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503화
126장 유통과 농사 사이 (5)
하수영의 갑작스러운 방문도 당황스러웠지만, 대뜸 나온 제안이 더욱 황당했다.
상속받은 빌딩을 팔라니.
"물론 청담동 부동산은 장기적으로도 가치 상승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계장님 입장에서 굳이 팔 이유는 없죠. 하지만 그 빌딩은 제게 꼭 필요합니다."
"의원님, 그런데 이 사실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청담동의 모든 부동산은 제가 꿰고 있거든요."
"그럼 이태호 회장님이 제 친부라는 것도 원래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서 저번에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신 거구요?"
당시에는 기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사람의 재물운을 좀 봅니다."
"재물운이라고요?"
"네, 이 계장님은 재벌급 재물운을 타고 났는데 현재 자산이 그게 아니니 이상했지요. 특허, 경영, 로또, 가상화폐 같은 것도 없으시고요. 그러자 자연히 유산에 생각이 미친 겁니다."
"……."
"그 빌딩이 이태호 회장님 소유인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 사망 후 빌딩을 손에 넣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중에 계장님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거고요."
"출생의 비밀이라고 하시니 뭔가 민망합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저는 그 빌딩이 꼭 필요합니다. 부디 제게 팔아 주십시오."
"……."
이서환은 큰 고민에 빠졌다.
서울 강남, 그것도 청담동 빌딩이라면 절대로 망할 일이 없는 안전자산이다.
대출도 일절 없고, 평생 임대 수익만 받아 챙기면서 놀고먹을 수 있으리라.
팔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변호사들도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시청 공무원 외길 인생만 벌써 얼마던가.
이서환은 근래 들어 지독한 매너리즘을 느꼈다.
아내가 죽고, 자식들은 독립했고, 혼자 살면서 외로움이 떠날 날이 없었다.
뭔가 기적처럼 자신의 삶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내 인생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서 전부일까?'
이제 빌딩은 자신의 삶을 바꿔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대대적으로 바꿔줄 만한 매개체로 활용한다면 어떨까?
"전 그 빌딩이 꼭 필요합니다. 부탁합니다. 원하시는 가격이나 조건을 말씀해 주세요."
이서환은 저도 모르게 평소에 담아두고 있던 욕망을 꺼내고 말았다.
"부산 시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혹시 절 밀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낸 뒤, 이서환은 곧바로 후회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그러나 하수영의 반응은 전혀 의외였다.
"시의원이면 충분합니까? 아, 나중에 더 크게 부를 걸 그랬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예?"
"시의원 정도면 충분하신지 확인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계장님의 욕망은 그 정도에서 멈출 것 같지 않아서요."
"……."
서늘한 눈빛에 이서환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이 인생의 분기점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시의원 정도가 아니라 시장, 국회의원으로도 밀어드릴 수 있습니다."
"……!"
"그런데 계장님이 지닌 재물운이 너무 아깝군요. 이제부터 크게 트이기 시작할 텐데, 정치판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면 들어오는 재물이 줄어듭니다."
"제가 그 정도로 재물운이 좋습니까?"
이서환은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수영 같은 인물이 저런 말을 하니 몹시 마음이 쓰인다.
"어쨌든 재벌 회장의 핏줄입니다. 재물운이 남다르죠. 근데 겨우 8천억? 좀 모자라지 않아요?"
"그런…… 저는 8천억은커녕 8억도 꿈처럼 느껴지던 인생이었습니다."
"계장님은 장사를 하는 게 더 좋습니다. 믿어보세요. 제 아버지가 서해 그룹 이창영 회장이 철석같이 믿던 청담동 박수무당이었습니다. 아, 한남동이었나?"
"……."
"정치에 치중하실 거면 시의원 그 이상을 바라보시고, 재물에 치중하실 거면 시의원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구의원까지가 딱 좋긴 한데."
영리사업을 함에 있어, 구의원 이상부터는 이런저런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얼떨떨해서 생각하던 이서환이 불현듯 물었다.
"그런데 겨우 빌딩 하나 사는 대가로 그만한 도움을 주시는 겁니까?"
"원래 콜렉터들이 희귀품에 개환장…… 아니아니, 저도 재물운이 좋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여러모로 좋거든요."
"저와…… 가까이 지내고 싶으십니까?"
"전 원래 좋은 사람을 주변에 많이 두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인싸는 아니에요."
이서환은 주저 없이 결정했다.
"빌딩은 의원님께 팔겠습니다. 그 대신에 제 벗이 되어 주십시오."
"빌딩으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 길게 갑시다."
하수영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이서환은 감격해서 악수에 응했다.
자신의 아들뻘 되는 인물이지만, 한참 나이 많은 인생의 선배 같은 느낌이다.
'참 신비한 인물이다…….'
***
상속 빌딩은 아직 이서환의 명의로 넘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변호사들은 취득세 등 비용절감을 위해 이서환을 건너뛰고 바로 매수자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매각하실 겁니까? 청담동 빌딩입니다.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 오릅니다."
"매각하고 그 돈으로 다른 사업을 좀 해보려는 겁니다."
변호사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평생 시청 공무원만 하던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그러나 매수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들의 표정은 싹 변했다.
"부동산법인 하수영? 매수인이 청담 땅 부자 하수영 강남구의원입니까?"
"맞아요."
"그분과 원래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변호사들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거물과 친분이 있다면, 자신들이 함부로 대할 인물이 아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분이 어디서 들으셨는지 빌딩을 사고 싶으시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게 답니다."
"아,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변호사들은 대놓고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해서 상속 빌딩은 하수영한데 넘어가서 63호기가 되었다.
이서환은 상속에 발생하는 비용처리를 위해 받은 현금 유산으로 상속세를 치렀다.
그 과정에서 이서환은 배다른 형제나 친척들을 단 한 번도 만나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변호사를 통해, 차기 그룹 회장이 전하는 경고를 들었을 뿐이다.
"친자 확인, 유류분 청구, 태호그룹이라는 이름, 절대 머릿속에 올리지 말고 살아가라고 전달하셨습니다."
"그쪽으로 다가갈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전해주시오."
그렇게 이서환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혈육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부친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원래 인생에 없는 아버지, 이렇게 갑자기 빌딩 한 채라도 주고 가시는 게 어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 생각이 났지만, 지나간 아픔에 심력을 낭비할 마음은 없었다.
***
"결정은 하셨습니까? 앞으로 뭘 하실지."
이서환은 수영펜션 로비에서 하수영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시의원이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에 뜻이 있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거 같았습니다. 시청 공무원하시면서 이런저런 힘든 일 많이 당하셨죠?"
이서환은 멋쩍게 웃었다.
직급 낮은 공무원으로 살면서 여기저기 시달린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시의원이 되면 자신이 당했던 것을 소소하게나마 갚아줄 수 있으니, 그런 이유도 컸었다.
"이제는 마음이 섰습니다. 그런 사심 없이 시 정치에 임하고 싶습니다."
"왜요? 그런 사심을 가지는 게 나쁜 건 아니에요.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는 걸요."
"하하,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둘은 차가 식는 것도 모른 채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부산은 도로가 엉망입니다. 워낙 무계획적으로 발전과 확장을 꾀해온 탓입니다. 저는 그런 환경을 바꾸고 싶습니다."
"도로계획과보다는 시장이 되는 게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겠네요. 그럼 결국 그쪽을 택하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수영은 조금 아쉬웠다.
"현대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가진 재물운과 현재의 재물 상태가 거의 같습니다. 큰 차이가 나는 사람은 사실 거의 찾기 힘듭니다."
"얼마 전까지는 제가 그렇게 차이가 났었나 보군요. 그래서 의원님이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신 거고요."
"현재의 재물 상태보다 운이 몹시 나쁜 사람은 언젠가 크게 망합니다. 반대의 경우는 보통 자수성가,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가 되는 거고요."
이서환은 하수영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아직 자신의 재물운은 더 크게 트일 예정이라고 했던.
"어차피 와이프도 오래전에 죽고 홀몸입니다. 돈은 지금도 충분하고 넘칩니다. 남은 생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시다면야 저도 더 말 않겠습니다. 아, 그런데 가맹점주 자격을 드릴 테니 부산에서 수영레스토랑을 오픈하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아예 부산 전 지역에 대한 자격을 드릴 테니 열 개든 백 개든 차리세요. 정치하려면 그래도 기반사업이 있어야죠. 8,000억 그거 까먹는 거 순식간입니다."
수영레스토랑 오프라인 매장은 강남 지역에만 있다.
서울 비강남 지역에는 배달 전용 매장만 존재한다.
그리고 배달 전용 매장의 매출 99%는 1만 원짜리 다운그레이드메뉴가 차지한다.
"원래 부산에서는 펜션만 하려고 했으니, 계장님이 아예 전 지역을 관리하는 게 낫겠어요. 시정에 도전하시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요."
"감사합니다."
이서환은 수영레스토랑의 이름은 대충 들어서 안다.
하지만 부산 전 지역의 가맹점 사업권을 갖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몰랐다.
***
이서환은 수영레스토랑 매장 1개를 시험 삼아 먼저 오픈하기로 했다.
가게로 쓸 매장을 구한 뒤, 그는 겸직 허가 신청을 냈다.
도시계획실장은 신청서를 보고 이 서환을 호출했다.
"이 계장, 음식점을 열고 싶다고? 그럼 운영은 어떻게 할 건데?"
"매장은 제 자식들에게 맡길 겁니다. 저는 그냥 투자만 하는 겁니다."
"음식점에 투자만 하는 거라면 도로계획과는 무관하고, 허가 쉽게 나오겠네. 시청 일에는 지장 없을 자신 있지?"
"물론입니다."
"좋아, 내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 근데 요즘에도 시장님이 자주 찾으시나?"
"요즘에는 뜸하십니다."
"시장님 괜히 찾아가지 말고, 역효과 나니까 자네는 조용히 있어."
"네, 실장님."
허가신청 보고는 당연히 시장까지 올라갔고, 이서환은 무난하게 음식 점 운영을 승인받았다.
"이 계장님, 음식점 오픈한다면서요?"
"음식점 연다고? 아이구, 축하해."
"오픈 전에 우리 시청 사람들 한번 쫙 초청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시샘하는 반응도 없지는 않았다.
"계장일 요즘 널널한가 봐? 음식저어엄? 그게 얼마나 힘들고 사람 정신 혼란하게 하는 건데, 그런 거 차리면 본 업무에 집중할 수나 있겠어?"
평소 이서환한테 아니꼽게 대하던 바로 상사, 도시계획과장 범대협이 인상을 쓰며 툴툴댔다.
시의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사적 감정을 섞게 한 바로 그 인물.
범대협 과장이 이서환을 얼마나 달달 볶는지는 도시계획실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마음먹기에 달렸구나.'
희한했다.
예전에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점심에 먹은 게 역류할 정도로 속이 괴롭고 매슥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하룻강아지가 짖는 것처럼 우습고,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공무에 지장 없게 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쇼."
"지장이 없을 수가 있나? 자나 깨나 가게 매출만 생각할 텐데, 일이 손에 잡히기나 하겠어?"
"그럴 일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엉? 이 계장 때문에 우리 부서 과부하 걸리면 어떻게 책임질 거야?"
"과부하 안 걸리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걸 장담하냐고?"
이서환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내쉬었다.
어찌 보면 대드는 듯이 보이는 태도에 범대협 과장은 흠칫했다.
"업무 지장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시장님이 겸직 허가 내주신 걸 가지고, 왜 벌써부터 억지를 부리십니까?"
"뭐, 억지라고? 너 지금 말 다 했냐?"