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16화
129장 카르텔이 별거냐? (7)
컨테이너가 너무 많다.
정서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점점 불어나는 컨테이너의 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토지 침범에 대해서는 결국 토지 소유자에게 임대료를 내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컨테이너를 완전히 치우는 날까지 매일 평당 얼마씩 임대료를 주기로한 것이다.
"근데 이게 도청까지 나설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민원인이 시에 민원을 넣었다가는 안 될 것 같아서 처음부터 도청에 민원을 넣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야?"
-서진파운드리의 규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민간인으로서는 상대하기 부담스러울 겁니다.
"아, 그렇군."
시간은 벌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반도체 생산 물량은 어마어마하지만, 그 완성된 반도체로 다시 그래픽카드 완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좋은 교훈을 얻은 겁니다. 앞으로는 완제품 가공 의뢰는 받지 않으면 되겠습니다.
"이게 쉬운 줄 알았는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구나."
-TSMC가 괜히 파운드리 시장을 꽉 잡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고객이 원하면 원스톱 서비스로 뭐든지 만들어준 덕분이죠.
"인정해. 내가 우습게 봤어."
보통 파운드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패키징을 생략하고 웨이퍼(반도체 회로가 찍혀 있는 둥근 금속판, 이것을 자르면 흔히 아는 네모난 반도체 수백 개가 나온다)까지만 만들어서 발주사에 공급하는 것.
다른 하나는 패키징(웨이퍼를 잘라서 표면 가공 등까지 다 마무리하는 것)까지 작업을 해서 공급하는 것.
패키징이 끝난 반도체는 안정성과 품질 테스트를 마치면 비로소 상품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초기 TSMC는 웨이퍼 형태로만 공급을 했다.
그러다가 패키징과 품질 테스트까지 다 끝낸 반도체 부품 공급 서비스도 추가했다.
근래에는 그렇게 만든 부품을 가지고 완제품까지 만들어주는(예 : 메모리카드, SSD, 그래픽카드 완제품등) 원스톱 서비스까지 추가했다.
-완제품 제조에서 도매처 직배송까지 이르는 원스톱 서비스는 TSMC가 가장 잘 구축했습니다.
"설계도만 주면 소비자 최종 포장까지 다 처리해 준다는 게…… 위탁생산의 로망이긴 한데 신경 써야 할게 보통이 아니네."
-우리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창고부지를 확보하고 로봇을 지금보다 최소 50배 이상으로 늘리면 됩니다.
TSMC는 발주사가 원하면 소비자 포장까지 마쳐서 지정한 물류창고로 바로 보내준다.
물론 추가 비용은 그만큼 들어가지만,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팹리스들이 애용하는 서비스다.
"TSMC가 ADM의 의뢰를 받았으면 충분히 해냈겠지?"
-그러나 TSMC가 건재했으면 ADM이 그런 의뢰를 할 일이 없었죠. 그래픽카드 완제품은 대만의 다른 메인보드 회사들이 만드니까요.
"지금 우리 수준은 딱 반도체까지만 가능한 수준인가……."
요식업으로 치면, TSMC는 음식을 완벽하게 포장해서 지연이나 배송사고 없이 주문 장소까지 안정적인 배송이 가능하다.
반면 서진파운드리는 포장 배송은 무리고, 조리까지만 잘하는 수준.
물론 조리 비용, 조리 시간, 맛 자체는 TSMC가 절대로 따라잡지 못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반도체 생산까지만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ADM의 완제품 제조 의뢰는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는데."
슈퍼 을이다 보니, 이미 협의를 한 사안도 부담 없이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것이다.
정서진은 반도체 위탁생산이라는 것에만 순수하게 집중하기로 했다.
'요리사가 요리만 잘하면 됐지, 배달 오토바이까지 볼 필요가 있나.'
-재위탁을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응? 재위탁?"
-우리는 반도체까지만 만들고, 그것으로 완제품을 가공하는 것은 다른 업체에 재위탁을 주는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전에도 ADM 같은 곳은 TSMC에서 웨이 퍼만 받아서 따로 패키징하고, 그래픽카드는 또 대만의 다른 회사들이 잘만 만들었었는데?"
-그것은 그래픽카드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여러 다양한 곳에서 공급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서진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길게 보십시오. 결국 그래픽카드에 들어가는 모든 반도체칩은 우리가 생산하게 될 겁니다. ADM 입장에선 그걸 받아서 다른 곳에서 가공하고, 또 완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번거로울 수 있겠죠.
"한 업체에서 반도체부터 완제품까지 전부 찍어낼 수만 있다면……."
-물론 ADM 입장에서는 다양한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이 경쟁하는 체제가 좋습니다. 하지만 원스톱 서비스가 보험으로 있는 것은 더 좋습니다.
"가상화폐 사태처럼 물량 부족 대란 같은 것은 잘 대비할 수 있겠구나. 좋은 보험이 되겠어."
-마침 우리가 일을 맡길 만한 좋은 회사가 있습니다.
"TSMC?"
그렇게 해서 정서진은 TSMC 웨이 창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
같이 일하자는 말에 웨이 창은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한국으로 날아왔다.
"우리 공장을 확인하셔야 그 다음 이야기를 오해 없이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서진파운드리는 경영진만을 위한 전세기를 보내주었다.
다른 손님과 일절 섞이지 않고 전 세기를 편히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길고 검은 리무진 5대가 TSMC 경영진을 맞이했다.
리무진 옆에 대기하던 호텔 버틀러들이 경영진의 짐을 받아주었다.
숙소는 하룻밤에 천만 원이 넘어간다는 호텔 최고급 스위트룸이었다.
6개의 침실과 회의실, 응접실, 식당과 서재까지 갖춰진.
덕분에 웨이 창 사장 일행은 한껏 만족해서 짐을 풀고, 경기도로 향할 수 있었다.
공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물론 리무진을 이용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서진파운드리의 대표이사, 정서진입니다."
"TSMC 사장 웨이 창입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웨이 창은 컨테이너산을 흘끔 바라봤다.
노련한 사업가답게 그는 현재 서진 파운드리의 사정을 꿰뚫어 봤다.
'일감은 정말 쌓여 있군. 그런데 제품 출하 속도가 생각보다 더딘가? 나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게 더 많아.'
"다른 임원이나 직원들은 어디 계십니까?"
"서진파운드리는 저 혼자입니다. 저 외에 다른 직원은 없습니다."
TSMC 경영진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 거대한 회사가 직원 한 명 없이 혼자서 돌아간다고요?"
"네, 완전한 무인화 시스템을 적용한 공장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서류작업이야 뭐,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고 있고요."
"허어……."
이렇게 대단한 천재였으니까 100억 달러나 되는 묻지마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던 거구나!
라고 경영진은 단단히 큰 오해를 했다.
동시에 서진파운드리에 대한 경이 로움과 위축감이 동시에 들었다.
"안내하겠습니다."
공장 안에 들어서자, 그들은 충격에 빠졌다.
수많은 인간형 로봇들이 질서 있게 오고 가며 생산시설들을 관리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까지 건넸다.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로봇 공장의 모습.
반도체 공장은 인간 직원이 매우 적은 편이긴 하지만,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순 없다.
'마치 미래의 공장에 온 것 같군.'
"프라임건설에서 반도체공장을 서해전자에 넘겨서 낙심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 공장 인수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공장은 독이 든 성배입니다. 서해전자는 공장 때문에 훗날 큰 낭패를 볼 겁니다."
"공장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공장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주 훌륭한 공장이죠."
정서진은 미리 짜둔 각본을 준비했다.
"이 공장은 시범공장입니다. 본공장은 아직 한창 짓는 중이죠."
"들었습니다."
"이 시범공장 생산량이, 200㎜ 웨이퍼로 치면 월 100만 장쯤 될 겁니다."
순간 TSMC 경영진은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시범공장만 쳐도,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 5위를 거뜬히 차지하는 수준 아닌가?
'일부러 한참 줄여 말했는데도 저리 놀라네.'
"본공장이 완성되면 월 생산량은 1,000만 장은 가뿐히 넘을 겁니다. 어쩌면 1,500만 장 이상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공장 규모로, 그만한 생산량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우리의 반도체 공정라인은 획기적인 개선을 이뤄냈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특허도 내지 않았습니다."
"……."
"그 새 공장이 왜 독이 든 성배라는지, 이제 이해하셨을 겁니다."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졌다.
도저히 파운드리 산업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상대는 생산 비용은 물론이고 품질 안정성에서도 이미 최고의 수준을 갖췄다.
단 한 개의 불량품 없이, 심지어 모든 제품이 이론상 최대치의 성능을 내는 최상등품이었으니.
가격, 품질, 안정성, 성능, 생산력, 속도.
"한 가지 더, 우리 공장은 일반 반도체 공장에 비해 배출하는 오염물질이 1/100 수준입니다."
"1/100이라고요!"
"네, 덕분에 환경오염과 암 환자 발생률을 비약적으로 낮출 수 있죠. 아, 무인공장이라서 암 환자가 나올 일은 없지만요."
웨이 창은 팽팽하게 머리를 굴렸다.
배출하는 오염 물질이 1/100 수준이라니.
만약 유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반도체업체에도 같은 수준의 청정도를 요구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의 반의반만 사실이어도, 서진파운드리 말고 다른 파운드리는 다 죽겠구나…….'
PC 등 직접 완제품을 만들어서 유통까지 하는 종합반도체회사 말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반도체 회사가 있을까?
"미스터 정의 말씀대로라면, 파운 드리 산업은 이제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경쟁 구도가 개편이 된 거죠."
"……그 공장이 독이 든 성배라는 말,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300억달러를 내고 샀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프라임건설에 넌지시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기왕이면 TSMC보다는 서해전자에 넘기라고 말이지요."
"왜죠? 같은 한국 회사 아닙니까?"
"국적이 같다고 다 사이좋게 으쌰으쌰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웨이 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흘렸다.
"서해전자가 귀사에 제대로 밉보인게 있나 보군요."
"우리 서진파운드리는 탄생부터 서해전자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지요."
"으음…… 궁금하지만 다음에 듣겠습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가 많으니."
웨이 창은 단순히 정서진이 서해전자와 원한이 있구나 하고만 생각했다.
오너, 하수영하고 얽힌 갈등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저는 반도체 파운드리를 넘어서, 귀사의 완제품 원스톱 서비스를 구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래픽카드부터 이미 막혔습니다."
"아아, 알 것 같습니다."
웨이 창은 컨테이너가 쌓여 있던 원인을 완전히 깨달았다.
"반도체 생산에만 치중할 생각이지만, 원스톱 서비스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귀사와 손을 잡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하청을 주겠다는 것이로군요."
"귀사가 수십 년간 경험을 축적하며 쌓아온 서비스 관리능력, 그것이 필요합니다."
웨이 창은 쓴웃음을 지었다.
TSMC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실리 콘 웨이퍼 생산.
가공된 반도체로 완제품까지 만들어 물류배송까지 해주는 원스톱 서비스는 어디까지나 부업.
그런데 이제 본업은 잃고, 부업이 새로운 본업이 되게 생겼다.
'어차피 주력 공장은 죄다 부서졌으니…… 보험금은 충분히 받았으니 그걸로 새로 일어서면 되겠군.'
업종이 미묘하게 바뀌고, 회사 매출과 이익이 비약적으로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회사를 계속 유지할 수는 있다.
"귀중한 제안을 해주셔서 고맙소. 우리도 함께하리다."
"감사합니다."
"파운드리 산업의 황제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그럼 오신 김에 가실 때 저 컨테이너들부터 빨리 처리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