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04화
126장 유통과 농사 사이(6)
"과장님, 지금 과장님 행동은 누가 봐도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히는 겁니다. 그만두십시오.
이서환 계장이 타이르듯이 조곤조곤 말하자 범대협 과장의 얼굴이 화가 나서 시뻘겋게 변했다.
"너, 너 이 자식…! 지금 그걸 말이라고……!"
"과장님! 참으세요!"
"네네! 참으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 계장! 자네도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직속상사한테 그렇게 눈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할 말 다하는 게 어딨나?"
보다 못한 주변에서 말리고 나섰다.
목소리가 너무 커지니까 안 되겠다.
싶은 것이다.
'저러다가 과장님이 계장님 한 대칠 거 같은데?'
'야, 빨리 말려 봐!"
직원들은 그런 눈빛을 교환하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범대협 과장은 이를 바드득 갈면서 이서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서환의 표정은 평온했다.
"사과는 못 하겠습니다. 그 점은 죄송합니다."
사과는 못 하겠으니 죄송하다?
범대협은 그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짜증을 느꼈다.
"야! 이서환이! 너 요즘 시장님이 몇 번 불러준다고 뭐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인데! 시장님이 늘 저 자리에 계실 줄 알아!"
"애초에 제가 시장님 총애받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제가 잘못한건 없으니 사과는 못 하겠습니다. 이만 업무 보러 가보겠습니다. 오늘 외근이 있어서요."
이서환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서류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대협이 손을 뻗어 어깨를 잡으려고 했으나, 동료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다.
사무실 밖까지 따라 나온 동료가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계장, 자네 오늘 갑자기 왜 이래? 범 과장님한테 왜 그렇게 아득바득 대드는 거야?"
"시장님 총애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 마라. 그냥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이 계장?"
"속이 뒤집히는 욕 들어가면서도 꾹꾹 눌러 참았지.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만이 현명한 거라고,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
동료는 이서환의 평온한 표정에서 짙은 의아함을 느꼈다.
"혹시 자네 로또라도 됐어? 그런 거야?"
"……."
이서환은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도 없이 동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 표정.
동료는 안색이 달라지며 놀란 입을 틀어막았다.
"됐구나! 됐어! 정말 로또 됐구나! 우와. 축하해! 이야, 내가 살다 살다 내 주변에서 로또 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비밀로 해줘. 때 되면 내가 말할 테니까."
"갑자기 음식점 차린대서 돈이 어디서 났나 했더니, 역시 종잣돈이 있었구먼. 알았어, 내가 비밀로 할게. 근데 내가 입이 근질근질하니까 자네가 빨리 공개해야 돼?"
"조만간 매장 열면 시청 직원들 초대해서 거하게 대접할 거야. 그때 내 입으로 말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자네도 비밀로 해줘."
"오케이. 알았어. 근데 얼마? 얼마나 됐어?"
"당장 일 때려치우고 평생 놀고먹어도 될 정도?"
"우와…… 그럼 수동으로 여러 장 사서 당첨된 거구나? 맞지?"
이서환은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동료의 오해를 그대로 놔두었다.
***
최판섭 시장은 더 이상 이서환을 찾지 않았다.
하수영이 이서환한테 관심을 둔 줄 알고 신경을 기울였지만, 아니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시장의 관심이 사라졌지만 이서환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영레스토랑 부산 1호점 오픈 준비에 매진했다.
이서환이 신경 쓸 것은 별로 없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주희도 사장이라는 인물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었으니까.
이서환이 한 것이라고는, 가게를 열고 싶은 위치를 결정한 것뿐이었다.
"수영라면 35,000원짜리 오리지널과 10,000짜리 다운그레이드는 사실 들어가는 고명의 양 차이거든요. 보시면 알겠지만 오리지널은 고명의 양이 아주 푸짐합니다."
"사진으로만 봐도 오리지널이 훨씬 맛있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다운그레이드가 맛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만 원짜리 라면이지만 그 값은 충분히 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도 불티나게 팔리지요."
주희도는 한창 인테리어 공사 중인 매장 안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센텀시티도 상권이 좋은 동네라 아마 장사는 잘될 겁니다. 좋은 목으로 잡으셨습니다."
오픈을 준비하는 동안, 시청에 소문이 쫙 퍼졌다.
이서환이 조만간 음식점을 오픈한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범대협 과장은 여전히 그를 불편하게 대했다.
틈만 나면 잡아먹으려고 들면서 말도 안 되는 갈굼을 시도했지만, 이 서환은 더 이상 그에게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야! 이 계장! 어제 내가 이거 다 끝내놓기 전까지는 퇴근하지 말랬는데 이게 뭐냐? 너 어제 정시 퇴근했다면서?"
"긴급사항도 아닌데 밤새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처리 시일도 많이 남은 건입니다."
"하, 그래서 이제 상사 지시도 우습게 안다 이거냐?"
"부당한 야근 지시였으니까요. 그래도 오늘 출근하자마자 그것부터 처리하고 있습니다. 자꾸 이러시면 윤리과에 보고 올릴 수 있습니다."
"뭐? 뭐? 윤리과에 보고? 하, 너 미쳤구나?"
범대협의 괴롭힘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슬슬 지루했다.
이서환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때 되면 그때 말하려고 했는데. 범 과장님, 저 조만간 시청 그만둡니다."
"……!"
"그만두고 나면 평생 범 과장님만 쫓아다니면서 민원 넣을 거니까, 앞으로 처신 잘하십쇼."
"이, 이 계장……."
그만둔다는 부하처럼 무서운 게 없다.
심지어 협박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평생 쫓아다니는 악질 민원인이 되겠다니.
범대협 과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이서환을 괴롭히지 않았다.
부서 동료들은 범 과장이 이서환을 소 닭 보듯이 대하는 변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부서가 조용하니 다행으로 여겼다.
***
청담수영마트,
하루 영업이 끝났지만 매장에는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손님의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매장은 마감이 끝나서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고, 직원들은 이미 퇴근을 한 뒤였다.
하수영.
하우스플러스 임형필 사장.
뉴월드마트 황태진.
그 셋이 고객을 위한 휴게실의 원형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간 뉴월드마트와 하우스플러스는 업계 경쟁자였지만, 이제 수영마트라는 깃발 아래로 뭉쳤습니다."
하수영이 시원스럽게 입을 열었고, 두 기업가는 말없이 흘끔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소매유통이라는 시장 파이를 놓고 평생을 싸워왔기 때문이다.
"두 분의 사이가 그간 평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모두 잊고 이제 미래로 나아갑시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자는 임형필, 후자는 황태진이었다.
여기서 평민 출신 데릴사위와 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의 차이점이 극명히 드러났다.
"임형필 사장님, 황태진 부회장님."
"예."
하수영이 부르자 둘은 정중히 대답했다.
"앞으로 두 분은 협력적 경쟁 관계를 구축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혈경쟁, 상호 디스전은 절대로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수영마트는 확장 계획이 없습니다. 혹 추가 확장을 하더라도 청담동을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수영농장 생산물은 모두 두 분의 마트를 이용해서 하겠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가볍게 펴졌다.
"경영 책임자로서 대주주인 저한테 건의하실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세요."
"경쟁 마트에 라면과 황비버섯, 국산 육류 공급을 끊어주십시오."
황태진 부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경쟁 마트라고 하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황태진은 마음 같아서는 하우스플러스와 뉴월드마트, 두 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 공급을 끊으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
하지만 하수영의 농민 지원, 직원복지, 병원 적자 운영 등의 행보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
"라테마트 하나면 됩니다."
"음, 라테마트 하나면 됩니까?"
"예, 유통마트 3강 외에도 다른 마트들이 많이 있지만, 4위 이하는 점유율을 전부 합쳐봤자 10%도 채 안 됩니다. 거기까지 건드리면 수영마트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라테마트에는 일절 공급하지 않도록 하죠. 참, 기존에 라테백화점에 입점한 수영레스토랑 매장들은 어떻게 할까요?"
수영마트의 전신은 라테마트다.
당시 하수영은 마트 부지를 넘겨받으면서 라테유통과 휴전에 들어갔다.
수영레스토랑이 라테백화점에 좋은 조건으로 입주하기도 했다.
황태진이 고개를 저었다.
"백화점은 상관없습니다. 수영레스토랑은 지금처럼 계속 라데백화점에 입주해 있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매장을 빼봤자 뉴월드백화점만 좋은 일 시키는 셈입니다."
황태진은 이제 뉴월드그룹을 자신의 울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테도 소매유통과 백화점사업은 형제끼리 서로 경쟁 관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백화점은 제쳐 놓고, 유통을 계속 공략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황태진 부회장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음, 그건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제가 유통에 관해서 뭐 알겠습니까? 대주주로서 수영농장으로 지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나서는 거지요."
커피가 식자 하수영이 손수 다시 타왔다.
잠시 끊어진 이야기를 임형필이 다시 이었다.
"회장님, 수영김치를 대량으로 유통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글쎄요. 수영김치는 수영레스토랑 가맹점들 공급하는 것만 해도 빠듯해서요."
"김치 공장이 충남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공장을 크게 확장하심이 어떻습니까?"
"흠, 근데 수영김치는 수영레스토랑을 돋보이게 해주는 아이템이라서요. 보편적으로 공급이 되면 수영레스토랑 매출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네요."
수영라면의 맛도 좋지만, 수영김치의 시너지 효과 덕분에 수영레스토랑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높은 매출이 유지되고 있었다.
수영김치의 일반유통을 고민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럼 요식업체 공급은 제외하고, 일반 가정집을 상대로 판매하는 것은 어떨까요?"
"일반 가정집이라……."
"1kg 이하로 소분해서 판매하면 요식업체가 쓰기는 어려울 겁니다. 업소용이 아닌데 업소에서 팔면 우리가 클레임을 걸 수도 있고요."
"좋습니다. 그럼 공장장님께 제가 말씀드려서 공장 확장을 건의해 보죠."
"감사합니다."
두 기업가는 확신했다.
라면, 황비버섯, 국산 육류, 수영김치까지 합세하면, 라테마트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라테마트가 무너지면…….'
'우리 뉴월드마트에서 바로 인수해야지.'
'절대 뉴월드마트에 뺏길 순 없지. 우리 하우스플러스가 무조건 산다.'
라테마트가 전국에 가진 오프라인 매장을 흡수할 수 있다면, 한 지붕아래의 경쟁자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품은 채 상대의 눈빛을 주시했다.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
'형제 기업이 됐다고 절대 봐주지 않는다.'
'라테마트는 우리가 먹는다.'
'절대 저놈에게 내주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