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56화
139장 협회는 즐거워(3)
중개사협회장에 대한 성토가 시작되었다.
뒷담이라기보다는 분노와 실망, 체념이 섞인 넋두리에 가까웠다.
"벌써 협회장 해 먹은 게 10년을 넘게 해 먹었어."
"에이, 10년이 뭡니까? 15년은 됐죠."
"15년? 벌써 그렇게 됐나, 배 사장?"
"협회장이 매달 따로 챙기는 돈만 적어도 1,500만 원은 될 겁니다."
"더 될 수도 있지. 정부지원금이니 외부 후원금이니 뭐니 해서 이것저것 빼먹는 게 어디 한둘이야?"
"진짜 최근 10년 회계 내역 싹 다 뒤져서 전수조사 해야 합니다."
"제대로 남아 있기나 하겠어?"
"그러면서 회원들을 위해서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죠."
"내 말이. 수수료 강제 인하한다는데 뭐 목소리를 내기를 하나, 변호사들이 살금살금 우리 영역 침범하는데 믿음직하게 막아주기나 하나."
"협회는 그냥 협회장 노후연금 은행으로 전락한 지 오래됐어요. 이대로는 답이 없습니다."
봇물 터진 것처럼 장백철과 배수홍은 주거니 받거니 협회장 뒷담을 해댔다.
우형신은 하수영 앞이다 보니 무척 난감해했으나,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뭐예요, 그냥 대한민국의 흔한 협회였군요?"
한참 성토하던 두 중개사는 그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맞아. 맞네. 대한민국의 흔한 협회지."
"진짜 우리나라 협회 중에서 양궁말고 제대로 된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왜, 임대인협회도 꽤 괜찮잖아?"
"거기는 이름만 협회지 그냥 친목동호회라서 그렇습니다."
하수영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맞아요. 꽤 기대했는데 그래서 조금 실망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흔한 협회가 아니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좀 자극적인 걸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사극 드라마 평론만 하시더라고요."
그때 배수홍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저기 저 검은 옷 입은 대머리가 바로 중개사협회장입니다. 얼굴에 욕심 살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하수영은 고개를 돌렸다.
과연 검은 정장을 입은, 넉넉하다 못해 초과한 풍채를 지닌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백철이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표정 심각한 거 보니 또 어디에서 돈 빼먹을 궁리만 하고 있나 보군."
"수수료율은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변호사들까지 시장 침범하는 것은 협회 차원에서 어떻게든 막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때 하수영은 우형신이 작게 눈짓하는 것을 보고 일어섰다.
"야외 테라스에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아, 제가 안내하겠……."
"괜찮습니다. 혼자 다녀올게요."
연회장을 나선 하수영은 테라스로 향했다.
잠시 후 조용히 따라 나온 우형신이 옆에 서며 쓰게 웃었다.
"부끄러운 모습 보여서 민망합니다."
"뭘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근데 협회장 선거 나가시나요?"
"저 양반들도 말만 그러는 겁니다. 저도 협회장 같은 거 생각 없고요. 그냥 협회장한테 찍히지 않으려고 출석체크 정도만 하는 겁니다."
"흐음."
"좋은 중개사도 많지만, 사실 자질 안 된 중개사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협회장을 탓하고 다닙니다."
"그래요?"
"아는 게 없어서 중개 거래 대충하거나, 중개 사고 내고 나 몰라라하거나, 수수료 받을 욕심만 가득찬 중개사들도 많습니다. 협회장만 욕할 거 아니에요. 지금 협회는 전반적으로 썩었습니다."
"별로 하는 거 없이 수수료만 챙긴다고 욕먹는 사람들도 있는 거 같더라고요. 물론 정말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있겠고요."
"살아남을 자격 있는 놈들만 살아남게 되겠죠. 그게 바람직한 거 같고요."
"우 사장님은 동종업자들한테 별로 친근감이 없으신가 봅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저는 그냥 개인사업자죠. 같은 일을 한다고 무조건 편들어주지 않습니다. 제 사무실 잘 굴러가게 운영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우형신은 생수통을 열어 물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할지 그거 생각하는 것만 해도 머리 아픕니다. 협회장이 협회를 망치든 말든 알 바 아니죠. 협회가 제 사업체도 아닌데요."
"그러고 보니 협회에서 당한 게 좀 있으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유, 말도 마십시오. 수영 사장님 소개 좀 해달라고 협회장이 얼마나 사람을 귀찮고 열 받게 하는지……."
"어, 우 사장. 여기 있었는가? 한참 찾아다녔다네."
유쾌한 노인의 목소리가 둘을 돌려 세웠다.
젊은 수행원 둘을 거느린 중개사협회장이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심술 살에 어우러진 웃음은 살이 뒤룩뒤룩 찐 뚱돼지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여기 이분은 누구?"
"위층 임대인협회 참석자이십니다. 제가 예전에 주택을 한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어서 작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오, 그래? 나 김말중이야. 반가워."
"반갑습니다."
우형신은 보았다.
하수영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절대 기분 좋은 게 아니다. 지금 다짜고짜 반말에 열 받으신 게 틀림없어.'
자기소개를 생략한 걸 보면 분명하다.
우형신은 하수영의 존대 습관을 잘 안다.
큰 사업체를 거느린 오너이면서도, 말단 직원 한 명 한 명한테까지 존중을 해준다. 반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건 나이가 젊어서 그런 게 아니라, 몸에 밴 체질이었다.
"임대인협회에서 영업하기 쉽지 않을 거야. 거기는 별로 대단한 양반은 없거든. 영업을 잘하고 싶다면 내 밑으로 들어와."
하수영은 그저 웃기만 했고, 김말중은 그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옷이 그게 뭔가? 그렇게 졸부 흉내 내봤자 사람들 요즘 영악해서 안 넘어가. 샘플 이즈 베스트, 간단한 게 최고다, 그 말도 몰라?"
"심플인데요."
"젊은 친구가 건방지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에잉. 버릇없게시리."
하수영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쪽에 있던 웨이터가 얼른 다가와서 샴페인 잔이 든 쟁반을 내밀었다.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던 김말중은 우형신을 채근했다.
"우 사장, 내가 자리 좀 만들어달라고 그리 말을 했건만,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뺄 건가?"
우형신은 하수영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게…… 의원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라 자연스러운 시간을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아! 자네가 직언을 올려야지! 김말중 회장이라고 옆에 가까이 두고 친해지면 사업적으로, 인간적으로 두고 두고 잘 익은 홍시처럼 좋은 인간이 한 명 있다! 내가 소개해 주겠다! 그 말을 하기가 그렇게 어렵나?"
샴페인을 삼키던 하수영은 순간 뿜었다.
하필 김말중의 어깨에 술이 조금 튀었고, 그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봐, 젊은 친구. 이게 얼마짜린지 알고 지금 실례를 하는 거야!"
"아, 죄송죄송. 웨이터."
하수영이 손짓으로 부르자 웨이터가 다시 부리나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이분 재킷 가져가서 세탁해 드리고, 1층 매장에서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재킷 새 걸로 하나 가져 다 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르주블랑 호텔 1층에는 VIP를 위 한 명품 매장이 몇 개 입주해 있다.
재킷 한 벌이 최소 천만 원부터 시작하는, 진짜 VIP들을 위한 명품매장.
수익이 아니라 VIP 대상으로 홍보와 노출을 위해 입주한 매장들이다.
매년 여기서 협회 파티를 열었던 김말중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뭐지? 왜 저렇게 공손해?'
주문을 하는 것도 몸에 밴 듯이 자연스럽고, 웨이터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다니.
어색한 침묵 속에서 얼마 후 웨이 터가 아예 매장 직원들을 인솔해서 왔다.
이동식 행거를 내려놓고 겉에 씌운 천을 걷어내자, 30여 벌에 달하는 재킷들이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
매장 실장으로 보이는 여성이 김말중을 공손하게 대했다.
김말중은 입이 얼어붙은 채 어어 하면서 에스코트를 따라 재킷을 골랐다.
지금의 차림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재킷을 걸친 김말중의 표정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수영은 팔짱을 낀 채 끄덕였다.
"괜찮네요. 이만 가보세요."
"네, 대표님."
여실장은 공손히 인사한 뒤, 직원들을 데리고 매장으로 돌아갔다.
"배상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더럽혀진 옷은 세탁해서 자택으로 보내드릴 겁니다."
"……이 호텔 VIP이신 거 같은데, 혹시 뭐 하시는 분이신지……."
아까의 하대는 찾아볼 수 없이 예의 바른 어투였다.
"여기 건물, 아니, 호텔이 제 거라서요."
"……흐억!"
"실수로 제 호텔을 찾아주신 고객분께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이것으로 너그럽게 마음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무척 공손한 어투지만 눈빛은 잔잔하다.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김말중은 설명하기 힘든 한기를 느꼈다.
본인이 그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귀한 사람인 줄도 모르고 내가 이놈 저놈 했으니!'
이 호텔의 가치는 7,000억은 될 것이다.
저런 젊은 나이에 이 호텔의 오너라면, 대체 어느 집안 자제일까?
그런 사람 앞에서 자기가 그런 결례를 저질렀으니!
"아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늙어서 눈이 어두워 그만 귀한 분을 몰라보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실수로 옷을 더럽혔으니 당연히 배상하는 게 맞습니다. 부디 SNS에 호텔의 대응이 부적절했다는 말씀은 안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맞습니다. 일반 정장 재킷 더럽혔다고 천만 원이 넘는 명품 정장을 새것으로 줬는데, 이걸 가지고 까면 진상 중의 진상이죠."
우형신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고, 김말중은 기겁했다.
"천만 원? 이 재킷 한 벌에?"
"왜 그러세요. 협회장님도 1층 매장에 어떤 브랜드들이 입주했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거기서 천만 원미만 재킷은 취급도 안 합니다."
"그, 그거야 나도 알지만……."
대체 어느 집안 자제인가, 김말중은 오직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었다.
이십 대 초반 젊은 나이에 수천억짜리 호텔을 받았다면 최소 준재벌급 이상일 텐데.
"죄송합니다. 어떤 분인지 이 못난 늙은이한테 알려주시면 제가 두고두고 오늘의 무례를 잊지 않고 갚을겁니다."
하수영은 우형신한테 조용히 눈짓했다.
말뜻을 알아들은 우형신은 살짝 호흡을 고르고 김말중 옆에 섰다.
"협회장님이 그렇게 만나보고 싶어하셨던 분인데, 그런 결례를 저지르시면 어떡합니까?"
"뭐? 내가 만나보고 싶어 했다니, 난 이분을 오늘 처음 보는……."
"이분이 바로 강남구의회 하수영구의원님이십니다."
순간 김말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수리가 짜릿짜릿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온몸이 녹아내릴 듯이 근육이 흐물거렸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개인 부자라는 청년.
개인 자산으로 치면 재벌 총수 절대 부럽지 않다는 자수성가 자산가.
우형신이 전담 중개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인연을 맺고 싶어했던가.
차마 무턱대고 찾아갔다가 어떻게 눈 밖에 날지 알 수가 없어 먼발치에서 지켜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장소, 이런 순간에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나저나 절 그렇게 만나보고 싶어 하셨다던데, 그 이유 한번 들어 볼 수 있을까요, 협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