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18화
130장 청담 스코프(1)
"서해전자 소식 들으셨습니까?"
정서진은 웨이 창과 유창한 영어로 기분 좋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들었습니다. 래플에서 큰 수주를 받았다고요.
"래플폰 AP(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두뇌 반도체) 칩 생산을 전부 주었다더군요."
-래플 경영진이 속이 쓰리겠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서해를 탈출했는 데, 다시 돌아왔으니.
팹리스인 래플은 오래전부터 AP 생산은 서해전자에 맡겨왔다.
그러나 서해전자가 모바일 시장의 경쟁자가 되면서 힘들게 탈서해 전략에 나섰다.
그리고 TSMC에 위탁생산을 맡김으로써 마침내 탈서해 작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TSMC 공장이 박살 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서해전자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래플이 당연히 서진파운드리에 맡길 줄 알았습니다.
"제안을 받긴 했습니다만, 지금 노는 라인이 없어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래플도 급해서 서해에 일단 준 거 같은데요."
-대단하십니다. 천하의 래플을 기다리게 하시다니.
"크게 내키지도 않았어요. 래플이 '근데 너희가 AP를 잘 만들 수 있을까?'라고 의구심을 품는 눈치라서요."
-그래도 신형 랙북에 들어가는 옵테인 메모리를 만드는 회사인데요.
"나중에 정신 차리면 돌아오겠죠. 어차피 래플은 우리한테 AP 생산을 전부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단가나 수율이 상대가 안 되는데요."
서해전자의 반도체 공장 증설은 독이 든 성배.
지금은 달콤한 첫맛에 취해 있지만, 먹다 보면 돌이킬 수 없이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괜찮지 않습니까? 잠시 정도는 축배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도록 빌어 주지요. 통 크게 성과금도 수천억씩 풀었던데 말입니다."
-본공장 세팅되면 래플의 수주도 바로 받아오실 거죠?
"래플이 찾아와서 싹싹 빌게 만들 겁니다."
-서해전자 파운드리 공장은 금방 또 놀게 되겠군요.
지금 래플의 AP 발주도, 결국은 서해전자에 독으로 돌아올 것이다.
***
프리덤은 한창 청담수영병원 종합제어시스템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342309 동기화 완료. 시스템 이상 없음.]
[97831 동기화 완료, 시스템 이상 없음.]
[2594898 동기화 완료…….]
"프리덤, 잘하고 있지? 이번 행사에 차질 빚으면 안 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문제없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주쇼 이벤트 별로 없어. 망치면 옵테인 메모리 전격 교체는 없는 줄 알아라."
-절대로 망치지 않겠습니다!!
미항공우주국 나사는 얼마 전 발표했다.
며칠 후, 세기의 대우주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육안 관측 가능한 혜성이 지구를 스쳐 지나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혜성은 여태껏 인간이 눈으로 봐왔던 것 중에 가장 크게 보이는 혜성입니다. 세기의 멋진 우주쇼가 될 겁니다.
-관측 시간만 놓치지 않는다면, 지구 어디에서든 이 혜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아쉽게도 남극은 제외입니다.
"절대 놓칠 수 없지."
그래서 하수영도 병원을 위해 대이 벤트를 만들었다.
나사에서 실시간 공개하는 영상 정보를 초고화질로 그대로 받아온다.
(국내 천체관측센터와 연계해서 이용료도 냈다.)
나사가 제공하는 초고화질 영상이 니만큼 당연히 해상도도 엄청나다.
해상도가 거의 50K라고 했으니.
보통 UHD TV의 가로화소가 3,840개. 쉽게 말해 가로 점의 개수가 3,840개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나사 영상은 가로 점의 개수가 약 50,000개에 달한다.
해상도가 자그마치 일반 UHD TV의 170배에 달하는 것이다.
"스크린화면 개폐는 문제없지?"
-네,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빔 프로젝터들은?"
-점검 중인데 전혀 문제 없습니다.
"각도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안 되니까 마지막까지 미세조절 잘해라."
-걱정 마십시오.
그래서 하수영은 가로 길이만 2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흰 스크린을 준비했다.
여기에 170개의 UHD 빔 프로젝터가 각각 분할화면을 영사한다.
170개(17X10)의 분할영역에, 빔프로젝터가 각각 할당받은 구역에 영사하고, 최종적으로 거대한 혜성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
-이 정도는 제게 있어 아주 간단한 영상 처리입니다.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
왕세경 회장이 병원 VIP실에 눌러 산 지도 꽤 되었다.
연간 입원료로 1,000억 원을 내야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값이었으니까.
그 돈을 지불하더라도 현금 자산은 오히려 몇백억씩 불어나고 있었다.
"아버지, 병원 터가 좋아서 그런 거라니요? 너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건 미신이잖아요, 아버지."
하지만 그렇게 나가는 돈이 아까웠는지, 자녀들은 자꾸만 잔소리를 해대곤 했다.
"시끄럽다! 니들 물려받을 돈 줄어드는 게 아까우니 나더러 일찍 죽으라는 거냐, 뭐냐!"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 저희는 미신 같은 것에……."
"이 병원 안에서 난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킨 적이 없다. 아주 몸이 개운해. 난 절대로 병원 밖을 벗어나지 않을 테니, 너희도 그리 알아라."
"그럼 입원료만이라도 다시 협상을…… 천억은 너무 터무니없지 않아요?"
"그런 돈이라도 내야지 나 같은 나이롱환자를 받아주지, 지금 이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줄을 서 있는지 알기나 해!"
오늘도 왕세경 회장은 쩌렁쩌렁 호통을 쳐서 자녀들을 쫓아냈다.
"회장님, 자식분들에게 너무 그렇게 다그치지 마세요. 다들 너무 서운해하시겠어요."
옆에서 20대 중반의 남자 환자, 서준식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얼마 전에 옆 VIP실에 입원한 환자로, 왕세경 회장과는 제법 친해진 사이다.
"아니야. 저놈들은 내 그늘 아래서 일평생 손쉽게만 살았어. 혼 좀 나 봐야 해."
"그래도 조금만 살살하세요."
손주뻘인 그와 나이를 초월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서준식이 매우 영특하고 심성이 남다른 것도 있지만, 바로 그가 같은 중증심부전증 환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심장은, 요즘 좀 괜찮은가?"
"예, 괜찮은 거 같습니다."
"빨리 심장 이식을 받아야 할 텐데, 허어, 언제 기증자가 나오려나……."
"기증자가 나오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건 저 살자고 누군가가 죽기를 비는 거잖아요."
"……아, 그게 그렇게 되는군."
"그냥 평생 지금처럼만 발작을 안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삶에 대한 집착이 엄청날 텐데, 서준식은 매우 초탈해 보였다.
왕세경은 그런 점이 더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 오래 산 자신도 조금이라도 더 살자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로.
'참 아까운 친구야. 눈만이라도 좀 어떻게 괜찮았으면…….'
왕세경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점은, 바로 서준식이 시각장애자라는 점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나온 그 순간부터 이미 안구기형이었기 때문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저렇게 젊은 친구에게 어떻게 저런 시련을 연달아서…….'
"그런데 회장님, 오늘 병원에서 혜성쇼 상영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랬지. 나도 이따가 보러 가려고, 자네도 같…… 아닐세. 미안하군."
"아뇨.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보진 못해도 소리로 분위기는 느낄수 있으니까요."
왕세경은 멋쩍어하며 말했다.
"알았네. 내가 옆에서 세세하게 설명해 주지. 화면이 아주 밝아서 잘 보일 거라고 하더군."
"전 밝다는 게 뭔지 모릅니다."
"아, 그렇지. 자네는 항상 어둠 속에서만……."
"하하, 어둡다는 게 뭔지도 몰라요."
"……."
"본다는 거 자체가 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지팡이 없이 부딪치지 않고 잘 돌아다니는지, 더듬지 않고 물건을 정확히 잡는 건지, 잘 상상이 안 되거든요."
서준식은 어둠 속에 살지만, 정작 어둠이 뭔지 모른다.
빛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그 반대인 어둠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다, 라는 것은 그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자네, 수학 올림픽인가 거기에서 우승했다고 했었지?"
"올림피아드입니다."
"아무튼. 병 다 나으면 나중에 꼭 노벨 수학상 타게! 우리 회사에서 열심히 후원해 줄 테니까 낫기만 하라고."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런, 이제 슬슬 내려갈 준비를 해야겠군. 내가 휠체어 밀어줄까?"
"자율주행 휠체어라서 괜찮아요. 병원 컴퓨터에서 통제한다고 하더라고요."
서준식은 노벨 수학상은 없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
가로길이 25미터의 대형 흰색 스크린,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은 환자와 보호자들은 마치 극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170개의 빔 프로젝터는 나사의 사전방송 및 설명을 문제없이 영사하고 있었다.
프리덤이 실시간으로 완벽한 한글자막까지 입혀준 덕에, 아무 불편함없이 나사의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이번 혜성이 발견된 게 일주일도안 됐다는 게 정말입니까?
-네, 정말입니다. 사실 태양계를 떠도는 모든 소행성이나 혜성을 전부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빛을 내지 않는 천체를 관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발견 일주일도 안 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니,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했겠습니다.
-하하, 맞습니다. 사실 최초 계산에서는 지구에 충돌한다는 결과가 나와서 나사가 발칵 뒤집어졌었어요.
-저런. 정말인가요?
-안심하십시오. 2차, 3차, 4차 궤도 계산을 거듭한 결과, 혜성은 지구를 충돌하지 않고 안전하게 비껴지나갑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최초 궤도에서는 어디에 충돌한다고 나왔나요?
-미국은 아니지만, 모 강대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얼마나 놀랐는데요.
-정말 놀랐겠습니다. 곧 혜성이 보일 텐데요. 관람에 참고할 포인트가 있을까요?
-이번 우주쇼를 위해 나사는 우주 망원경과 위성, 지상 망원경 등 다수의 장비를 총동원했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거군요.
-그리고 360도 VR모드도 있습니다. VR기기가 있으신 시청자는 우주에 둥둥 뜬 채 혜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자체적으로 관측 정보를 합성해서 만들어낸 영상이지 만요.
하수영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야, 프리덤. 그럼 우리도 돔형 스크린을 준비했어야지. 최소한 180도 반구체 모드는 가능했을 거 아니야?"
-나사가 3시간 전에 깜짝 발표한 거라서 바로 적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망할 나사 놈들 같으니. 하여간에 깜짝쇼는 엄청 좋아해요."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 지금 바로 세기의 우주쇼를 즐기십시오!
"어! 혜성이다!"
"우와, 혜성이야!"
바로 그 순간, 50K에 달하는 초고 해상도 화면에 거대한 혜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구 대기권에 근접한 혜성은 붉게 타오르며 강렬한 빛의 꼬리를 내뿜었다.
벌써부터 쌍안경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관람객도 있었다.
왕세경도 크고 선명한 혜성의 모습을 보며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정말 대단하이! 준식이, 지금 엄청나게 큰 혜성이 보이고 있……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왜 화면이 안 나와?"
갑자기 화면이 먹통이 되었다.
프리덤은 혼란에 빠졌다.
-망할 장비 같으니! 대체 어디에서 오류가 난 거지? 내 옵테인! 내 옵테인! 으아아아!
-무선 네트워크 오류.
-빔 프로젝터 170개, 들어오는 신호 없음.
-송출장치, 여전히 신호 발신 중.
-뭐냐! 지금 무선 신호가 어디로 송신되고 있는 거냐!
서준식은 주먹을 꽉 쥔 채, 식은땀을 흘리며 굳어 있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갑자기 변했다.
붉게 타오르는 머리와 길게 늘어진 꼬리를 흩날리며 날아가는, 거대한 물체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림에 따라 풍경도 변한다.
파랗게 빛나는 거대한 구체가 보인다.
희고 커다란 구름이 유영하는, 금방이라도 역동적인 호흡을 쏟아낼 거 같은 거대한 구체.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저게 바로 지구… 내가, 아니 우리가 태어난 곳…… 그렇구나…….'
-재부팅 완료, 신호 전달 정상.
"아, 이제 잘 나오네. 휴, 다행이다."
팍!
모든 것이 지워지고, 다시 어둠이 돌아왔다.
어둠이면서도 어둠인지도 몰랐던 지난 나날.
이것이 바로 어둠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상실한 채 살아왔는지 비로소 깨달은 그는, 아픈 심장에서 솟구치는 오열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