 상상이나 되시오?"
"그게 6조 달러라는 말씀……?"
"그렇지."
"……."
"이것도 지금은 예상 불가능한 변수 같은 것들은 제외하고 계산기 두드린 거요. 근데 그거 아시나? 사업이라는 것은 꼭 하다 보면 추가로 돈이 더 들어갈 일만 생긴다는 거?"
왕세경은 팔짱을 낀 채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내친김에 조건은 다 듣고 가시오. 10년간 6조 달러, 원화는 안 되오. 거의 다 해외에서 돈 주고 사와야 해서 처음부터 달러로 계산해야 합니다."
원화는 필요 없으니 정부가 달러로 마련해서 가져오라, 이 말이었다.
"지분은 50:50."
생각보다 지분 비율은 나쁘지 않았다.
모시는 국회의원도 정부와 재단 간의 지분 비율을 놓고 고심했었는데.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정부 지분은 전부 의결권 없는 주식으로 지급하겠소."
"아니,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선배당주로 전부 지급하겠다니요!"
우선배당주.
보통주보다 배당에서 우선권을 갖지만, 대신에 의결권은 갖지 못한다.
"그리고 배당 우선 비율은…… 그냥 통 크게 0.001%로 합시다."
"예?"
"보통주가 1조 원 배당받을 때, 그보다 천만 원 더 받을 수 있다 이 말이오."
이래서야 말이 우선배당주지, 그냥 보통주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아니면 6조 달러를 30년 만기상환으로 빌려주되 무이자로 하는 것은 어떻소?"
"그, 그런……."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의 안과명의 국이 되기 위한 투자요. 완벽한 눈질환 치료 신기술을 전면 도입하고 주도하는 국가가 되는 건데, 이 정도 투자는 하셔야지."
"……"
그것은 상의가 아니라 통보였다.
우리 조건은 이러니까, 받든지 말든지 그 다음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저어, 협상의 여지는……."
"없소."
"……."
"자, 여의도로 돌아가서 형 보좌관이 모시는 의원한테 제대로 전달하시오."
반쯤 축객령을 맞은 형원호는 멍한 정신을 안은 채 여의도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의원님이 그를 찾는다는 연락이 내려왔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의원님, 다녀왔습니다."
"표정이 안 좋군. 하수영 이사장이 타박이라도 하던가?"
"아닙니다. 하수영 이사장 대신 부이사장이라는 사람과 이야기했습니다."
"부이사장?"
박달수 의원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담수영병원에 부이사장이 취임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취임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합니다. 취임 절차도 조용히 진행해서, 병원 직원들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답니다."
"부이사장이라면 하수영 이사장이 믿고 병원을 맡기는 인물쯤 되겠군. 이름이 어떻게 되던가?"
"왕세경이라고 했습니다."
"왕세경 회장님이라고!"
박달수 의원은 눈을 홉뜬 채 외쳤다.
형원호 보좌관은 당황해서 반문했다.
"잘 아시는 분입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세경그룹 창업주가 바로 왕세경 회장님이잖은가!"
"예? 그분이 세경그룹 창업주라고요?"
형원호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어쩐지 어디서 들었다 싶은 이름이라니… 세경그룹 창업주였다고?'
"병원 VIP 환자로 장기입원 중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부이사장이 되셨군. 병원에 상시 머무르시니까 믿고 병원 운영을 맡겼다는 건가. 과연……."
형원호의 안색은 이미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사람 앞에서 건방을 떨었으니.
하지만 박달수 앞에서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정치 인생은 끝이다.
나중에 조용히 찾아가서 머리를 박고 용서를 구하든 해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 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그, 그게……."
형원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이 들은 조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전부 듣고 난 박달수 의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터무니없는 금액이군."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유가 터무니없다는 것은 아니야. 그 많은 부품들을 양산할 산업단지를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라면…… 납득이 가지."
들어가는 모든 부품들을 양산할 공장을 하나하나 전부 지어야 한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0이 복수로 붙어서 당황하긴 했지만, 이유 자체는 납득이 갔다.
"이건 우리나라가 건드릴 수 없는 아이템이군."
"역시 그렇겠지요?"
"일 년 예산이 500조 원이 겨우 넘는 수준인데, 10년 동안 6,000조원을 한 사업에 어떻게 쏟아붓겠나. 그러고 싶어도 그럴 돈이 없네."
투자만 하면 성공이 확실시되는 아이템이 있다.
그런데 연간 총수입의 10배가 넘는 돈을 가져오란다.
"자네 연수입이 5,000만 원인가?"
"그 정도쯤 됩니다."
"생활비 쓰고 대출금 갚고 자식들 학비 대다 보면 남는 거 하나 없지?"
"예, 그렇습니다만……."
"나중에 폭등할 게 확실시되는 사업에 5억 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야, 할 수 있겠어?"
"못 합니다. 돈이 전혀 없는데요. 어디서 끌어올 데도 없고요."
"어쩔 수 없군. 접을 수밖에."
청담 스코프 공급 사업에 그렇게 몰두하던 양반이 미련 없이 털어내자, 형원호는 의아했다.
그의 시선을 느끼고 박달수는 피식 웃었다.
"왕세경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끝인 거야. 협상의 여지는 없네. 무조건 10년 동안 6조 달러 쏟아부어야 해."
"그렇게 단호하신 분이었습니까."
"맨주먹으로 그 큰 재벌 기업을 일궈내신 분인데, 그럼 호락호락할까.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됐다지만 돈 문제만큼은 칼 같으시지."
정부에서도 기웃거리며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돈 이야기를 들으면 기겁을 할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관련 부품 회사들이 언젠가는 생산단가를 떨어뜨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럼 여의도와 행정부 앞에서 죽치고 있는 실명 환자와 가족들은 어떻게……."
"돈이 없는데 어쩔 도리가 있나? 무기한 중지되는 거지."
청담 스코프를 대대적으로 보급하면 국가 위상과 경쟁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맞다.
분명히 큰 성공을 할 게 눈에 보이는데, 거기에 뛰어들 시드머니가 없다.
"일단 당 회의에도 보고를 올리고……."
그때였다.
어린 보좌관이 급히 뛰어 들어오며 태블릿을 보여 주었다.
"의원님! 기사 떴습니다!"
"무슨 기사?"
"우리 당이 청담 스코프 사업에 6조 달러를 쏟아붓는 특별법안 상정을 결심했다는 내용입니다!"
"뭐라고?"
박달수 의원 선에서 포기하기로 했는데,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급히 기사를 확인하는 박달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사는 한두 군데만 올라온 게 아니었다.
이미 대형 포탈은 물론이고 각종 SNS도 휩쓸고 있었다.
인터넷 여론만 보면 청담 스코프사업이 이미 확정된 듯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